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

성 경 / 시편 119 : 105-112

아마 세계에서 한국교회만큼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교회도 없고 신자도 없을 것입니다. 한국교회 교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두 가지를 한결같이 강조하는데 하나는 기도고 다른 하나는 말씀입니다. 말씀 위에 굳게 서고 말씀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실 우리 신앙인들은 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이란 것이 과연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이 ‘말씀’에 대해서 말씀하려고 합니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Written Word of God)입니다. 성서를 가리킵니다. 둘째는 성육하신 하나님의 말씀(Incarnated Word of God)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셋째는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Proclaimed Word of God)입니다. 곧 설교를 가리킵니다.

성서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Written Word of God)이라고 하는 이유는 문자 그대로 글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록되었다는 것은 곧 인간의 말로 기록되었다는 뜻입니다. 최초에 성서는 세 가지 인간의 말로 기록되었습니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말인 히브리어로, 신약성서는 로마제국이 쓰던 헬라어와 약간의 아람어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성서는 여러가지 인간의 말로 번역이 되었는데, 주후 1세기경 라틴말과 시리아어로 번역이 되는 것을 필두로 1900여년동안 꾸준히 번역되어 지금은 전세계에서 1000개가 넘는 여러가지 언어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말로 기록되어 있지만 성서는 한마디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를 어떻게 주장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서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등장하고 노아가 등장하고 아브라함이 등장하고 모세가 등장합니다. 뿐만 아니라 간음한 여인이 등장하고 삭개오와 같이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도 등장하며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도 등장합니다. 때로는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등장하지만 때로는 12년동안 혈루병을 앓은 민중중의 민중인 죄많은 여인도 등장합니다. 성서에는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한 가지 공통된 주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함께 자기의 고뇌를 나누며,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아 세상에서 살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한다는 사실입니다.

성서는 비록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것은 고문서나 사문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과 그들의 삶속에서 함께 머리를 맞대고 삶의 고뇌를 의논하고, 방황할 때 인도하고, 괴로울 때 위로하고, 외로울 때 사랑하고, 절망할 때 희망을 주고, 끝내는 아버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하는 진리와 영생에로의 긴 순례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준 대로 정말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우리의 고난이 막심하고 우리가 세상의 삶에 지쳐 쓰러질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소성케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위경중에 처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지켜주는 방패가 된다고 했습니다.

성서의 목적은 디모데후서 3:16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서는 우리 인생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최대한 온전케 살아가도록 인도하고 가르치는 등불이요 빛이라는 것은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을 줄로 압니다.

또한 우리는 이 성서와 관련하여 두 가지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성서는 교리보다 앞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성서를 성서자체가 말씀하게 하지 않고 자기교단의 교리에 비추어서 이해하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성서를 자기 개인의 신앙적 성격에만 맞추어서 이해하려고 하는 때가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서를 성서로 하여금 그대로 말씀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성경을 바르게 대하는 태도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서가 말하는 데도 자기의 경직된 신앙을 고치려고 하지 않는 경우를 봅니다. 성서로 하여금 자기에게 맞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성서에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인간의 언어의 기록되어 제한이 있는 것처럼, 성서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를 전부 포함하는 것은 아니란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제일 마지막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다 기록하고 나서 이렇게 끝말을 맺고 있습니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

이 말은 성서에는 예수의 이야기도 다 기록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물며 어떻게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 모두를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특히 중요한 것은 성서는 지금부터 2000년전까지의 역사만을 기록했는데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성서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또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로 등장하는 말씀이 성육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말씀” 하면 우리는 성경만을 생각하게 되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1:1에 보면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했는데 이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말씀이 육신의 형태로 우리 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한 말씀 즉, Incarnated Word of God 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에 굳게 서야 한다’,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한다’라는 것은 단순히 성서만이 아니라 더 원초적인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근거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있는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따라서 성서보다 먼저 계셨습니다. 성서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성서보다 더 큰 하나님의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서가 예수를 증거하는 책이기는 하지만, 예수의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요한복음 말미의 말씀에서도 보았습니다마는 성서는 예수의 이야기를 다 기록할 수도 없고, 특히 오늘날에도 성령으로 사시며 역사하시는 수 많은 이야기들은 더더욱 포함할 수 없습니다.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삶의 원칙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것을 성경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한정된 시각입니다. 예수가 성서를 정의하지 성서가 예수를 정의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보다 더 큰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성경에 쓰인 귀절을 문자대로 지켜서 산다는 말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근거하여 산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하여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한 가지 예를 들면 그 분이 죄인들과 세리들과 창녀들과 온갖 소외된 고난받는 자들과 함께 사시고, 우리에게 그들을 사랑하도록 위탁하셨기 때문에 주님이 부탁하신 이 작은 자들과 함께 사랑을 나누고 사는 것이 말씀대로 사는 한 형태일 것입니다. 그 분이 의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면 우리도 의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설교입니다. 설교는 오늘 현 싯점에서 선포되어 지기 때문에 이것을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설교가 있습니까?

