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암

성 경 / 요한복음 9:1-12

우리는 매 주일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 서두에 항상 사도신경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 사도신경은 우리가 고백하는 기독교의 신앙을 가장 함축적으로 정리해 놓은 신앙고백입니다. 세계에 많은 교회가 있고 교회마다 신앙고백이 달라도 온 우주의 교회가 한 가지의 고백에만은 통일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데 있어서만큼은 개신교회는 물론 심지어 로마카톨릭교회나 정교회까지도 하나가 됩니다. 이런 면에서 전 세계 그리스도인이 사도신경이란 같은 신앙고백을 가진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며 이 고백을 통하여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가 된다는 아주 깊은 상징성이 이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사도신경은 기독교신앙의 대원칙이고 교리의 집약이지만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한 개인 한 개인의 신앙고백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치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올려서 거대한 피라밋을 만들듯이 거대한 기독교신앙의 피라밋은 자기의 삶속에서 한 개인 한 개인이 만나는 생생한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모아져서 이룩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우리는 한 개인이 자기의 실존적 상황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경험에 의거하여 그리스도를 생생하게 고백하는 신앙고백의 현장을 보게 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신앙고백은 한 개인이 예수님을 생생하게 만나는 것임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던져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만났습니다. 함께 가던 제자들이 이 소경을 보고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 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이 땅에 침을 뱉아 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에 발라주신 다음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소경은 예수님이 일러주신대로 행했고 나면서부터 소경된 눈을 고쳤습니다.

그 소경이 고쳐지고 나자 동네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참으로 믿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눈 뜬 사람이 진짜 그 소경인가, 아니면 그 사람을 닮은 다른 사람이 아닌가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그 때 나면서부터 소경된 그 사람이 “내가 바로 그 사람이요” 하고 밝혔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습니다. “야 놀랍다!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지?” 소경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 무슨 일이든지 항상 율법적으로 먼저 따지는 바리새인들이 가만 있을리가 만무했습니다. 왜냐하면 소경을 고쳐준 그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그 소경을 안식일에 고쳐 주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이것을 문제삼았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소경이 눈을 뜬 사실보다 안식일을 어긴 일이 더 중요시 되었습니다. 소경에게서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은 바리새인들은 그가 눈을 떴다는 사실을 축하하기 보다는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오늘날 흔히 이런 우를 범합니다. 병든 사람이 기도하여 병을 나으면 그 병나은 것을 축하하고 기뻐하기 보다는 신비주의니 뭐니 하고 몰아세우고, 해방신학이 수많은 억압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참 해방의 메시지를 전해 주었음에도, 그것이 전통신학의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학이 아니니 좌경신학이니 하면서 몰아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사람을 보는데 있어서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나면서부터 앞을 못보는 소경을 보고 그를 고쳐주는 일을 하기보다는 그 소경이 원죄 때문인지 자신의 죄 때문인지 신학적인 토론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소경이 고침 받은 사실보다도 예수님이 그를 안식일에 고쳐 주었다는 사실을 들어 율법을 어긴 것만을 문제삼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불행이 누구의 죄인지를 밝히는 신학적 관심보다도 나면서부터 소경된 아픔을 보셨고 안식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종교 계율보다도 그 소경을 고쳐 주어야겠다는데 마음을 두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원하시는 과정은 항상 그가 당한 고난이나 상황에 참여하시는 것으로 시작하시지 결코 처음부터 영적인 죄를 들먹이거나 종교 계율을 염두에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관심은 태어나면서 소경된 자의 고난이 그의 죄인지 그의 부모의 죄인지를 규명하는 신학적 문제가 아니고 그를 고쳐 준 날이 안식일이니 안식일을 범한 죄를 추궁하는 것이어도 안됩니다. 우리의 관심과 찬양의 주제는 나면서부터 불행했던 소경이 눈을 떴다는 사실이 되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소경에게 “당신이 그 사람의 덕택으로 눈을 떴다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소경은 “그는 예언자이십니다.” 즉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도저히 이 소경의 말이 믿어지지 않아서 그 부모를 불러 물어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소경의 부모가 대답하기를 “그 나은 사람이 우리 아들임에 틀림없는데 우리는 어떻게 되어서 눈을 뜨게 되었는지 잘 모르니 그에게 물어 보시오. 그도 다 자란 사람이니 잘 대답을 할거요.”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다시 소경을 불러서 물어 보았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시오. 우리가 알기로는 그 예수란 자는 죄인이요” 그 때 소경이 대답을 합니다. “그 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앞못보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잘 보게 되었다는 것뿐입니다.”

