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론의 꽃

성 경 / 아가서 2:11-13

봄이 오고 온 대지에 꽃이 만발하고 있습니다. 봄이 오면 들에서, 꽃밭에서, 산에서, 그리고 시골집 화단에서, 정원에서, 집안 거실에 놓아둔 화분에서, 심지어 감옥 담장 밑에서 까지 꽃은 피어납니다. 이 세상의 자연이 우리 인간의 삶에 어느 하나 의미를 주지 않는 것이 없지만 특히 꽃처럼 인간의 정서에 순수하고 아름답운 의미와 깊은 고요를 주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성서에서 꽃은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해도 종래는 시들고 쇠하여짐을 상기시키면서 인생의 영화도 그렇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런 교훈은 중요한 것입니다.

꽃이 시들 때처럼 추하게 보이는 것이 없고 우리가 화려하다고 생각하는 인생의 영화가 종래는 그렇게 시드는 것을 볼 때, 잠깐 피는 영화에 연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시드는 꽃에서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 솔로몬의 영화도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으니 우리의 영화는 꽃보다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꽃이 시들기 전까지의 일생을 사는 것을 보면 우리 인간의 삶에 주는 기쁨이나 의미는 상당히 크다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이 꽃의 긍정적인 삶을 음미해보며, 그 속에 있는 신앙적 의미를 새겨 보려 합니다. 또한 자연은 신앙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통 생각하는데, 이를 통해 자연과 신앙이 깊은 관계가 있음을 깨닫고 더 나아가 온 자연과 더불어 인간이 하나님께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길을 배우려고 합니다.

먼저 꽃은 인간에게 다른 생각을 하기 전에 아름답다는 마음과 사랑스런 마음을 인도해 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손에 창조된 인간이 깊은 잠속에서 깨어나서 창조된 동산을 신기한 눈으로 두리번거리면서 다닐 때 맨 처음 꽃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었겠습니까?

제가 83년도에 스위스에 처음 여행했을 때 Eaux-Vives 공원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파란 잔디 위에 아름답게 꽃이 피어있는 모습을 보고는 처음으로 “아름답다”는 형용사가 어떤 것인지 비로소 실감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에덴동산을 거닐던 아담과 하와도 꽃을 보고는 슬프다, 외롭다, 괴롭다는 감정을 경험하기 전에 먼저 아름답다는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때 이래로 인간은 꽃들을 대할 때마다 어떤 잠재된 어두운 감정을 표출하기 전에 먼저 아름답다는 감정을 나타내어 왔을 것입니다.

또 인간은 과연 사랑이란 것을 누구에게서 배웠겠는가 생각해 보면 아마 꽃에게서 배웠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꽃 한송이를 바치면서 사랑의 고백을 하는 것은 여기에서 연유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렇듯 꽃은 우리 인간의 정서에서 슬프고 괴로운 어두운 면 보다는 아름답고 밝고 그래서 선해지는 정서를 유발시킵니다. 우리는 꽃을 보고는 분노하지 않습니다. 꽃을 보고는 조급해 하지 않습니다. 꽃을 보고는 불안해 하지 않습니다. 꽃을 보고는 슬퍼해 하지 않습니다. 꽃을 보는 순간 분노도, 조급함도, 불안함도, 슬픔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꽃은 평화와 여유, 밝음과 희망, 온유와 겸손으로 우리의 정서를 인도합니다. 꽃은 우리에게 사랑을 말할 뿐 미움을 말하지 않습니다. 꽃은 우리에게 밝음을 말할 뿐 어두움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꽃은 우리에게 평화를 말할 뿐 전쟁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필리핀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날 때 탱크를 몰고 오는 군인들에게 꽃을 주면서 “우리는 당신들을 사랑한다.”고 외치던 수녀들의 모습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인간은 꽃 앞에서 적의를 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꽃을 대하고 있는 순간 모든 어두운 마음은 사라지고 자기도 의식하지 못했던 아름답고 밝은 마음이 피어오릅니다. 이것은 꽃이 인간의 정서, 아니 이 세상의 현상 속에서 일차적으로 주는 의미입니다.

이제 우리가 마음을 정돈하여 더 깊은 상념에서 꽃을 보고 있노라면 꽃은 우리에게 대화를 시작합니다. 꽃은 꽃만이 가진 지극히 부드럽고 고요한 음성으로 우리를 향해서 삶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꽃은 단순히 아름답다는 경관의 대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친구요 반려자로서 우리와 사귀기 시작합니다.

