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의 상상력

성 경 / 빌립보서 4:10-14
 
오스트리아 비엔나에는 슈베르트의 생가가 있습니다. 슈베르트의 생가에 가면 인상 깊은 곳이 있는데 집 안쪽 벽에 돌로 조각해 붙인 분수로서 거기에는 숭어 몇 마리가 조각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슈베르트가 그 유명한 그의 가곡 숭어를 작곡할 때 바로 이 조각품에서 악상을 받고 작곡을 했다는 것입니다.

음악평론에서는 슈베르트의 가곡 숭어는 가만히 듣고 있으면 마치 숭어가 물속에서 꼬리를 힘차게 치며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로 살아있는 곡이라고 합니다. 옛날에 이 곡을 들을 때는 아마 슈베르트가 연못가에 앉아서 연못 속에서 힘차게 노는 숭어 떼를 바라다보다가 곡이 떠올라 작곡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슈베르트의 생가에 가서 그가 악상을 부여받은 것이 연못 속에 살아 움직이는 숭어가 아니고 벽에 돌로 조각된 숭어란 사실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예술가의 상상력입니다. 예술가의 상상력이란 그저 평범한, 그 누구나 보아도 지나쳐 버릴 그 일속에서 너무나 신비한 사실과 의미를 캐내어 작품에 담는 것입니다. 예술가에게 있어서는 상상을 할 수 있는 완벽한 환경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평범한 사실이나 사물을 보고도 거기에서 생의 찬미를 이끌어 내는 상상력이 바로 예술가의 상상력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테너가수 파바로티(Pavarotti)가 라디오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성악가의 임무를 정의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성악가는 오선지에 음표로 기록된 평범한 악보 한 장을 손에 받는다. 음악가의 임무는 이 평범한 오선지에 기록된 그 악보에서 살아서 감동을 주는 음악을 살려내는 것이다.

정말 그렇습니다. 악보에 그려진 것은 보통 사람은 알 수 없는 음악기호들이고 음악가가 아니면 제대로 읽어 낼 수도 없는 이상스런 기호들입니다. 그러나 이 이상스런 기호들에서 음악가는 모든 사람이 들으면 그 아름다움에 도취할 만한 아름답고 감동적인 음악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악가의 재주이고 임무입니다.

이는 예술가뿐만 아니라 상상력을 요구하는 다른 학문에서도 마찬가지이라고 생각됩니다. 예를 들면 물리학자는 우리가 해독할 수 없는 이상한 기호로 적힌 이론을 구성하고 거기에서 우리가 쓰기에 편리한 기계나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원리가 무엇이냐 하면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란 평범하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비범한 이치를 찾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과학자 뉴턴(Newton)이 만류인력의 법칙을 발견할 때는 무슨 특별한 상황을 보고서 그 법칙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풀밭에 누워있는데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져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지구에는 잡아당기는 중력이 있다는 원리를 생각해 낸 것입니다.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은 누구든지 보았지만 그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은 지구의 중력 때문이라는 데까지 생각을 상상해 내는 것은 뉴턴의 특유한 상상력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예술가적 상상력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이 상상력을 예술가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에게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신앙인에게는 우리에게 주어진 평범한 삶속에서 하나님의 비범한 삶의 원리들을 찾아내어 자기의 삶속에 살려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도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음악가가 악보에서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감동적인 음악을 살려내듯이 우리가 성서를 읽고 기도를 하면 일고 기도를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삶의 지혜와 힘을 우리의 삶에 살려내는 것입니다. 성서는 그 자체는 하나의 책이지만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을 우리 삶속에 살려내면 그 때 비로소 살아있는 말씀이 되는 것이며 신앙은 기독교인이 되는 것으로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삶을 우리의 삶에 살려낼 때 비로소 신앙의 힘이 발효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의 생의 찬가가 나오는데 사도바울이야 말로 그의 신앙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삶을 자기의 삶에 살려냄으로써 가장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가장 큰 기쁨을 누리며 산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 나오는 그의 생의 찬가는 삶의 조건이 어떻더라도 그는 그 삶에서 기쁨과 보람의 생을 살아갈 수 있는 상상력을 담고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는 어떤 처지에 처하더라도 적응해 나갈 수 있는 삶의 비결을 터득했다고 했습니다. 이 삶의 비결이란 그냥 견디어 나가고 참고 나가는 비결정도가 아니라 이 말을 하기 바로 전에 바울이 말한 “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하는 말씀과 연관지어 볼 때 이 삶의 비결이란 그 삶의 상황과 조건에 관계없이 기쁨의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을 말합니다. 이것은 신앙을 자기의 궁핍한 삶을 가장 부요한 삶으로 살려내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바울의 위대한 신앙적 상상력이었읍니다.