성서는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2000년전에 사셨습니다. 모두가 과거의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과거에 역사한 하나님을 믿거나 2000년전에 유대땅에서 활동하시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오늘 나와 함께 나의 삶의 현장에서, 오늘의 역사현장에서 계시하시고,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고백하고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지금 여기에 현재화 되어야 합니다. 이 성서의 하나님, 2000년전에 유대땅에 오신 그리스도가 지금 여기 계셔서 역사하신다고 하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 바로 설교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현재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설교가 성서속의 하나님을 현재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설교란 성서와 오늘의 우리, 하나님과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와 오늘의 우리를 연결하는 다리에 해당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성찬때 나누어 주는 떡과 포도주속에 그리스도가 임재한다고 한 반면 종교개혁자들은 이 선포되는 설교 속에 그리스도가 현존한다고 했습니다. 설교는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의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 우리의 삶속에 증거하고 사시게 하는 것입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가장 중요한 의미는, 쓰여진 성서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과 2000년전에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삶을 사신 그리스도의 삶의 의미를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현장에 연결하는 의미에서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설교는 단순히 성서의 해설이 아닙니다. 설교는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오늘의 상황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전통을 충실히 따른 신학자 Karl Barth 는 설교자는 한 손에는 성서를 잡고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성서 속에서 신문을 읽고 신문 속에서 성서를 읽는 통찰을 설교자가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서를 오늘의 역사현장에 연결하는 작업이 바로 설교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에 보면 성직자중에 두 가지의 종류를 보는데 하나는 제사장이고 다른 하나는 예언자입니다. 제사장은 속죄제 화목제등을 드리면서 오늘 기독교에 비추어 볼 때 주로 성찬을 집례하는 사제의 역할을 하였다면, 예언자란 하나님의 뜻이 오늘의 우리의 정치 경제 문화 도덕의 삶속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느냐를 가르쳐주는 설교자의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예언자들의 예언을 보면 당시의 부패한 사회상, 국가권력의 불의함, 경제적 빈부, 도덕적 타락등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미가, 아모스, 호세아, 나훔, 하박국, 모든 예언자들은 어떻게 보면 신랄한 사회비판가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도록 선포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최대의 고민은 때때로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민을 가장 많이 한 구약의 설교자는 예레미야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망한다는 말을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따라 나가서 유다는 망할 것이니 정신차리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정부관리나 심지어 당시 삶에 크게 불편하지 않던 기득권을 가진 백성들은 길길이 뛰었습니다. 국가가 잘 될 것이다라는 축복은 못할 망정 저주를 하고 있다고 설교자를 배척하고, 정권은 그를 감옥에 가두고 고문을 했습니다. 며칠 뒤에 풀려난 예레미야는 만신창이가 되어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선포하라고 해서 말씀을 선포하니 왕과 모든 백성이 환영을 하기는 커녕 나를 잡아죽이려 하지 않습니까? 나를 왜 당신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로 뽑으셨습니까? 아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책임을 맡지 않았을터인데 하고 항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심한 고민 속에 잠이 들고 이튿날 아침에 깨보면 다시 심중에 불이 붙는 것 같아서 나가서 외치지 않고는 안되었습니다.

예수님 직전의 설교자는 세례요한입니다. 그는 메시야의 오심을 선포하였지만, 동시에 헤롯왕의 죄상을 지적했기 때문에 핍박을 받고 목이 잘려 순교했습니다. 그리스도 이후에 최대의 설교자 사도바울도 바로 이 고민을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10) 에서 그는 이렇게 고민합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저는 제네바에 있으면서 때때로 국가가 잘못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비판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외교관들이 나와 있었는데, 늘 듣기 싫어했습니다. 그분들도 우리 교회 교인들인데 그런 말을 해야 하는 것이 가슴아팠고, 어떤 때는 성경본문을 들고 편안한 말씀을 설교하기 위해 마음을 먹지만 설교를 완성하고 나면 결코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후서 1:20에 있는 것처럼, 성경은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예레미야처럼 괴로운 심정을 가지고 설교에 임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개인의 죄는 아무리 지적해도 문제가 되지 않으면서 정치적 죄를 지적하면 늘 문제가 되는데, 그러면 정치가 하나님의 말씀도 접근하지 못하는 신성불가침 영역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대통령도 죄인으로 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앞에 바로 서는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앞에 선다는 자세로 서야 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는 설교의 유창한 말솜씨나 말씀을 기가 막히게 설명해 나가는 설교자의 지혜를 들어서는 안됩니다. 설교속에 인용되는 지엽적인 예화나 지엽적인 주제에 매달려도 안됩니다. 그 설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의미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순종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설교를 듣고, 아 저말은 내 의견과 일치한다, 아 저말은 내 의견과는 다르다 하고 설교를 분석하는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경과 같습니다. 설교는 쓰지만 내 몸에 양약이 된다는 차원에서 들을 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제 정리하십시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바로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앞에 때로는 꾸짖음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질책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는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기 위해 말씀으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올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직하게 서고 바르게 서서, 우리 자신을 바르게 하고 이 사회를 바르게 하고 이 세상을 바르게 하는 일을 앞장서서 감당해 나가십시다. 아멘.

<박성원 목사, 1994. 1. 30. 부산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