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산경험과 그 이후

성경 : 누가복음 9:28-43

회가 지키는 달력을 교회력(敎會曆)이라고 하는데 이 교회력에 따르면 오늘은 예수님의 산상변모를 기념하여 지키는 주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변화산 이야기를 같이 묵상해 보고저 합니다.

몇년전에 스위스 루가노(Lugano)에서 한 영화제가 열렸습니다. 그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영화가 “달마는 왜 동쪽으로 갔는가?”라는 한국영화였습니다. 이 영화의 주제는 한 젊은이가 불교의 진리를 추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병든 어머니와 미군에게 몸을 팔아야지만 먹고 살아가는 누나를 가진 척박한 운명을 지닌 가정에서 태어난 한 젊은이가 이 고통이 많은 세상을 떠나 자신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고뇌(苦惱)에서 벗어나고자 입산(入山)하게 됩니다. 그는 아주 깊은 산골에 득도(得道)한 고승(高僧) 한 분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는 그 문하로 들어가서 수도(修道)에 임합니다. 젊은 불자는 그 고승 밑에서 온갖 엄격한 계율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도(道)에 이르기 위해서 수도를 합니다.

잡힐 듯 말듯 하는 경지에 이르렀을 때 불현듯 노승(老僧)이 돌아가십니다. 돌아가시면서 노승은 그 젊은 불자로 하여금 자기 몸을 불에 태우라고 유언을 하고, 이처럼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완전한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일러줍니다. 그 젊은 불자가 자기 스승의 시신을 태우면서 무(無)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그의 귀에는 저기 속세(俗世)의 비참한 아비규환의 소리들이 다시 들려오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젊은이는 인간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며 다시 산을 내려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세상의 고통을 피하는 길만이 아닌, 오히려 고통의 한 복판에서 그 현실과 마주하면서 이겨 나가는 구원의 길도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비록 불교의 이야기이지만 진정한 신앙의 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선 신앙의 길이라고 할 때 그 젊은 불자처럼 속세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하늘의 신비한 경험에 이르는 것을 연상합니다. 이 땅의 고통에서도 떠나고 모순에서도 떠나고 이 땅의 염려에서도 떠나고 그래서 오로지 높은 산에 올라가 하나님과의 신비한 어떤 경험을 하기를 추구합니다.

우리가 신앙에 접근하는 길이 두 가지가 있음을 이 이야기는 암시합니다. 하나는 현실의 고통을 떠나고 신비속에 들어가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의 한 복판에서 현실의 고통과 싸우는 가운데 얻어지는 신앙의 길입니다. 이 도식은 이 세상의 고통과 아픔에서 벗어나는 탈현세적인 신앙과 현실의 아픔속에서 오히려 진리를 체험하는 고통속에 존재하는 신앙, 세상일에는 관심없고 지극히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신비한 신앙과 구름잡는 것같은 신앙을 배제하고 구체적인 현실에 참여하는 신앙, 혹은 영광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과 고난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 등으로 항상 신앙을 이중적으로 분류하였습니다. 교회사에서 보면 이 두 가지의 신앙형태가 항상 한 쪽으로 치우쳤다가 또 다른 쪽으로 치우쳤다가 하는 진자운동이 계속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진자형태가 우리 한국교회에도 늘 있어 왔는데 특히 지난 70년대에 우리 한국교회에는 크게 두 가지 신앙행태가 뚜렷하게 대립적으로 나타났습니다. 한 가지는 기도원운동으로서 수많은 교인들이 산에 올라가 금식기도를 하면서 신비한 체험을 하고 방언을 하고 계시를 받고 하는 굉장히 영적인 신앙행태였습니다. 이 분들에게는 열정적인 신비신앙이 있는 반면에 사회의 불의나 구조적 모순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그런 특성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신비신앙이 있는 반면에 늘 그래왔지만 특히 70년대에는 군사독재정권때문에 생기는 많은 정치적 억압과 인권탄압에 맞서 소위 복음을 현실적으로 적용하고 증언하려는 참여적 신앙이 한편에서는 상당히 강조하는 교회와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신앙을 신비적으로 이해하느냐 현실적으로 이해하느냐 하는 두 가지의 길입니다. ‘신앙은 정치적 문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순전히 신비적이고 영적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은 구름잡는 허무맹랑한 것이 아닌 구체적인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다’ 해서 한 때 팽팽히 두 가지의 신앙이 대립적 구도를 가졌으며, 이러한 대립을 소위 보수 대 진보로 구도를 잡아 이원화하는 그런 논리도 한 때 상당히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구도는 당시 민주화와 군사독재에 항거한 적이 있는 분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문민정부를 출현시키면서 요즈음은 이런 논쟁이 옛날만큼 불꽃을 튀기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신앙은 신비인가? 현실인가?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이 변화산의 이야기는 이러한 우리의 혼란에 상당히 선명한 대답을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계실때 갑자기 그 모습이 변하고 옷이 눈부시게 빛나는 영광의 모습으로 변모(變貌)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또 보니까 예수님만이 그렇게 변모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더 영광스런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바로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두 분은 모두 하나님의 충실한 종들이었습니다.

