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水)

성 경/ 출애굽기 7:17-18

2주간 동안 부산과 경남일대에 사는 우리 주민들은 수도물에 악취가 나는 물오염으로 극심한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지금 이것은 물난리입니다. 과거의 물난리는 가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이 주는 물난리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겪는 물난리는 물의 오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든 물난리입니다.

지난 월요일에 미국 로스 엔젤레스(Los Angeles)에 지진이 발생해서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냈는데, 사실 이 물난리는 어쩌면 로스 엔젤레스의 지진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심각한 재해입니다. 왜 우리의 수질오염이 로스 엔젤레스의 지진보다도 더 심각한 일이냐 하면 로스 엔젤레스의 지진피해는 일시적이며 복구가 가능한 것이지만 우리의 물오염은 영속적이며 회생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강은 불과 30년전만해도 지금의 상태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모인 장년 대부분은 어렸을 때에 지금 오염된 강에서 모두들 시원하게 멱을 감은 추억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물놀이를 하면서 때로는 물먹이는 놀이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목이 마르면 아무데서나 수도꼭지를 틀고 시원하게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위험한 물이란 뇌염모기가 살고 있는 흐르지 않는 물웅덩이 정도로 생각했고, 우리가 맛있게 먹는 미나리가 자라는 미나리깡 정도가 진흙탕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물을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고 아무데서나 멱을 감아도 피부가 가렵지 않았습니다. 요즈음은 비가 내리면 산성비라고 두려워하지만 옛날에는 극심한 가뭄때면 빗물을 받아 하루를 두었다가 그 물을 마시곤 했습니다.

어느 땐가부터 강이 오염되고 물이 탁해진다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것은 아직 포성이 멀리서 들리는 정도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포성소리가 들리는 정도가 아니고 파편이 내 집안으로까지 날아들어오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오염된 물이 정수되지 않은 채, 아니 정수과정을 거쳤다고 하는 물이 오염된 채 부엌 수도꼭지를 통해서 우리 가정까지 흘러들어오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면 왜 물이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지금 이 물의 오염의 주된원인이 경제개발에 있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지난 시대 우리에게는 정신적 이데올로기 같았던 경제개발은 우리에게 조금의 물질적 혜택을 준 댓가로 물의 생명을 앗아간 것입니다. 3년전 페놀사태가 일어나고 기형아가 테어났을 때 이미 확인된 것이지만 오염된 물은 조기출산이나 기형아의 출산으로 연결됩니다. 이제 오염된 물은 아울러 우리의 생명도 위협하고 있으며 우리 자녀들로부터 강에서 멱을 감는다는 그 천혜의 축복까지도 앗아가 버렸습니다. 우리 후손들은 강에서 멱을 감는다는 이 사실을 옛날 전설중에 한토막처럼 이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강가에서 멱을 감는다는 추억이 없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물난리에 대한 텔레비젼 대담 프로그램에서 긴 토론을 마친 다음에 사회자는 이렇게 마무리 말을 하였습니다.

오늘 물오염, 토양오염, 대기오염은 자연의 생태를 무시하고 무조건 공업화만을 추진한 정부, 기업, 국민 모두의 죄과이며, 지금 오염은 그 행위에 대한 보복을 우리가 받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계산을 해 봅니다. 물오염의 문제를 시간적으로 계산해보면 수 천년, 수 만년, 수 천만년, 아니 태초에 하나님이 물을 창조하신 이래로 맑게 보존해 내려오던 물을 우리는 단 30년 만에 마실 수 없는 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고 우리 인류의 조상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동안 깨끗하게 지켜오던 그 물을 우리 당대에서 마실 수 없는 물로, 이제는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닌 죽음을 주는 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물오염에 대한 오늘 우리의 죄과는 어마어마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지해야 합니다.

저는 이 물문제야 말로 신앙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원죄를 얻은 또 하나의 실락원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한 인간의 형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물문제를 하나님의 창조신학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을 정리하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늘 고백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문제는 과거와는 달리, 무디어진 우리의 의식에서 일대 전환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성서에서는 이 물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창세기 1:1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 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창조의 모습을 상상해본다면 천지가 창조된 이 후 아직 지구상에 생물이 생겨나기 전에 흡사 온 지구에 물 내지는 어떤 습기같은 것이 쌓여있는 듯한 그런 상상을 할 수가 있습니다. 후에 창세기 1:9에 보면 하나님께서 물을 한 곳으로 모으시고 뭍이 드러나게 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전부가 물이었는데 그 물을 한군데 모으시고 뭍을 물속에서 드러나게 함으로 비로소 뭍이라는 것이 생겨났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논리가 가능한 것이 이 지구상에 10분의 7이 바다입니다. 그러니까 땅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고 바다가 먼저 있고 그 위에 땅이 조금 솟아나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물이 뭍의 원천이란 개념이 됩니다.

