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하시는 사랑(Pain-Love)

성 경 / 요한복음 3:16-17

늘부터 교회는 전 세계 교회가 지키는 사순절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사순절은 사실 “성회(聖會)수요일”, 혹은 “재의 수요일”이라고 불리우는 지난 수요일부터 시작되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성금요일까지의 40일간을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경건하게 지키는 교회절기입니다. 성탄절앞에 지키는 대강절이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리는 절기라면 이 사순절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예비하는 절기입니다.

교회가 사순절을 지키는 경건의 핵심적 의미는 바로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입니다.이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바로 이 사순절을 의미깊게 지키는 길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동안에 기회있는대로 그리스도의 희생의 의미를 생각하겠는데 오늘은 먼저 하나님의 사랑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하나님이 가진 가장 강력한 특성을 사랑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하면 곧 “사랑”, “사랑”하면 곧 “기독교의 하나님”을 연상시킬 정도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는 도저히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먼저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자체입니다. 요한1서 기자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1서 4:16) 했는데 이는 곧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자체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존재자체가 사랑이므로 세상을 향해 한결같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서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모든 구원행위는 바로 이 사랑의 동기에서 출발합니다. 창조역사와 구원역사 전체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 쏟으시는 정열은 모두가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가장 축약적 선언이 바로 오늘 읽은 요한복음 3:16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면 이 사랑의 속성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일반적인 사랑의 속성을 생각해 보십시다.

먼저 사랑은 기쁨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환희가 있게 마련입니다. 한 사람에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환희입니다. 애인이 생기면 그 시간부터 온 세상이 장미빛으로 변합니다. 사랑하게 되면 어제의 세상이 오늘은 전혀 다른 환희의 세상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과 환희로서의 사랑은 사랑하는 두 사람의 사랑이 변치 않을 때에 한합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중 한 쪽이 사랑의 배신을 할 때는 사랑은 더 이상 환희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 때부터 사랑은 미움으로 바뀌고 무서운 복수로 발전합니다. 우리는 종종 신문에서 치정살인사건을 보게되는데 이는 바로 사랑의 배신이 얼마나 무서운 미움으로 변할 수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무서운 미움으로 사랑이 변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아주 고귀한 희생적인 사랑으로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사랑의 배반을 당하고도 오히려 사랑했던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자신이 아픔을 짊어지는 그런 사랑도 우리는 드물게나마 우리 주변에서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 가지시는 사랑의 마음을 이처럼 여러가지 사랑의 모습에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어 에덴동산에 두셨을 때 그 때의 하나님의 사랑은 그야말로 환희였습니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시고 빛이 있으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습니다. 육지와 바다를 만드시고 좋아하셨고 채소와 열매맺는 나무를 만드시고 좋아하셨습니다. 모든 짐승들과 새들을 만드시고 좋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사람의 짝을 만드셨을 때 극치에 달합니다. 아담이 홀로 사는 것이 못내 아쉬우셔서 그를 돕는 배필을 만들어 짝지어주시고는 지극히 좋아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마지막은 하나님의 사랑의 환희를 이렇게 결론지어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여 함께 살게 한 그 동산을 “기쁨”(Delight)이란 뜻인 에덴이라 이름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안에 창조하신 모든 것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바로 그 마음이고 행동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줄 수 있다는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 기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으로서의 사랑은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내 사랑의 울타리안에 있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가 내 사랑의 울타리안에 있을 때는 사랑은 기쁨이지만 사랑하는 자가 내 사랑의 울타리를 떠날 때에는 사랑은 눈물이고 아픔이 됩니다.

인간은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사랑의 울타리를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3장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 사랑을 배반당하는 슬픈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그토록 기뻐하시는 사랑을 배반하고 하나님이 아닌 뱀으로 사랑의 대상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뱀이 유혹과 죄악을 상징한다면 인간은 사탄의 악을 사랑하려고 하나님의 선을 배반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동산위를 헤메고 다니시는 모습에서 아담이 거기 하나님의 사랑의 울타리안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뱀에게로 사랑을 바꾼 아담은 애틋한 하나님의 부름에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더 이상 기쁨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사랑은 무섭게 미움과 저주로 변해갔습니다. 하와를 유혹한 뱀과 유혹을 인도한 하와와 거기에 편승한 아담에게 무서운 저주를 내립니다. 뱀을 향하여서는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라.”하고 저주했고 여인을 향하여서는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하고 저주하고 아담에게는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하고 저주했습니다. 그야말로 사랑이 철저한 미움으로 변하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비록 미움과 저주로 변했다고 하지만 정말 미움과 저주가 아니라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역작용인 것을 봅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고 살인자 가인에게 그가 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미움은 정말 미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배반당한 사랑의 다른 모습일뿐이었습니다. 출애급기 20:5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투기하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아니고 결코 이 세상을 향한 그 사랑을 변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격정적인 감정은 성경 전편에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을 떠난 후에도 그들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당신이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쫓아내고서도 그들에 대한 사랑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품을 떠난 그날로부터 하나님의 기나긴 기다림이 시작됩니다. 마치 집을 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날마다 동네어귀를 서성이는 아버지같이 하나님은 한시도 에덴을 떠난 아담과 하와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무분별하리만큼 강력한 사랑은 당신이 친히 쫓아내고서도 뒤를 따라다니며 그들을 보호하고 독려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배반은 계속되었습니다. 홍수로 심판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인간이 죄악에 빠져 있을 때에 하나님의 저주는 극치에 달합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물로 모든 것을 심판하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애정이 모질게도 남아있었기에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짓게 하고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놓았습니다.