이 순간에 그동안 졸고 있었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잠을 깹니다. 그리고서는 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기가 막혔습니다. 그 광경은 너무나도 신비하고 너무나도 휘황찬란했습니다. 예수님과 평소에 다닐 때는 늘 때묻은 누더기에다가 못먹어서 야윈 그런 영양실조의 얼굴을 하고 고기비린내가 나는 갈릴리바다를 다니시면서 누추한 곳에 자고 대하는 사람들도 늘 죄인들과 병자들이었는데, 지금 이 광경은 그런 광경과는 전혀 딴 판이었습니다. 누더기같은 옷과 못먹어서 누렇게 뜬 영양실조의 얼굴은 온데간데 없고 용모가 변하고 옷이 눈과 같이 희어져 찬란한 광채를 내는 그런 환상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데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모세와 엘리야 두 사람이 드디어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러는 순간에 베드로가 나서서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한 것을 보면 완전히 정신이 나간 모습으로 한 말인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볼 때 이 광경은 너무나도 환상적이었습니다. 정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던 생각을 하면 정말 이곳은 천국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얼른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어 여기에 있자고 제안을 한 것입니다. 어두운 현실, 고통과 어려움이 있는 그 현실에서 떠나서 이제 이 신비한 세계에서 그냥 머물자고 한 것입니다. 이 모습은 이 세상의 논리를 떠나서 하나님의 신비를 보는 신령한 신앙, 강력한 영적 체험을 하는 그런 신앙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신앙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신비이며 영적인 분이기 때문에 신비한 경지를 통하여서 그를 체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 신비의 형태가 꼭 산상변모와 같은 그런 경험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또 그렇게 경험할 수도 없겠지만, 오늘의 언어로 말하자면 깊은 신앙적 체험이 신앙에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지난 시대 속에서 신앙을 사회운동논리로 이해하는 풍조가 상당히 있어 왔습니다. 신앙을 데모의 논리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론 기독교진리속에 사회운동논리에 대한 아이디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이 곧 사회운동논리는 아닌 것입니다. 사회변혁에 기독교의 진리가 강력한 소명의 소리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명의 일부이지 전부는 아닌 것입니다. 이를테면 한 인간의 죽음같은 실존적 문제는 복음의 사회운동논리적 이해로만은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이 무미건조하지 않고, 상황적이지 않고, 참으로 깊으려면, 하나님에 대한 신비한 경험이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산 위로 데리고 가서 하늘의 신비를 보여주신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신앙이 이렇게 신비하고 영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선 변화산 위에서 벌어진 광경에서 이미 이런 측면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31절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영광중에 변화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 세 분이 함께 나누던 대화가 있습니다.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別世)하실 것을말씀할새"

