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故鄕)

성경 : 히브리서 11:13-16

번 주간에는 민족고유의 명절 ‘설날’이 들어 있습니다. 이 주간에는 가히 민족대이동이라 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밤을 새워가면서 얻은 귀성열차표 한장을 들고 고향을 찾습니다. 고향을 찾는 이 계절에 고향이란 과연 무엇인가? 생각해 보려 합니다.

우리 민족은 참으로 고향 지향적인 민족인 것 같습니다. 요즈음 여행을 해 보면, 음식점 간판 가운데 고향 산천, 두메 산골, 시골 국수, 고향 된장국집 등 한결같이 고향과 연계한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간판이 많이 보이는데, 이런 추세는 우리의 삶이 도시화, 현대화 되어가면서 점점 더 해 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부활동산 맞은 편에는 북쪽을 향한 공원묘지가 있습니다. 이 묘지는 바로 이북에 고향을 두고 부산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묘지입니다. 보통 묘지는 남쪽을 향하여 쓰는 것이 일반적인데 구태여 북쪽을 향하는 이유는 죽어서도 고향을 잊지 못하는 그 한(恨)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가곡의 이름 중에도 고향을 주제로 한 가곡이 상당히 많습니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로 시작되는 ‘고향생각’, ‘내 고향 남쪽바다...’로 시작하는 ‘가고파’,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되는 ‘고향의 봄’ 등 많은 노래들이 고향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김소월 시인(詩人)의 작품 중에 다음과 같은 ‘고향’이란 시(詩)가 있습니다.

즘생은 모르나니 고향이나마
사람은 못 잊는 것 고향입니다.
생시에는 생각도 아니하던 것
잠들면 어느덧 고향입니다.
조상님 뼈가서 묻힌 곳이라
송아지 동무들과 놀던 곳이라
그래서 그런지도 모르지마는
아아 꿈에서는 항상 고향입니다.
봄이면 곳곳이 산새 소리
진달래 화초(花草)가 만발(滿發)하고
가을이면 골자구니 물드는 단풍(丹楓)
흐르는 샘물 위에 떠내립니다.
바라보면 하늘과 바닷물과
차차차 마주붙어 가는 곳에
고기잡이 배 돛 그림자
어기엇차 디엇차 소리 들리는 듯,
떠도는 몸이거든
고향(故鄕)이 탓이 되어
부모님 기억(記憶) 동생들 생각
꿈에라도 항상 그 곳서 뵈옵니다.
고향이 마음속에 있습니까?
마음속에 고향도 있습니다.
제 넋이 고향에 있습니까?
고향에도 제 넋이 있습니다.
물결에 떠내려간 부평(浮萍)줄기
자리잡을 새도 없네
제 자리로 돌아갈 날 있으랴마는!
괴로운 바다 이 세상의 사람인지라 돌아가리
고향을 잊었노라 하는 사람들
나를 버린 고향이라 하는 사람들
죽어서마는 천애일방(天涯一方) 헤매지 말고
넋이라도 있거들랑 고향으로 네 가거라.

왜 한국사람들은 이토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생각이 많을까요? 어떤 사람이 일본인의 고향 관(觀)과 한국사람의 고향관(觀)을 비교연구를 했는데 이런 차이점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일본사람들은 자기가 현재 살고 있는 곳을 고향이라고 생각한답니다. 그러나 한국사람은 아무리 타향에서 오래 살아도 그곳은 어디까지나 타향이지 고향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향은 오직 한 곳, 자기의 뿌리가 있는 그 곳이란 것입니다. 미국에서 오래 살고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까지 된 분이, 자기는 미국에서 30년 이상을 살고, 이제 집도 마련하고, 앞으로도 거기서 살다 죽어야 하는데, 자기집 정원에 심어놓은 나무조차도 아직 자기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낯설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김포공항에 내리는 순간에 어깨 결린 것도 없어지고 소화불량도 없어지고 모든 스트레스가 다 풀린다는 것입니다.

