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祈禱)

성 경 / 누가복음 18:1-8

리는 지금 사순절을 지내면서 개인과 사회와 겨레와 세계를 위하여 연속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즈음 우리 교회가 금요일마다 갖는 구역장 권찰회 때,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며 모범적인 기도는 어떤 기도이냐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의 주요 경건 중에 하나가 기도이기 때문에 오늘은 이 기도에 대해 묵상하려고 합니다.

기도란 무엇인가? 인간은 왜 기도를 해야 하는가?

M. 로슈발트 (Roschwald)라는 사람은 “기도할 수 있는 신(神)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A. 체호프는 말하기를 “비록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참으로 편안한 일이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불안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고 기도는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인간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기도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체호프의 말처럼 기도는 진실로 그 효과는 둘째 문제로 치고서라도 인간에게 무한한 안심을 주는 것입니다.

찬송가 482장에는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 그 때가 가장 즐겁다 / 이 세상 근심 걱정에 / 얽메인 나를 부르사 / 내 진정 소원 주앞에 / 낱낱이 바로 아뢰어 / 큰 불행 당해 슬플 때 / 나 위로 받게 하시네."

기도란 찬송가 482장이 노래하는 것처럼 이 세상 근심 걱정에 얽메인 내가 주님 앞에 내 사정을 낱낱이 아뢰어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서에는 수많은 기도의 예가 나옵니다. 감사의 기도도 있고 묵상의 기도도 있으며 찬양의 기도와 예배속에서 드리는 예배적 기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란 기본적으로 인간이 괴롭고 어려울 때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절박함, 그 절박함에서 우리가 매어 달려야 하는
기도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기도란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인간이 인간의 능력으로 풀 수 없는 문제를 만났을 때, 영어로 소위 No Way Out, 즉 인간의 힘으로 헤쳐나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달았을 때, 하나님께 그 길을 열어달라고 간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약 10년전의 일로 기억됩니다만 국내에서 “암”에 대해 최고의 권위를 가진 의과대학교수가 암에 걸렸습니다. 그는 환자가 암에 걸려왔을 때는 자기의 해박한 의학적인 지식으로 진단과 처방을 내려 왔습니다만 자기가 암에 걸렸을 때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 한 평생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인간의 힘으로 넘을 수 없는 벽들을 수없이 만납니다. 이처럼 인간의 힘으로 풀 수 없는 문제들이 나타날 때 인간은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닌데도 기도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왜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도 기도를 해야 합니까? 왜냐 하면 그가 기도하지 않고는 길을 뚫고 나갈 수 없는 실존적 상황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아직도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될 때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잘나고 하나님 앞에 교만해도 인간이 해쳐나갈 수 없는 경지에 이르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세상의 학식으로도 풀 수 없고, 세상의 권력으로도 풀 수 없으며 세상의 재력으로도 풀 수 없는 문제를 만났을 때 인간은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정말 울어도 못하고 눈물많이 흘려도 할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 힘써도 못하고 참아도 못하는 일을 만났을 때 인간은 기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도 앞에서는 아무리 논리정연한 인간의 논리도 허물어집니다. 아무리 완악하던 인간의 마음도 허물어집니다. 기도 앞에는 인간의 자만심도 깨어지고 기도 앞에는 어떤 의미에서 우주적(宇宙的) 이치(理致)도 유보됩니다. 기도는 인간의 힘과 지혜를 중화시키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만이 역사 하도록 제한되는 시간 속의 영원입니다. 기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인간의 자리로 돌아가는 가장 분명한 참회의 행동입니다.

