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성 경 / 마태복음 16:13-18

금으로부터 약 2000년전 한 인간이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전대미문의 세상혁명 프로그램을 가지고 이 세상에 등장했습니다. 그 이전에도 이렇게 선언한 사람이 없었고 그 이후에도 이렇게 선언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일생을 무모하리 만치 자신이 선언한 대로 살았습니다.이를테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5) 라고 자기가 말한 그대로 산 사람은 역사상 이 분밖에 없습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이렇게 철저하게 자기의 프로그램에 일치하게 살았던 분은 없습니다.

그는 온갖 못고칠 병으로 신음하고 있는 인류와 세계를 치료하고, 새로운 하늘과 땅이 되듯이 치유하기 위해서 왔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이 세상에 사는 한 개인이나 한 사회나 한 시대가 지고 있는 근본적인 아픔과 고뇌들을 해결해 줄 가능성을 보여 준 사람은 그 분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 분께 기대하고 그분께 의지했습니다. 인간과 세계의 치유를 위한 그 분의 처방전은 믿음, 소망, 사랑이었습니다. 살벌하고 포악한 이 세상의 죄악상과 모순의 근원에 비해볼 때 그 분의 처방전은 상당히 약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처방전은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리고 희망의 가능성을 내다보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솔직하게 질문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 분의 처방전이 과연 효력을 발휘했는가? 그 분이 심어 주려했던 믿음과, 그 분이 우리 인류의 가슴에 담아주려 했던 그 소망과, 그 분이 온 몸으로 가르쳐 주셨던 사랑이, 그가 기대하던 대로 또 우리가 기대하던 대로 세상을 바꾸어 놓았는가? 세계가 안고 있는 질병이 치유되고 모든 것이 새로워졌는가? 이 질문에 대해 최소한, 솔직하고 진지하게 대답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이후 세번째 천년을 맞이하는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보는 세상은 오히려 더 완악해지고 희망이 없어져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들은 개인적으로 볼 때 본질적으로는 더 행복해 지지 않았고, 전체적으로 볼 때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때보다도 더 심각한 위기 앞에 서 있습니다.

수 천년을 지나면서 인류의 문명은 상당한 진보를 이룩해 왔지만 적어도 인간의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전혀 진보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문제도, 질병의 문제도, 고독의 문제도, 갈등의 문제도, 구조적 모순의 문제도 -아담과 하와가 가졌던 문제들을 그대로 우리도 가지고 있습니다.

민족들 사이의 무력적인 대결들도 과거 역사에서 경험한 것들을 훨씬 능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카인 이후부터 이미 폭력으로 물들기 시작했고 인간 역사의 대부분은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져왔습니다. 폭력의 방법들은 오히려 날이 갈수록 정밀화되고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화되어서 오늘날은 인간이라는 종을 멸종시킬 수 있을 정도로 무섭고 다양한 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가능성들 앞에서 인류는 그저 전율하고만 있습니다.

경제적 착취도 봉건시대를 능가하여 시장경제의 원리니, 국제무역질서니 하는 경제논리로 착취를 기술적으로 합법화 시켜나가고 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전쟁을 명분 삼아서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평화라는 이름을 내세워 강대국이 전쟁촉발의 위기를 자꾸 불러일으키는 고도의 전술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선을 향한 새로움은 생성되지 않고 악을 향한 새로움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분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였으나 인간은 죄악을 새롭게 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잘못입니까?

그 분은 만물을 선하게 만들기 위해서 오셨는데 그를 맞이한 세계는 왜 새롭게 되고 치유되고 선하게 되기는 커녕 더욱 악해져 가는 것입니까? 그 분의 잘못입니까? 아니면 우리들의 잘못입니까? 그 분은 이상주의자였습니까?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꿈꾸 는 망상주의자였습니까? 아니면 그 분이 생각했던 것을 우리가 도저히 소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분이 인간과 인류의 역사를 과대평가 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지금까지 그 분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해 왔습니까?

그 분이 잘못된 인간상을 가졌습니까? 우리가 잘못된 예수의 상을 가졌습니까? 인간혁명의 길은 있습니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또 인간의 모순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그 모순이 풀리는 길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인간의 마음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구조의 변화가 전혀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더라도 인간의 마음이 변하면 역사는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의지 아래에서 30여년 동안의 군부독재가 이 나라에 계속되었고, 한 사람의 의지 때문에 정치개혁과 사회개혁과 민주화의 과정이 실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개혁을 시도했던 그 한 사람의 마음이 바뀌면 국민의 열망도 역사의 기대도 다시 곤두박질 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인식이 문제고 그 인식의 행동화가 문제입니다. 문제는 얼마나 올바로 인식하고, 얼마나 용기있게 행동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인류에게 더 없이 중요하고 위대한 기회인가?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가능성을 던져주고 있는가? 우리 인간이 그 분에게서 더이상 가능성을 발견할 수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잊어야 하며 그 분을 선포하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 분에게서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을 떨쳐버릴 수 없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심각하게 해야 합니다. “혹시 우리가 그 분을 잘못 이해하고 그 분을 잘못 선포해 온 것은 아닐까?”