이 아름다운 신비한 자리에서, 세상의 고통에서 완전히 떠난 이 영광스런 자리에서 세 분이 나누던 이야기의 내용은 바로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고난받고 죽임을 당하는 그런 현실의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는 고통에서 떠난 자리에서 고통중에 가장 큰 고통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내용의 의미는 영광중에, 신비한 경험중에 있어도 현실의 고통에서 떠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는 것 까지입니다. 부활한 이후는 전혀 달라집니다. 그러나 부활하기 전까지는 아직 현실의 고난은 우리가 완전히 떠날 수 없는 짐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34절의 광경입니다. “이 말을 할 즈음에”, 즉 베드로가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어”, 함께 여기에서 살자고 했을 때, 갑자기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고 그 순간 현실의 예수님을 제외한 모세와 엘리야 두 사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이 현실의 모든 고통을 잊어버린 변화산위에서 영원히 머물자는 베드로의 강력한 소원을 뒤로하고 구름속으로 사라졌으며, 주님은 현실로 돌아온 것입니다. 잠깐의 영광과 신비의 경험뒤에 엄연한 현실로 그들은 돌아온 것입니다.

37절에는 이튿날 산에서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이상(理想)중에 있다가 현실(現實) 돌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산에서 내려왔을 때 거기에는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군중속에서 악령에게 사로잡힌 어린아이를 둔 아버지의 처절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선생님, 제 아들을 좀 보아주십시요. 하나밖 없는 자식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정신병으로 잃어버릴 지경이 된 아버지의 고뇌가 아직 산아래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 이유때문에 예수님은 변화산위에서 초막을 짓고 머물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팔을 걷어 붙히고 그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그 아들을 온전하게 고쳐 그 아버지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그 영광의 변화산에서 내려오셔서 처절한 아픔이 있는 민중의 고난과 시련속에서 그들을 고치고, 격려하고, 위로하며, 구원하고, 그들을 위해 모든 기득권자와 맞서시는 예수님의 구슬땀을 볼 수 있고 거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지극히 영적이어야 하고 참으로 변화산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확인하는 정도로 신비한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우리의 신앙이 인간의 신앙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신앙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에 강력한 영성이 들어 있어야 힘이 들어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래야만 변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는 영속적인 신앙이 됩니다.

그러나 결코 신앙은 항상 영광에만, 항상 변화산위에서만, 이 세상의 모순과 고통을 외면하는 자리에 있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휘황찬란한 변화산의 경험을 하고서도 미련없이 다시 산 아래로 내려오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산 아래에 남아 있는 온갖 인간의 부조리와 고통과 맞서서 싸우면서 하나님의 진리와 구원을 위해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영광과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하고서도 현실의 고통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을 완전히 구원하는 그 날까지는 최소한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변화산에 머물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의 모든 죄악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죽음도 이기고 부활하는 그 날에는 주님과 함께 영원히 영광중에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축도를 할 때 이것은 세상속으로 나아가 복음을 증거하면서 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교인들은 세상을 향한다는 의미에서 뒤로 돌려세워놓고 축도를 합니다. 우리가 주일에 모여 예배하며 특별히 성서를 읽고 설교를 들으며 기도하는 이 모든 행위는 바로 우리의 세상의 삶속에서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받아들이는 변화산의 경험과 같습니다. 이것은 주일예배뿐 아니라 우리가 늘 성서를 읽고 묵상하며 나를 하나님의 도구로 써달라고 기도하는 일들이 여기에 해당함으로 이 지속적인 영적인 경험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세상과 유리된 그 황홀한 체험, 성경을 읽기만 하고 기도를 하기만 하고 아무런 행동으로 세상속에 구현되지 않는 것이면 그것은 초막 셋을 짓고 거기에서만 살자고 하는 베드로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에는 아무런 대꾸없이 산 아래 군중의 아비규환이 하늘로 치솟는 그 산 아래로 내려가셨다는 것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가장 바람직한 신앙의 삶은 이런 형식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여 변화산위의 그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하는 신앙이 되고 그 변화산체험 이후에는 다시 주님과 함께 산을 내려와 산 아래의 현실의 고난을 하나님의 복음으로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그런 신앙을 갖출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박성원 목사, 1994. 2. 13. 부산진교회, 산상변모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