한국사람들이 왜 고향 지향적인지는 분석이 쉽지 않습니다만 하여간 한국사람들은 고향에 대한 향수(鄕愁)가 참으로 많은 민족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고향을 못내 못잊어 하는 고향 지향적인 사람들 중에는 한국사람 못지 않는 민족이 있는데 바로 유대민족입니다. 창세기 끝에는 고향을 떠나 이국에서 국무총리까지 지낸 요셉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요셉은 우리가 알다시피 형들의 손에 애굽으로 팔려서 천신만고 끝에 국무총리까지 된 사람입니다. 그는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이고 요즈음 같으면 미국에 가서 대성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이야기가 창세기 37장부터 50장까지에 기록되어 있는데, 전반부 다섯장은 형들의 손에 팔려서 국무총리까지의 입지전이 기록되어 있고 후반부 여덟장의 대부분은 국무총리가 된 이후 고향에서 찾아온 형제와 부모와의 해후담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창세기 49장에 보면 야곱이 12아들들에게 마지막 축복을 해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자기 아들들을 보고 어떻게 하든지 애굽에서 애굽말 잘 배우고 네 자식들도 애굽교육을 잘 시켜서 애굽에서 자리잡고 살며 성공하라고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곧 죽어도 너는 우리 고향땅 유다 그곳으로 돌아가라는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야곱이 유언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가 죽거든 내 선조들 옆에 묻어다오. 그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밭에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께서 묘자리로 쓰려고 사두었는데, 우리 모든 선조들이 거기 묻혀 있으니 나도 거기 묻어다오."(창세기 49:29; 공동번역)

이와 똑같은 유언을 그의 아들인 요셉도 하였습니다.

"나는 이제 죽을 터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어 이 땅에서 이끌어 내시고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주시리라고 맹세하신 땅으로 올라가게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반드시 찾아오실 것이다. 너희는 그 때 여기에서 내 뼈를 가지고 그리로 올라가거라." (창세기50:24-25; 공동번역)

말하자면,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되거든 반드시 돌아가고 그 때 내 유골도 가지고 고향으로 가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창세기는 고향을 떠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조상들의 이야기에 관한 한 더욱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난 이야기로 시작되어 요셉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이국땅에서 죽는 장면으로 창세기는 끝을 맺습니다.

고향은 왜 인간의 삶에 그토록 환상의 자리를 잡고 있는 것입니까? 고향에 대한 헬라적 개념과 히브리적 개념에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고향을 가리키는 그리스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게-”(γη) 라는 말이 있고 다른 하나는 “파트리스”(πατρις) 입니다. “게-”(γη)란 말은 그냥 일반적인 “땅”이란 말이고 “파트리스”(πατρις)란 말은 “아버지의 땅”이란 말입니다. 영어의 아버지란 말 father도 이 말에서 나왔습니다. 그리스어의 땅(γη)이란 말에는 모성적 의미도 있습니다만 아버지의 땅이란 “파트리스”(πατρις)란 말이 보여주듯이 부성적 의미가 상당히 있습니다.

반면에 히브리말에는 그 개념이 조금 다른 면이 있습니다. 히브리말에는 세 가지말로 고향이란 의미를 나타내는데 첫째는 “아다마”(המד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이란 뜻의 남성명사인 “아담”(מדא)이란 말의 여성명사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땅은 땅이되 모성적인 땅의 의미가 있습니다. 둘째의 말은 “마콤”(מוקמ)이란 말인데 이 말은 “서 있는 자리”란 뜻입니다. 자기가 현재 처하고 있는 자리란 뜻이 되겠습니다. 셋째는 “샤다”(הדשׁ)란 말인데 이 말은 어머니의 젖가슴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고향이란 히브리 개념은 전반적으로 모성적입니다. 고향은 어머니의 젖가슴과 같은 것입니다.

고국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아비 “부”(父)자, 부국(父國)이라고 하지 않고 어미 “모”(母)자 모국(母國)이라고 하는 것도 이런 뜻에서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원래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려는 인간의 회귀본능을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는 인간이 어머니 자궁속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이 단어들이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고향이란 “돌아갈 곳” 혹은 “자기의 출처”라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향은 사실 본향(本鄕)이 될 것이며, 우리가 떠나온 곳, 그곳으로 늘 돌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인간이 돌아갈 곳은 어딘가? 인간이 애초에 떠나온 그곳은 어디이겠는가? 이 땅위의 고향이란, 다만 출생지이지 인간의 원초적 고향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향이란 자기의 인간적 뿌리가 있는 정도이지 영원한 뿌리가 있는 곳은 아니며, 더 더욱 인생의 모든 고독과 외로움을 큰 품으로 안고 삭혀줄 그런 푸근한 고향은 되지못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향이 영원과 연결되어야 하고, 거기에서는 우리 인간의 고뇌와 수고가 상쇄되는 그런 곳이어야 함을 희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로 오늘 성서의 말씀은 그런 고향, 아니 본향(本鄕)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고향관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다시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그 뜻이 선명해 집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을 멀리 바라보고 즐거워하였으며, 땅 위에서는 손과 나그네로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네가 본향을 찾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좋은 것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전통적(傳統的)인 고향 관과는 상당히 다른 고향 관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고향은 그들이 과거에 살다가 왔던 곳, 구정이나 추석 때면 가보고 돌아가고 싶은 곳, 어렸을 때의 추억과 그리움이 서려 있는 곳, 옛 친구들과 어릴 때의 설레임이 있는 곳이라는, 어떤 의미에서 낭만적인 그런 곳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지금 우리가 땅위에 살고 있는 것, 이 자체가 손, 즉 나그네로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나그네의 삶이란 말 자체는 곧 본향이 따로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오늘 말씀은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이 세상을 최종적인 곳으로 보지 않고 더 좋은 것을 갈망하면서 오늘을 이기고 산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늘 나라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추억에 붙박혀 있는 먼 추억 속의 고향이 아니라 이와는 반대로 그곳은 저 앞에 있는 곳, 그들이 현재 살고 있는 이 나그네 땅의 모든 시련과 고난을 다 겪은 후에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더 이상 어디로 가야하는 수고가 없는 그 곳, 즉 본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믿음의 조상들은 바로 이런 본향을 사모하며 이 세상의 삶을 살았습니다.