삶에 있어서 최대의 지혜는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 속에서 최대한의 기쁨을 살려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슈베르트가 숭어가 물속에서 힘차게 꼬리치며 노니는 모습을 살려내는데 그가 필요했을 것은 꼭 연못이 아니라 벽에 돌로 조각된 숭어조각품이었듯이, 또 그 돌로 된 숭어조각품에서 숭어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그려냈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쁨의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모든 기쁨의 조건들을 갗추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의 조건 속에서도 기쁨을 살려내는 비결이 중요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사람은 삶에 기쁨을 가지려면 기쁨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돈도 어느 정도 있어야 하고 사회적 지위도 남 뒤지지 않게 있어야 하고 나를 괴롭게 하는 골치 아픈 것들이 사라져야 기쁨이 있지 않겠느냐 합니다. 그러나 삶에 대한 통달을 하면 꼭 그렇지를 않습니다. 때로는 괴로움을 스스로 짊어지는데서 더욱 진한 기쁨이 경험될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읽은 기사인데 어떤 서울대학교 교수가 지방대학의 학문적 육성을 위해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한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교수는 무슨 문제가 있어서 서울대학교를 사임하는 것이 아니고 지방대학의 학문적 육성을 위하여 사임하는 것이고 그가 사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 분이야 말로 서울대학교에 남아있어야 할 분인데 사임을 한다니 섭섭해 하는 후학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는 것이 명예스런 길이고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면 기쁨이 충만할 것같이 생각하며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는 것이 기쁨이기도 하겠지만 지방대학의 학문적 육성을 위해 서울대학교교수직을 사임하는데는 더 큰 기쁨이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삶의 기쁨은 어떤 의미에서는 역설적입니다. 기쁨의 조건이 충족되어서 기쁨이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의 조건이라 할 만한 것이 빼앗기고 상황은 더 어려워 졌을 때도 기쁨은 오히려 더 크게 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삶의 비결을 터득하는 데는 자동적으로 터득되는 것이 아니라 심오한 상상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상황에 의해 지배를 받아서는 안되고 상황을 내가 스스로 해석할 수 있는 자기가 상황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상황에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해석할 수 있는 주인이 될 때 비로소 그는 상황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고 기쁨을 상황에 구애됨이 없이 자신이 간직해 나갈 수 있습니다. 환경이 우리의 주체가 아니라 우리가 환경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삶의 비결을 그리스도의 진리를 터득한 이후에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그 겸허의 삶이, 그 진리의 삶이, 그 사랑의 삶이 어떤 인간의 외형적 삶의 조건에 앞서 근본적 삶의 기쁨을 준다고 보고 그 분의 삶을 따르는 것이 기쁨의 원천이 된다고 결단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의 학문과 사회적 명성과 부에 관한한 남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완벽하게 갖추었으나 그는 그리스도라는 분을 만난 이후에는 그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본 이후에는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정신에 있어서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읍니다.

사람이 사람위에서 거들먹거리며 위세를 떠는 삶이 아닌 지극히 낮은 자들과 그 낮은 자리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그 삶의 자세에서 그 어떤 높은 자보다 높은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기쁨이란 것은 세상 적으로 높아져야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없이 낮아지는데서 더욱 의미 깊게 얻어진다는 이 원리를 안 뒤에는 그는 일체의 삶의 비결을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사도다운 상상력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다. 우리는 삶의 기쁨과 행복을 얻기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기쁨 그 자체를 즐기기보다도 기쁨의 조건을 만드는데 더 많은 정력을 소비합니다. 그러나 기쁨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속에 어떤 삶의 환경이 몰아닥쳐도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기쁨의 줄기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바로 이 기쁨은 원천을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에서 보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종교적 교리를 고귀하게 지키고 숭고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사랑할 자의 비천한 자리에 낮추어서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란 삶의 원칙 그 자체가 달라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유대인 명문가의 자손으로 학문이 높고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그에게 기쁨은 항상 계급적 상승에서 오고 유대인으로서 로마시민권을 소유할 정도로 권세를 가지는 것에서 기쁨이 올 줄로 생각하다가 가난하게 가난한 자와 외로운 자와 살면서 그들을 높여가는 삶을 살면서 자유한 그리스도를 보고 기쁨은 부유한데서 오는 것이 아니란 이 삶의 위대한 상상력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오히려 그 역전적인 삶의 방식을 바울은 터득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6:9에 보면 그는 이렇게 역설적인 삶을 제시했읍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 삶을 보면 삶의 방법이 현저히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남을 부요하게 해 주는데 내게 많은 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가난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기쁜 생활을 해야 기쁨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당하더라도 기쁨이 올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은 삶의 방정식이 획기적으로 변한 상황인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 하나만을 소유하였는데 그는 모든 삶의 비결을 이처럼 터득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삶을 터득한 것입니다. 바울은 깊은 신앙적 상상력으로 가장 비천하게 자기를 낯추어 살아갔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신적인 사랑과 진리의 길, 그리고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가장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읽어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어떤 삶의 조건에서도 나의 기쁨을 창출해 낼 수 있는 이 삶의 상상력을 우리가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기나 긴 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환경에 구애됨이 없이 우리 생의 기쁨을 자아낼 수 있는 생의 원칙이 필요한 것입니다. 슈베르트가 벽에 돌로 조각된 숭어조각품을 보고 거기에서 연못 속에 힘차게 노니는 숭어의 모습을 그려내듯이 연못이 아닌 돌조각으로 된 모조품 같은 우리의 삶의 조건 속에서도 기쁨과 희망과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살려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의 힘이 바로 이 삶을 의미 깊게 살려내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아주 훌륭하게 살지는 못해도 신앙을 힘 있게 가지면 최소한 어떤 인간적 어려움 속에서도 그 의미를 찾아가며 상황을 해석하고 그 속에서 기쁨을 찾아내려는 자세가 형성된다고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삶의 열량이며 에너지인 신앙을 더욱 돈독히 가지시기를 권면하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이런 신앙의 에너지를 창출하는 중요한 신앙의 연료일 것입니다. 아멘.

<박성원 목사, 1994. 4. 10. 부산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