알파와 오메가

성 경 : 요한계시록 21: 5-6

인간은 시간(時間)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묵은 해를 보내고 새 해를 맞는 것도 바로 우리가 시간속에 살고 있다는 현실(現實)을 말합니다. 그러나 과연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시간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시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사는 삶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고대(古代)로부터 현대(現代)에 이르기까지 많은 철학자들이 시간의 정체에 대해 고민해 왔는데 대체로 두 가지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소위 시간을 윤회적(輪廻的)으로 보는 개념입니다. 즉, 시간은 원을 그리면서 계속 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어떤 유행가의 가사에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이라는 가사가 있는데 이것은 시간을 순환적으로, 윤회적으로 보는 개념입니다. 시간을 이렇게 보는 철학에는 소위 동양철학의, 특히 불교의 윤회사상이 있습니다.

불교(佛敎)를 비롯한 도교(道敎)등 동양사상(東洋思想)은 시간이나 존재를 하나의 구(球)로 보고 만물은 변함없이 거대한 원을 그리듯이 계속 같은 길을 반복해서 돈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거대한 원 같은데서 돌기 때문에 시간도 이렇듯 돌고 따라서 온 우주(宇宙)는 일정한 시간속을 계속 돌면서 존재(存在)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양의 윤회사상과 비슷하게 시간을 보는 서양사람들도 있는데, 바로 희랍사람들입니다. 희랍사람들은 우주안에 있는 천체들이 일정한 길을 따라 반복해서 돌듯이 시간도 결국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희랍철학자중에 유명한 플라톤은 ‘시간(時間)은 영원(永遠)을 모방(模倣)하기 위하여 원을 그리면서 움직인다’고 보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시간이란 순환적일때 가장 신적(神的)이라 보았습니다. 희랍사람들이 시간을 이토록 돌고 도는 순환(循環)적으로 본 이유는 바로 시간을 영원과 연결하려고 하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윤회적 시간관은 두가지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윤회적인 시간관 속에 인간의 시간적인 삶이 어떤 풀어버리고 싶은 굴레에 매여 산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희랍의 시간개념이 비록 시간을 영원과 잇대기 위해서 순환적인 것으로 본다고 하지만 희랍철학의 기본개념인 이원론(Dualism)에 근거하여 볼 때 시간속에 산다는 것은 결국 매여서 산다는 의미가 강하게 들어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윤회속에 산다는 것은 곧 인간이 업보의 굴레에 매여 산다고 보는 것이고 이 순환고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해탈, 즉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희랍사상이나 불교의 사상은 인간은 시간을 떠나야 구원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유하게 되고 구원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을 윤회적으로 볼 때, 또 하나의 치명적인 약점은 윤회적 시간관을 가지면 인간의 역사에 발전이 없고 진취적인 모습이 없다는 것입니다. 순환적인 시간에서는 시작이나 중간이나 끝이 없고 모든 점이 시작이요, 중간이요, 끝입니다. 따라서 새것도 없고 새로운 것을 추구할 의욕도 없으며 존재하는 것을 그대로 순응하기만 하면 된다는 소극적인 역사의식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윤회적 시간관에는 묵은 해라든가 새해라든가 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끝없이 반복되기 때문에 새로운 결심도 필요없고 언제든지 현재 있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살면 됩니다. 그리서 반성도 또 새로운 진보도 필요치 않습니다.

시간을 이해하는데는 이와같이 순환적, 윤회적으로 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시간을 직선으로 보는 개념이 있습니다. 시간은 저 먼 과거에서 먼 미래를 향해 창조적으로 전진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직선적 시간개념은 시간은 원을 그리면서 도는 것이 아니고 직선으로 향해 간다는 것입니다.

시간은 미래를 향해서는 새로운 것을 개발하고 창조하면서 나아가는 반면, 시간이 현재를 지나 과거가 되면 그 시간은 그 순간부터 소멸하고 붕괴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폭발물의 도화선처럼 도화선위에는 불이 끊임없이 붙어가지만 불이 붙어 지나가 버리고 난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허무한 것입니다.

직선적 시간의 개념이 윤회적 시간의 개념보다는 발전적이고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감이 있지만 문제는 지나온 시간은 붕괴되고 소멸되고 없어진다는 즉, 시간속에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생을 소멸시키며 살아간다는 의미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대표적으로 다른 시간의 개념들을 보았습니다. 어느 시간의 개념이든지 다 문제로 안고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첫째는 시간속에 사는 존재는 불안하고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윤회적인 시간관은 인간이 시간이란 굴레에 매여 있다는 억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고, 직선적 시간관에서도 인간은 붕괴되고 소멸되어 가며 분산되는 부정적 이미지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두번째의 문제는 윤회적인 시간관이나 직선적 시간관이나 둘 다 강력한 열망이 있으며, 어떻게든지 영원과 연결하려는 소망이 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 안타까운 문제를 다 극복하고 우리에게 희망적이고 용기를 주는 시간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관입니다. 하나님의 시간관은 오늘 성경말씀이 말씀하시는대로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즉 처음과 나중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시간의 처음의 주인이시며 동시에 마지막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관에는 처음도 마지막도 현재처럼 다같이 존재합니다. 윤회처럼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시작도 있고 끝도 있으면서 그러나 직선적인 시간관처럼 지나온 과거는 소멸되는 것이 아닌 그대로 현재처럼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처음과 끝이 있다고 해서 처음이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끝 이후에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처음이전은 바로 영원과 이어져 있고, 마지막 이후 또한 영원과 이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처음과 끝, 알파와 오메가는 마치 줄타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줄을 타기 전에 완전히 균형감각을 잡고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일단 줄위에 올라가게 되면 아주 위험하여 균형을 잡을 수 없는 불안정한 시간을 보내다가 줄을 타고 마지막에 다다르면 거기서 줄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균형을 잡지 않아도 되는 평안한 상태에 다다르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 바로 앞부분, 21장 1-4절에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에는 눈물도 사망도 곡하는 것도 애통하는 것도 다 없는데 이는 이전 것이 지나간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이전 것이 지나갔다는 것은 과거가 지나가 소멸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줄타기에서 줄위의 시간처럼 불안하고 균형을 잡을 수 없는 삶이 끝나고 이제는 그런 불균형이 없는 삶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안한 시간의 개념이긴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위를 걷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가지는 작은 불균형만 있을 뿐, 그 줄을 충실히 어긋나지 않고 탔을 때 우리는 결국 더 이상 균형을 잡을 필요가 없는 완전히 평안한 상태인 영원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바로 이런 개념입니다. 영원속에 존재하던 우리가 일시적 시간속에 와 있다가 다시 영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도 바로 이런 개념으로 자신의 존재를 이해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속에 존재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과거도 소멸되지 않는, 그리고 우리의 시간이 영원한 고난의 굴레를 도는 윤회적인 존재도 아닌, 주어진 시간을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시간속에 산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제 우리의 삶을 영원에서 영원으로 옮겨가는 삶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불안할 이유도 아쉬울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시간속에서 그 시간을 떠나지 않고 살면 우리는 영원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시간속에서 조금 더 영원으로 접근하는 희망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에서 영원으로 옮겨가는 우리의 삶에 축복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박성원 목사, 1994. 1. 2 신년주일, 부산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