시인들과 화가들의 재주는 우리 평범한 사람들보다 이 꽃들의 대화를 더 빨리, 더 깊이 듣고 볼 줄 아는 것일 뿐 사실 꽃들은 누구나를 향해서 대화를 시작합니다. 어쩌면 꽃은 말없이 우리 인생보다 더 깊이 삶을 論하고 이야기하는지도 모릅니다.

선인장 꽃은 사막과 모래바람속에서 오랜 세월을 견디며 하얀 꽃을 피워냄으로써 忍苦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복사꽃과 능금꽃은 한 인간의 위대한 생명을 탄생시키고 희생해 가는 갸날픈 어머니의 몸매처럼 연약한 그 꽃을 피우고는 그를 통하여 탐스런 열매를 탄생시킴으로서 자신의 작은 봉사로 더 큰 역사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민들레는 자기는 납작하게 땅에 붙어 한발자욱도 옮기지 못하는 삶을 살지만, 자기의 몸전체를 부수어 수많은 꽃씨로 온 공중을 날며 수백리 떨어진 대지위에서 또 새로운 삶을 접착시키는 즉,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역사를 이어가는 삶을 보여줍니다. 나팔꽃은 아침이 동터올 때 활짝 피어서 아침이 온 것을 알리는 것처럼 희망과 새역사의 선포자적 삶을 알려줍니다. 수련은 흙이 아닌 물 속에서도 수려하게 핌으로써 어려운 환경을 오히려 더 아름다운 삶을 구현하는 자리로 삼고 규범화된 삶의 자리를 넘어서서도 의미있는 삶을 사는 모습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꽃을 보고 있노라면 꽃은 스승보다도, 또한 어떤 문학적 진리보다도 더 깊은 삶을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피조물가운데 꽃만큼 독특한 생애를 사는 것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먼저 꽃은 전 생애를 타인을 위해 삽니다. 꽃은 자기가 존재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꽃의 생은 전적으로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삶으로서 자신의 삶을 삽니다. 꽃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스스로를 위해서 가지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고 타인으로 하여금 그 아름다움을 즐기도록 자기봉사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삶을 삽니다.

“대학일기”란 시집을 출간한 한 대학생은 꽃論이란 이름으로 이런 시를 썼습니다.

꽃을 사랑하기 위하여
화병에 꺾어 꽂지만그것은 사랑이 아님을
꽃은 금방 시들므로 보여준다.
헝겊쪼가리거나 플라스틱조각으로 만든 조화는
보아서 아름다우나 스스로 향기가 없고
화병에서 시들지 않으므로
우리가 꽃이라 불러도
누가 꽃이라 주장해도
그 스스로는 꽃이 아님을 보여준다.
해서, 향기로운 꽃이기 위하여
그 사람의 필요를 위하여
차라리 꺾이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몸바침인가.

꽃은 그 몸속에 꿀을 지니고 사는데 이 달콤한 꿀은 자신이 먹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만든 이 꿀은 나비가 먹고 벌이 먹고 그 벌과 나비가 올 때까지 그 꿀을 지녔다가 나비와 벌이 오면 그 꿀을 아낌없이 줍니다. 꽃의 향기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꽃은 그 향기를 피워 주위로 하여금 행복을 느끼게 합니다. 꽃은 자기의 삶을 연장시키기 위해 앙탈하거나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또한 자기의 삶을 연장시키기 위하여 남을 희생하거나 정복하지 않습니다. 벌과 나비가 꿀을 빨아 가는 동안 그 발에 조금 묻어진 꽃가루로 겸손하게 자기의 삶을 이어갑니다.

여기에는 심오한 삶의 진리가 있습니다. 남을 섬기고 겸손하게 사는 그 삶은 남을 정복하고 희생시키며 자기의 삶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것보다 훨씬 더 넓고 훨씬 더 아름답게 자신의 삶을 넓혀 갑니다.

꽃은 상당히 수동적인 삶을 사는 것같지만 꽃의 일생을 보면 굉장히 역동적이고 환희적인 삶을 삽니다.꽃은 오로지 절정을 위해 삽니다. 꽃은 몽오리가 맺히고 봄이 오고 자기가 피어야 할 시기가 오면 그 어떤 것이 막아도 그 꽃의 피어남을 막을 수 없고 이로써 자기의 삶을 한껏 절정으로 피우면서 삽니다.