독일 신학자 에밀 부르너(Emil Brunner)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이 기도할 때 두 손을 모으는 그 자세 자체가 의미가 있는 일인데, 두 손을 깍지 끼우고 기도를 하는 것은 “나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행동으로서의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흥미있는 관찰입니다만 성서에는 기도할 때 인간이 해야 하는 많은 형태의 자세가 나옵니다. 무릎을 꿇은 자세도 있고, 손을 들고 기도하는 자세도 있고, 땅에 엎드려 기도하는 자세도 있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하는 자세도 있습니다. 얼굴을 벽을 향하고 하는 자세도 있고, 통곡하며 기도하는 자세도 있고, 금식하며 기도하는 자세도 있고, 온 가족이 모여 함께 기도해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모든 자세들과 경우들은 바로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실존적 상황이 막다른 골목에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계상황속에서 절망해야 하는 우리 인간에게 참으로 은혜 스러운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기도라는 길을 열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기도는 인간의 힘으로 한계상황에 오게 되었을 때 드리는 것이므로 만약 기도가 없다면 인간은 거기서 멈추어 서야 (Stop)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길로는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도라는 것을 통해 한번 더 기회와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인간의 길이 끝나는 거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인간이 인간의 한계 안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입니다. 기도는 이제는 더 이상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최후에 인간이 한번 더 가능성을 두드려 볼 수 있는 길이 준비되어 있는 마지막 희망의 문입니다.

기도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은총인데, 하나님은 이 위에 또 하나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기도의 기회만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 기도가 응답되는 길을 미리 알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성서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정리하면, 어떤 마을에 힘없는 사람은 무시하는 아주 거만한 그런 재판관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가난하고 힘없는 과부가 아주 억울한 일을 당해서그 재판관에게 자기의 이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 재판관이 사람을 무시하기 때문에 과부의 부탁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매일같이 재판관에게 찾아가서 졸랐습니다. 내 한을 풀어달라고. 마침내 그 재판관이 귀찮아서라도 그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불의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라도 과감하게 끈질기게 찾아가서 구하는 사람의 소원을 귀찮아서라도 들어주는데, 어떻게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자기가 택하신 자들이 간구하는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하는 말은 “그렇게 부르짖는데 못들은채 하고 오래 버티시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이와 비슷한 논조로 기도를 가르치는 말씀이 또 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 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마태복음 7:7)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는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태복음 7:8)

이 말씀은 실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분이 가르쳐 주시는 기도의 방법입니다. “너희는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은 기도를 들어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시는 분의 반문입니다.

그러나 기도에 대한 이같은 가르침이 기도란 단순히 억지를 쓰는 것이라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깔려 있는데, 첫째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자비성이며, 둘째는 기도를 하는 자가 기도를 들어주실 분에 대해 가지는 신뢰입니다. 먼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외면할 수 없는 연민과 자비를 지니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123편에 보면 막다른 상황에 처한 한 인간이 하나님께 울음 섞인 소리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여호와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평안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심령에 넘치나이다."(시 123: 1-4)

이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는 것은 2절과 3절에 반복되는 “여호와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하는 부분입니다. 서구 교회는 기도할 때에 반드시 기도 뒤에 “퀴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 즉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하고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제가 금년 초에 새로운 예배관을 제시했을 때, 기도 뒤에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하는 문구를 넣었더니 어떤 분들이 이것은 카톨릭 적이다 라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카톨릭적이 아니라 기도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시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가 한탄과 원망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비와 긍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자비하시고 긍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기도의 신학적 의미는 기도를 들으시는 분에 대한 완전한 신뢰입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에서 7절의 말씀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기도는 믿음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결코 일반적이고 관념적인 신뢰를 말함이 아닙니다. 이 신뢰는 인간의 편, 다시말해 기도를 드리는 자의 편에서 볼 때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고 전적으로 그의 자비의 뜻에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모든 가능성을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검증 받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줄타기 곡예사가 50층 높이의 건물 사이에 줄을 달고 건너가는 묘기를 시민들에게 보였습니다. 시민들에게 묘기자가 물었습니다. 자기가 이 줄을 타면 떨어질 것 같으냐고. 시민들은 박수를 치면서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소리쳤습니다. 묘기자가 다시 말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내 등에 업혀서 이 줄을 타겠느냐고?.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등뒤에 탄 사람이 완전히 힘을 빼고 자기를 그 묘기자에게 내어 맡길 때 그 묘기자는 무사히 그 줄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얼마전 작고한 시인 김남주씨는 “시인의 무기는 대책 없는 순결함 ‧‧‧‧‧. ”이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자의 무기는 “대책 없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기도로 우리가 큰 불행 당해 슬플 때 주님께 낱낱이 고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기도의 용사가 되시기를 빕니다. 아멘.

<박성원 목사, 1994. 3. 6. 부산진교회, 사순절 세째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