“그 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앞을 보지 못하다가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중요한 경험입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신앙고백입니다. 아무 뜻도 모르고 달달 외우는 신앙고백이 아니며, 남의 신앙고백을 그냥 차용하여 하는 고백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의 몸으로 생생하게 체험한 신앙고백입니다.

한국선교가 시작된 지 불과 10여년 뒤인 1898년 선교 보고서에 보면 이런 일화가 나옵니다. 언더우드 (Underwood) 선교사가 세례문답을 하게 되었는데 배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한 할머니가 문답 차례가 되었습니다. 언더우드(Underwood) 선교사가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할머니가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집에 나와 같이 계십니다.” 이번에는 선교사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꼭 할머니 집에만 계십니까? 다른 곳에는 안계십니까?” 할머니 대답이, “글쎄 난 무식한 할머니라 다른 것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 집에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Annual Report, Seoul Station, 1898-1899)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선교사가 기대하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 와 같은 신학적인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은 지금 그 할머니가 하나님께서 자기의 집에 자기와 함께 계시다고 느끼는 것 그 자체입니다. 이 할머니의 대답은 교리적으로 세례문답자가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 물음은 분명 남의 신앙고백이 아닌 자기 자신이 피부로 느끼고 확신하고 있는 고백입니다.

“나는 무식한 할머니라 잘 모르겠소만, 내가 아는 것은 그 분이 나와 함께 내 집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글쎄 그 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앞못보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잘 보게 되었다는 것뿐입니다.” 이 얼마나 분명한 신앙고백입니까?
“내가 아는 것은...”하고 시작하는, 내가 경험한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우리 신앙고백에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10여년전에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신입생을 받으면 신앙고백을 쓰게 했습니다. 그러면 대부분 어떻게 쓰느냐 하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하고 사도신경을 씁니다. 그래서 면접시간에 제가 다시 물어봅니다. “그 사도신경은 교회가 공동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이고 당신의 신앙고백은 무엇이냐? 당신은 어떤 예수를 만났다고 전할 것이냐? 예수를 만났어야지 만났다고 전하고 또한 그는 어떤 분이라고 증거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묻었습니다. 신학생들이 시험지에 써넣은 그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은 교회가 공동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이요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교리로 배운 신앙고백이지 그 학생이 직접 경험한 신앙고백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는 개인이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고백을 바탕에 깔고서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고백은 무엇입니까? 사도신경을 우리가 예배 때마다 고백하지만 과연 이 고백이 우리 개개인이 만난 생생한 예수님을 나타내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의 고백입니다. 기독교 전체가 더 나아가 온 세계의 교회가 믿는 신앙을 신학적으로 정리하고 믿음의 요지가 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임에 틀림없으나 이것은 개인의 생생한 고백은 분명 아닙니다.

신앙고백은 마치 양파껍질과 같습니다.한 껍질을 벗기면 또 다른 껍질이 나오고 그 껍질을 벗기면 또 다른 껍질이 나오듯이 교회의 신앙고백도 그렇습니다. 사도신경이란 껍질을 벗기면 거기에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그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은 세 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셨다.
그는 다시 사셨다.
그리고 영광 중에 다시 오신다.