알프스 산에는 지금쯤 봄과 겨울이 함께 있는데 놀라운 것은 봄이 되면 꽃이 눈속을 헤치고 피어올라옵니다. 꽃은 자기의 때를 정확히 살며 자기의 때를 살 때 아낌없이 삽니다. 주저하거나 움츠리거나 감추거나 타협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피어야 할 시기면 아무리 봄바람이 시세고 겨울바람이 거칠어도 자기가 피어야 할 그 때는 어김없이 겁내지 않고 피어납니다. 조용한 혁명의 삶을 꽃은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꽃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가 어떤 삶의 경로를 걸어왔는지는 잊어버리고 현재의 아름다움으로만 그 꽃을 감상합니다. 그러나 꽃은 봄날 양지바른 담장밑에 피어나기 위하여 찬바람이 몰아치고 긴 어두움이 그림자를 드리운 겨울을 지나옵니다. 그 아름다움이 있기까지 수많은 고난과 수고의 삶을 거쳐오면서 오늘의 찬란한 삶을 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란 詩는 이런 꽃의 삶의 역사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조이던
머언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재는 돌아와 거울앞에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 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소쩍새의 구슬픈 소리, 먹구름 속의 천둥같은 환란,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한번 밖에 오지 않은 청춘을 바치고 늙어 버린 누님의 희생, 무서리 같은 고난과 역경을 통해 순례의 길을 걸은 뒤에 아름다운 한 송이의 꽃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핀 꽃은 또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아름다움과 달콤한 행복을 바치고 그의 삶의 가장 겸손한 방법으로 가장 넓게 넓혀가는 그래서 끊임없는 아름다움과 행복을 위한 봉사의 삶을 살아가는 생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샤론의 꽃이라 부릅니다.

샤론의 꽃 예수 나의 마음에
거룩하고 아름답게 피소서.
내 생명이 참 사랑의 향기로
간 데 마다 풍겨나게 하소서.
예수, 나의 주여, 샤론의 꽃이여
나의 맘에 사랑으로 피소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인간의 삶속에 꽃으로 사신 것을 음미합니다. 그 분을 보면 아름다움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 분을 보면 미움은 부끄럽게 모습을 감추고 사랑만이 떠오릅니다. 그 분앞에서는 전쟁과 갈등은 그 정당한 이유를 잃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평화만 떠오릅니다. 그 분의 생애를 생각하면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온 몸으로 남을 위해서만 산 섬김의 삶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 분은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메어야 하는 절정의 삶을 살며 그 절정의 삶을 피하지고 않고 타협하지도 않는 혁명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그 분의 생애는 한번도 욕심을 부리지 않는 가장 겸손한 삶이었는데도 영원한 영광의 삶이 되며 이 영광의 삶도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닌 모든 자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그는 고통과 질고를 아는 삶이었고 온갖 어두움의 희생이 되었으나 부활로 그의 삶을 전혀 차원 다른 아름다움과 환희로 이어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시간에 꽃을 보면서 또 꽃처럼 사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묵상하십니다. 우리는 이 처럼 한 송이 꽃처럼 살 수 없을까요?

세상에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고 섬김의 삶을 살며, 정복과 경쟁을 통하여 자기를 심는 것이 아닌 봉사와 희생으로 더 넓게 자기를 심는 삶, 그리고 이 땅에 온 삶이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절정의 삶, 그것은 남 위에 군림하고 남의 것을 빼앗아 누리는 절정의 삶이 아닌 누구나 접근하여 그 속에서 행복의 꿀을 따가고 주저없이 다가가서 그 향기에 취하고 싶은 그런 삶, 자신이 피어야 할 때는 봄바람이 시샘을 하더라도 어김없이 피어나며 그 피어남으로 오히려 추위와 어둠을 부드럽게 물러가게 하는 조용한 혁명의 삶, 쉽게 가져오는 행복이 아닌 고난과 역경, 수고와 인고로 가져오는 고귀한 아름다움, 끝내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다시 살아가는 영생의 삶.

오늘 우리 손에 이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들고서 꽃같은 삶, 사랑과 아름다움을 마음에서 일게하고 타인을 위해 봉사하며 그 절정의 삶을 가장 돋보이게 살며 지극히 겸손한 모습으로 그 향기와 생명을 퍼뜨려 가는 삶, 이 같은 삶을 사심으로 우리의 인생에 쌰론의 꽃으로 피어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의 삶속에 담읍시다. 아멘.

<박성원 목사, 1994. 4. 24. 부산진교회, 꽃 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