창세기 2:6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 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물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에 생명을 공급하는 원천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직 땅위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을 때, 땅에서 물이 솟아나서 온 땅을 적시기 전에는 땅에 나무가 없고 풀 한 포기도 아직 돋아날 수 없었던 상태였습니다. 물이 땅의 생물에게 생명을 주는 기능은 기가 막힌 순환적 원리로 진행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셔서 초목을 자라게 한 그 비는 수증기로 증발됩니다. 증발된 수증기는 이 지구를 따뜻하게 유지해 줍니다. 그리고서는 다시 모여지면 비가 되어 내려와 땅을 적시고 다시 모이면 수증기로 증발됩니다. 이렇게 물은 순환하면서 생명을 유지시켜줍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물은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또 성서에서는 물이란 것에 더러움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물은 오히려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레위기 7장은 인간의 더러운 죄악을 씻어내는 기능을 물에게 주고 있습니다.

아론은 회막에 들어가서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 입었던 세마포 옷을 벗어 거기 두고 거룩한 곳에서 물로 몸을 씻고 자기 옷을 입고 나와서 자기의 번제와 백성의 번제를 드려 자기와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속죄제 희생의 기름을 단에 불사를 것이요.(레위기 16:23-25)

신약에서 물로 세례를 준다는 것도 바로 죄악을 깨끗이 씻어낸다는 것이고 이것은 물은 죄악보다도 더 깨끗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은 옛날에는 소독의 기능도 있었습니다. 레위기 15장에는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을 소독하는데 물을 썼습니다. 유출병 있는 자의 몸에 접촉하는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레위기15:7)

물은 또한 하나님의 은총을 표시했습니다.

대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이사야44:3)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이사야 55:1)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같을 것이라.(이사야 58:11)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생명력을 물에 비유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예레미야 2: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4:14)

요한계시록은 목마름의 고통이 없는 천국을 묘사하며 생명수 샘물이 흐르는 강으로 묘사했습니다. 또 내가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요한계시록 21:6)

하나님은 물을 이 처럼 존재의 근원으로, 생명의 원천으로, 죄악을 씻는 정결수로, 축복의 상징으로 그리고 완전한 천국의 요소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물이 쓰다거나 악취가 나는 것은 재앙이고 저주였습니다. 민수기에 부정한 여인을 저주하는데 이 물로서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인으로 그 저주가 되게 하는 쓴 물을 마시게 할지니 그 저주가 되게 하는 물이 그 속에 들어가서 쓰리라. 제사장이 먼저 그 여인의 손에서 의심의 소제물을 취하여 그 소제물을 여호와 앞에 흔들고 가지고 단으로 가서 그 소제물 중에서 기념으로 한 움큼을 취하여 단 위에 소화하고 그 후에 여인에게 그 물을 마시울지라. 그 물을 마시운 후에 만일 여인이 몸을 더럽혀서 그 남편에게 범죄하였으면 그 저주가 되게 하는 물이 그의 속에 들어가서 쓰게 되어 그 배가 부으며 그 넓적다리가 떨어지리니 그 여인이 그 백성 중에서 저줏거리가 될 것이니라. (민수기 5:24-27)

이 귀절은 당시에는 비록 부정한 여인에게 대한 징벌의 일환이지만 오늘 오염된 물로 상해를 입고 수태에 문제가 발생하는 그 위험을 시사하는 정도로 심각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쓴 물은 저주의 물이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마라에서 쓴 물을 먹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그 물은 달게 만들어서 먹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압제하고 있던 애굽을 저주할 때 물을 저주하라고 했습니다. 구약성서 출애굽기 7장 18절은 그 저주의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수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리니 애굽사람들이 그 물마시기를 싫어하리라 하라.

성서에서 물이 쓰다거나 오염이 된다거나 하는 것은 곧 저주를 의미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위에 달려서 “내가 목마르다”했을 때 그것은 곧 형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 말에서 일어설 수도 없고 앉을 수도 없는 고통을 가리킬 때 Tartalizing 이란 말을 쓰는데 이 말은 바로 저주받은 신이 형벌을 받는데 위에는 탐스런 과일가지가 드리워져 있고 아래에는 배꼽까지 물이 차있는데 배는 고프고 목은 타는 듯이 말라도 과일을 따먹으려면 그 과일나무가지는 손이 절대로 닿지 않는 정도까지 올라가 버리고 엎드려 물을 마시려면 그 물은 도저히 입이 닿지 않는데까지 내려가 버리는 그런 형벌을 가리킬 때 이를 Tartalos 라고 말합니다. 목이 타는 고통은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물이 잘못되면 그것은 곧 저주요 형벌이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성서는 그리스도가 생명수라고 말합니다. 이는 곧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네가 이 세상 물은, 마셔도 마셔도 목이 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런 뜻입니다.

스위스 제네바의 교육학자 장 자크 루쏘(Jean-Jacques Rousseau)는 말하기를 “신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선하고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악하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은 필연적으로 악하고 오염된 것일 수 밖에 없으므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인간이 선하게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하여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주창했습니다. 루쏘는 결코 신실한 신앙인이 아니었는데도 자연의 가치와 인간의 한계에 대해 잘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물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단순히 물을 깨끗케 하는 일로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가야만 이 문제는 해결이 됩니다. 왜냐하면 물을 깨끗케 하는 것은 가장 절실한 양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물을 환경문제로만 생각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문제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거두는 차원에서 우리는 우리의 물을 깨끗케 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박성원 목사, 1994. 1. 23. 부산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