그 분은 자기를 따라오면 구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 분을 따라가는데도 이 세상에 구원이 없는 것일까? 그 분은 애당초 “구원의 길”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하는 것처럼 인간을 현혹한 것은 아닐까? 그 분이 현혹하였는가? 아니면 그 분을 잘못 이해하고, 그 분이 따라오라고 하면서 걸어간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따라간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 분의 길은 옳았는데 우리가 그 분을 잘못 이해하였다면 이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만약 그 분의 길을 옳았는데 우리가 그 분을 잘못 이해했다면 그 분을 새로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분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 그 때 이미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그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것이 예수님이 궁금해 하셨던 질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세상이 만나는 중요한 접촉점입니다.예수님이 인간의 역사 앞에 와 서셨는데, 그가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와의 만남에 중대한 착오를 가져오는 결과가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더냐고 물었습니다. 말하자면 세상이 그리스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더냐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여론을 보고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에 하나라 하더이다.”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신앙의 내용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세상의 구원의 가능성이 달려 있습니다. 신앙이 잘못되고 신앙생활이 잘못되고 교회가 잘못되고 세상이 잘못되는 모든 것도 예수님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못 박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이 누구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예의 주시해 보아야 하는데 여러가지 답변이 나왔지만 크게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겠습니다. 한 가지는 예수님을 세례 요한으로, 엘리야로, 예레미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인식을 제자들이 보고 드렸을 때 예수님은 그 대답에 대해 부정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 대답들에 만족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서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고 물으시고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했을 때 비로소 만족하셨습니다. 그 분은 이 신앙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고백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 점에 응시해 보십시다. 첫째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레미야니, 엘리야니, 세례 요한이니 하고 한계가 있는 인간으로서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인식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 첫째점은 둘째점에 의해 다시 한번 강조됩니다. 그 신앙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해하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이 고백이 로마황제에게 헌정된 도시였던 카이사랴 빌립보에서 선언된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보겠습니다. 이 모든 말씀 전체는 예수님의 권세와 그 분을 고백하는 권세는 세상권세가 도전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권세라는 것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의 문제는 초기 교회의 칼케돈 신조 논쟁에서처럼 예수님이 신성을 가졌느냐 인성을 가졌느냐 하는 따위의 신학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 분이 하나님이냐 인간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삶은 하나님의 삶이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분은 자기가 하나님이냐 인간이냐, 신성이냐 인성이냐로 규명되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삶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 분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정치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경제가 운용되고, 하나님의 사상이 천명되고, 하나님의 평화안이 제시되었고 실천되었습니다.

칼 바르트 (Karl Barth)가 UN 총회에 초청되어서 연설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세계의 평화를 위해 논의하고 있으나 이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세계의 평화는 이룩될 수 없습니다."

예수의 삶속에는 하나님의 삶이 있었습니다. 오늘 메시야가 왔는데도 왜 인간의 역사는 더욱 비참해 집니까? 그 이유는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 ...”(요1:10-11)하고 요한복음 기자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삶이 왔는데도 그 삶을 배우고 받아들이지 않고 실현하지 않기 때문에 즉 우리의 거부나 외면 때문에 세계는 지금도 아픔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와 세계가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예수님의 삶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영적인 죄만을 구원하는 구세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을 다 망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치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경제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교육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평화안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개혁의지를 받아들이는 길이 이 세계가 사는 길입니다. 우리의 결심이 문제입니다. 특히 그 분의 삶 속에 하나님의 삶이 나타났다고 고백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결심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세상이 무어라 해도 예수님의 삶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삶을 이 세상의 정치와 경제, 삶과 역사에 실현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그 치유의 처방을 듣게 하고 효력을 발휘하게 하는 길입니다.

올해 4월 월간 “말”지에는 흥미있는 기사가 하나 실려 있습니다. “내가 아직 종교를 갖지 않는 이유” 이 기이한 기사는 통일학자 리영희 교수가 쓴 글입니다. 전반적인 글의 내용이 제목만큼 관심을 끄는 것은 아니지만 글 속에서 아주 도전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 감옥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세월 감옥생활을 하는 비전향 장기수가 있습니다.이 중에 최고로 오래 산 장기수는 무려 42년을 살았습니다.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던 남아프리카의 백인정권을 전복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넬슨 만델라 (Nelson Mandela)도 감옥생활이 고작 27년밖에 안되었습니다. 한국감옥의 장기수 기록에는 반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들은 비전향 장기수인데 비전향 장기수라는 것은 사회주의 이념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사람들입니다. 자본주의가 굳어질 대로 굳어진 남한의 감옥에서 40년이상을 살면서 또한 사회주의가 몰락을 하고 이제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 체제로 속속 전환되고 있는데도 그들은 아직도 사회주의로 세상을 바꿔볼 수 있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편안하고 자유로운 상황에서 이런 신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감옥 속에서 매일같이 전향하라고 고문을 받아가면서 강요당하기를 40년동안 계속했는데도 아직도 신념을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가능하지 않는 사회주의, 몰락해 가는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도 40년간, 아니 관속에서 40년을 살더라도 그 신념을 바꾸지 않으리라는 사람들 - 이들의 판단이 옳고 그른 것은 떠나서 그 고백이 얼마나 철저하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감옥에 40년동안 가두고 기독교사상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새 세상이 온다는 것을 포기하고 세상의 사상에 투항하라고 강요한다면 오늘 신실하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만큼 버틸 수 있겠습니까? 저부터도 여기에 대한 자신감이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이처럼 믿음에 투철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로마의 카타콤에 가면 로마 황제의 박해아래서 예수를 고백했다는 이유로 그 지하무덤에서 태어나서 일생 한번도 땅 위에 올라오지 못하고 거기에서 죽은 크리스챤들이 있습니다. 카타콤에서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된 수많은 사람들은 넬슨 만델라보다도 우리나라의 비전향 장기수보다도 더 강한 신념, 아니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올 것이라고 믿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주님 되시는 예수께서도 그 삶을 이미 사셨습니다. 세상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자기가 가져온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세워질 것이라는 신념으로 그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수난주간을 맞는 이 계절이 우리의 이런 신앙고백을 확고하게 하는 귀한 절기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박성원 목사, 1994. 3. 27. 부산진교회, 종려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