하나님은 물로 세상을 심판한 뒤에 모든 세계가 초토화되어 버렸을 때 말할 수 없이 허탄한 상태에 빠집니다. 하나님 스스로 혼란이 올 정도였기 때문에 당신은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배반한 세계를 향해 했어야 했습니다. 이 모든 모습들도 하나님은 세상을 향한 애정을 포기할 수 없는 마음을 지닌 분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의 압제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애급의 적지까지 들어가셔서 그들을 구출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배반한 자에게 베풀 수없는 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큰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은 가나안땅에 들어가자마자 이방신에게 절하고 또다시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자신을 구원한 하나님의 배반한 유다를 향해 예레미야선지자를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심정은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와 행음하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어 쫓고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 패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렘 3:8)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기를 간청하는 하나님의 절규는 또 계속됩니다. 예레미야 3:12에는 그토록 철저하게 배반만 당하고서도 또다시 이스라엘이 돌아오도록 예레미야를 가운데 세워 간청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안타깝게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랑을 배반하고 등진 인간을 향해 줄기차게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고 돌아오면 언제든지 용납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은 호세아를 통해 잘 그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당신의 뜻을 전달하시면서 노골적인 간청을 합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11:8-9)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사랑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인간의 사랑은 어느정도까지는 관용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자비로울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 은 끝까지 자비로우시고 영원히 변치 않는다고 하나님 스스로 말씀했습니다. 심판하시겠다고 몇번을 벼르셨지만 하나님의 존재자체인 사랑의 속성은 심판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의 속성이 두 가지가 나타나는데 하나는 정의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입니다. 정의는 심판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유보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두 가지 속성가운데서 고뇌하시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그러나 항상 정의로운 하나님이 자비로운 하나님에게 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승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예언자를 보내서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간청하던 하나님은 더 이상 방법이 없음을 아시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기로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카드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면서 박두진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이미 아기로 태어날 때에 십자가를 준비해서 보내셨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인간에게 마지막 호소로 자신을 자해하는 형식으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표현하실 때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다는 말씀으로 자신의 희생의 사랑을 정의했습니다. 이보다 더 이상의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는 마지막 사랑의 표현이 바로 이 땅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을 위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랑은 오로지 세상을 위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멸망하지 않고 영생하도록 마지막까지 자기의 모든 것으로 다 멸망을 막으신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말씀은 바로 이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 사랑을 우리는 고통하시는 사랑(Pain-Love)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기가 고통을 당하기로 작정한 그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미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미움이란 형태로 나타났다가는 자기희생의 형태로 승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에 끝까지 노여움을 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을 끝까지 외면할 수 없는 그 사랑이 하나님의 한계라면 한계입니다.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기 위하여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십자가에 올라가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는 십자가위에서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지 않으려고 절규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은 이 처절한 당신의 아들의 절규를 매정하게 외면하시며 그를 십자가위에서 희생시키셨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인간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이 멸망받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은 당신의 아들을 버리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이 십자가위에서 자기의 아들을 희생하여 우리에게 보이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눈물을 흘릴 줄 알고 탄복할 줄 아는 최소한의 인간의 예절이라고 생각됩니다. 기독교인이 배울 사랑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스스로 고통을 지시는 그 모습을 배우면서 타인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그런 윤리입니다.

요한복음 20:9 이하에는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한 농부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그 농부에게는 이 포도원은 너무나도 귀한 것이었습니다. 농부에게는 농사를 지을 자리가 있어야 했고 자기 힘으로는 농장 하나도 가질 수 없는 그런 형편이었는데 이 포도원이 그에게 선물처럼 주어졌습니다. 포도원주인은 단지 얼마의 소출만을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합의하고 포도원을 농부에게 기쁜 마음으로 임대하고 타국에 갔습니다. 얼마후에 주인이 타국에서 그 소출을 받으러 종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마음이 변해 있었습니다. 농부는 소출을 받으러 온 종에게 소출을 주기는커녕 때리고 능욕하고 아무것도 주지 않은 채 빈손으로 보냈습니다. 포도원주인은 여러번 종을 보냈으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주인의 아들을 친히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이 아들은 바로 포도원 상속자이니 이 아들을 죽여버리고 아예 포도원을 내 것으로 만들기를 작정하고 그 아들을 포도원밖으로 쫓아내어 죽여버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 세상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데 소출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기는커녕 소출을 받으러 온 종들을 때리고 마침내는 상속자인 예수 그리스도까지 죽인 죄를 이 세상이 짓지 않았습니까?

사순절에 우리 인간이 하나님앞에 보일 모습은 참회의 모습입니다. 최소한의 정을 가지고 감동할 줄 아는 모습이며 피리를 불 때 춤을 추고 애곡할 때 가슴을 칠 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에 참회할 죄는 하나님이 보내시는 마지막 사랑을 손길을 뿌리친 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사랑의 손길을 잡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 사랑안에 거하고 그의 평화와 위로를 받으시기를 간절히 권면합니다. 아멘.

<박성원 목사, 1994. 2. 20. 부산진교회, 사순절 첫째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