고향이란 어머니의 젖가슴이란 설명에서 우리는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젖가슴은 우리가 생명을 얻은 그 곳이기도 하지만 거기는 평화의 자리입니다. 거기는 외로움도 괴로움도 없는 포근하고 평화로운 곳을 의미합니다. 불안하고 공포에 싸인 아기가 어머니 젖을 물 때 비로소 울음을 그치며, 포근히 잠을 잘 수 있는 곳이 어머니 젖가슴입니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곳, 거기에서는 괴로움과 외로움이 극복되고 오로지 평화와 안식만이 있는 그런 곳입니다. 참으로 고향이란 그런 곳이어야 합니다.

둘째로 중요한 것은 이 본향은 인생의 허무를 느끼고 황혼에 돌아가는 그런 걸음으로 가는 곳이 아니라 인생의 모든 시험들을 의롭게 이긴 후에,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고 난 뒤에 얻는 승리의 월계관을 쓸 그 곳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7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니라."

물론 여기의 삶은 고난의 삶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의를 위한 고난의 삶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을 지킨다 했는데 이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자기의 이익과 타협하지 않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한 싸움을 훌륭하게 산 삶을 의미합니다.

삶이란 여정 속에서 이 삶을 회피하고 도피하는 측면에서의 고향귀향이 아니라 주어진 삶의 모든 고난을 다 겪고 승리한 그 모습으로 돌아가는 곳, 즉 승리의 곳을 의미합니다. 흔히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때 시신이 되어 관속에 실려서 돌아가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의 조상들이 고향에 들어갈 때는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높이 들려 올라가는 그런 모습으로, 인간의 모든 역경과 시험을 다 이긴 그런 모습으로, 합격자의 모습으로, 승리자의 모습으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찬송가 290장은 이런 고향의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1.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 평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 / 걱정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 /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2. 광야에 찬바람 불더라도 / 앞으로 남은 길 멀지 않네 / 산너머 눈보라 재우쳐 불어도 /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3. 날구원 하신 주 모시옵고 / 영원한 영광을 누리리라 / 그리운 성도들 한 자리 만나리 /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우리는 다 고향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최후의 본향은 같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각기 자기 고향으로 뿔뿔히 흩어지는 귀성을 하지만 그곳에서는 모두가 함께 만나는 귀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함께 만나는 그 곳이 될 것입니다. 희생적으로 삶을 산 사람들, 정의를 위해 산 사람들이 가는 곳,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의 눈에 눈물을 낸 사람과 오렌지족들은 갈 수 없는 그 곳이 여기에 제시된 고향입니다.

어떻게 고향에 가느냐? 우리의 고향 귀향은 어렵게 얻은 귀성열차표 한 장을 들고 콩나물시루 같은 기차에 매달려 갑니다만 여기에서는 그 어떤 사람이든 무론(無論)하고 믿음 하나로 간다고 했습니다. “차표 필요 없어요, 주님 차장 되시니 나는 염려 없어요”하는 어린이의 복음성가대로 믿음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믿음은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주는 온갖 유혹과 불의의 시험을 거뜬히 이기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義)만을 의지하며 생을 하나님 명령을 따라 산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바로 이 세상의 본향에 미련을 두지 않고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며 산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고향을 찾아가는 이 계절에 영원한 본향을 생각하고 그 본향에 이르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박성원 목사, 1994. 2. 6 부산진교회, 설날을 앞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