그런데 이 교회의 공동고백이나 초대교회의 세 줄 짜리 고백의 요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마태복은 16:16에서 베드로가 그리스도 앞에 고백한 그 유명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바로 그 고백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골자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같은 이런 사람들이 바리새인들 앞에서나 동네사람들 앞에서 증거한 “ 내가 아는 것은 ‧‧‧‧.” 하고 고백하는 예수님의 은총과 구원의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은 이런 민중들이 예수님과 만난 경험의 집대성이며, 초대교회의 고백이나 사도신경은 이 간증들의 집대성을 교회의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여러 사람이 각기 체험한 예수님의 구원을 간증했습니다. 여기에는 나면서 부터 소경된 사람의 고백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에게 구원받은 생생한 경험이 있습니다. 세리 마태는 가난한 사람들의 세금을 포탈하는 자포자기한 인간이었으나 그리스도를 만나고 용서를 받은 후에 그의 제자가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사마리아여인은 평생 남에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 자기운명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는 바로 자기와 같은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경험하고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고백했습니다. 중풍병자의 고백, 막달라 마리아의 고백, 삭게오의 고백, 백부장의 고백, 아리마대 요셉의 고백, 신약성서는 수많은 개인이 바로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경험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고백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들이 저마다 자기의 삶의 실존적인 현장에서 예수님을 만난 그 경험들을 다 모았을 때 그들은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었다는 것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미에서 이 교회의 신앙고백의 원소가 되는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봅니다. 요한복음 9:35이하에 보면 그 소경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쫓겨났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이 다시 그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에게 묻습니다. “너는 인자를 믿느냐?” 즉 메시야를 믿느냐는 말입니다. 그 때 소경이 대답합니다. “선생님, 믿겠습니다. 어느 분이십니까?”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지금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예수님의 선언은 이윽고 소경이 장엄한 신앙고백과 더불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면으로 연결됩니다. 공동번역성서는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주님, 믿습니다. 하며 그는 예수 앞에 꿇어 엎드렸다.” 이 “꿇어 엎드리다”란 단어에 해당하는 희랍어가 바로 “예배”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신앙고백은 무엇입니까? 예배 때마다 그 뜻도 깊이 새기지 않은 채 무미건조하게 그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니 ‧‧‧‧.”하고 고백할 것이 아니라 이 온 우주의 교회가 함께 신앙을 고백할 때, 그 기초에 그 기반 에 “내가 아는 것은 ‧‧‧‧.” 하고 나면서 부터 소경된 그 불쌍한 사람이 경험한 그 고백, 선교사 앞에서 “하나님은 우리 집에 나와 함께 계십니다.”하고 고백했던 순수한 할머니처럼, 그러한 고백이 사도신경 고백의 기초에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아는 예수는....”하고 자신의 실존적 상황에서 만난 그리스도를 고백할 것이 없다면 사도신경의 고백도 공허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권력과 언론에 의해 국민의 눈과 귀가 막혀 있을 때, 국민의 귀와 눈을 열어주겠다는 의지로 민족지 한겨레를 창간했던 송건호 회장은 기독교에 대해 아주 냉소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민주화운동으로 감옥에 갔을 때 많은 기독교인들과 청년들이 감옥에 온 것을 보고 예수의 모습을 재발견했습니다. 예수는 영혼구원의 구주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는 차디찬 감옥바닥에서 그리스도를 이 민족의 구원자로 고백했습니다. 그는 전통적 교리가 가르치는 고백을 하지 않았으나 그의 삶의 현장에서 만난 그리스도를 고백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고백들이 세계 온갖 삶의 현장에서 오늘도 계속 고백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4일 세계기도일에는 팔레스틴의 어머니들이 팔레스틴 해방을 위해 자기의아들들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아픔을, 하나님의 백성의 해방을 위해 십자가에 처형되는 동정녀 마리아게서 나신 그리스도를 보면서 위로받고, 그의 부활을 보면서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내다보는 역사 현실적인 고백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남미에서, 아프리카에서, 남태평양에서, 인도네시아에서, 중국에서, 러시아에서, 그리고 북한에서 오늘도 한 개인의 삶의 정황, 한 국가의 역사의 현장에서 고백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이 모든 개인적인 고백들을 기초로 그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순절이 마무리되어 가는 이 주간에,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죄를 대신 지시고 처형당하시는 다음 수난주간에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나는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그 밑바닥에 여러분이 만난 그 주님에 대한 고백을 깔고서 우주적 고백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박성원 목사, 1994. 3. 20. 부산진교회, 사순절 네째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