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생명을 향하여 - WCC 새 선교선언문 해설

                                            박성원 (영남신학대학교 교수, WCC 중앙위원)
 
세계교회협의회 선교와 전도위원회(WCC-CWME) 주최 WCC 부산총회 사전 선교대회(Pre-Assembly Mission Event)가 2012년 3월 22일부터 27일까지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렸다. “함께 생명을 향하여: 변화하는 에큐메니칼 지형속에서의 선교와 전도” (Together towards Life: Mission and Evangelism in Changing Landscapes)란 주제로 모인 이번 사전대회는 부산총회에서 논의되고 채택될 새 에큐메니칼 선교선언 초안을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근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서막이었던 1910년 에딘버러 선교대회를 계기로 창설된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선교과제를 성찰하기 위해 독자적 선교대회를 가져왔다. 이 독자적 선교대회는 IMC가 1961년 뉴델리총회시 WCC와 통합하여 세계 선교와 전도위원회(Commission on World Mission and Evangelism)로 말을 갈아탄 이후에도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2010년에 에딘버러 국제선교대회 100주년 행사가 있었고 2013년에 WCC 제10차 총회가 열리기 때문에 세계 선교와 전도 대회를 따로 가지려하지 않고 WCC 부산총회에서 선언할 수 있는 새 선교선언을 준비하는 대회를 가지기로 했다.
 
WCC는 1982년 “선교와 전도 - 에큐메니칼 선언”(Mission and Evangelism: An Ecumenical Affirmation)을 발표한 바 있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오늘날 세계와 세계교회에는 엄청난 지형변화가 일어났다.
 
오늘의 사회와 교회의 엄청난 변화속에서 이 시대를 새롭게 인식하고 이에 대한 교회의 새로운 선교적 도전과 부름이 무엇인지, 이 시대의 선교가 어떤 개념과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지 분별하기 위한 필요성이 거듭 제기되었다.
 
더욱이 2006년 포르코 알레그레에서 열린 제9차 총회에서는 선교에 대한 토론이 없었다. 따라서 부산에서 열리는제10차 총회에서는 선교가 주요의제로 다루어져야 한다. 이에 WCC 세계 선교와 전도협의회는 오늘의 상황을 분석하며 의견을 모으고 자료를 수집하여 초안 작업을 해 왔다. 이번 마날라 사전대회에서는 지난 5년여 동안 열한 번에 걸쳐 수정된 그 초안을 놓고 토론한 것이다.
 
새 에큐메니칼 선교선언은 교회가 새로운 선교 상황을 분별하고 모두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기 위해 오신 예수의 선교비전(요 10.10)을 성취하는데 헌신하고 생명의 수여자로서의 성령의 선교를 새롭게 인식하고 성령의 능력 속에 있는 교회를 생명을 주는 선교자로 재인식하는 한편 부산총회의 주제,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기도를 선교적으로 구체화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번 사전대회에는 WCC 회원교회와 유관 선교단체분 아니라 비회원교회 특히 로마 카톨릭 교회와 복음주의교회, 오순절 교회 대표들까지 참여하는 범 교회 대표들이 참여했다.
 
새 에큐메니칼 선교 선언 핵심 요약
 
새 에큐메니칼 선교 선언 초안은 서론을 포함하여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 함께 생명을 향하여: 주제 소개하기
2. 불의 숨결: 변혁적 영성
3. 세상의 소금: 변방으로부터의 선교
4. 생명의 물: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기
5. 변화의 바람: 움직이는 교회
6. 생명의 축제: 결론적 선언
 
서론격인 “함께 생명을 향하여: 주제 소개하기”에는 새 에큐메니칼 선교선언의 몇 가지 새로운 특징적 틀이 제시되고 있다.
 
첫 번째로 인식되는 새로운 틀은 삼위일체 하나님, 특히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역할을 선교에서 중점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가슴에서 시작된다. 생명의 수여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생명선교의 중심이시다. 성령안의 생명이 선교의 핵심요소라는 인식이 거듭 거듭 강조되고 있다.
 
두 번째의 인식되는 새로운 틀의 변화는 구원의 대상이 인간에게서 온 피조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인간과 피조물에게로 향하여(to all humanity and creation) 흐른다. 특히 구원은 인간만, 혹은 부분적 구원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닌, 온 피조물의 모든 구성원 그리고 우리 인간과 사회의 삶의 모든 영역(every part of creation and every aspect of our life and society)<4>에까지 미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세 번째의 인식의 변화는 선교의 새로운 에큐메니칼 지형변화에 대한 인식이다. 여기에서 새롭게 인식되고 있는 부분은 과거 선교의 대상으로 간주되는 변방이 선교의 핵심이 되는 점이다. 변방으로부터의 선교(mission from the margins)가 바로 그 개념이다. 과거의 선교가 복음의 담지자로부터 미 종족에게로,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의 의미가 있었으나 오늘의 세계상황은 거의 모든 지역에 교회가 존재하는 상황이며 선교에 참여하는 교회와 단체도 다양화되어 있다. 과거의 선교의 대상과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선교가 어떠해야 함을 가리키는 풍향계가 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또 주목할 새로운 인식은 오늘의 선교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의 상황 속에서의 선교이다. 무한성장을 통한 지구시장이 세계를 구원한다는 재신(mammon)을 믿도록 강요받는 오늘의 상황 속에서의 선교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지 심각하게 묻고 있다.
 
또 하나의 변화된 세계상황은 바로 다종교 다문화 사회이다. 새 선교선언은 ‘전도란 우리의 신앙을 확신을 가지고, 그렇지만 겸손한 태도로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8>이라고 분명히 함으로써 전도에 대한 의지와 소명을 확실히 하고 있다. 이 전도는 모든 세대가 해야 할 과제이고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데 꼭 필요한 방법으로 전도에 대한 헌신을 늘 새롭게 해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생명전도를 오늘의 다종교, 다문화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인지도 묻고 있다.
 
불의 숨결: 변혁적 영성
 
새 선교선언은 첫 번째 교회의 선교적 주체와 동력을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강한 임재의 상징인 불의 숨결(행 2:3)에서 찾는다. 전통적으로 선교는 복음의 콘텐츠 자체인 그리스도의 선교에 집중되어 있다가 1952년 빌링겐(Willingen)국제선교대회에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이 제기됨으로 하나님을 선교의 주체로 보는 선교신학이 발전했다. 최근에 와서는 선교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주시해 보려는 시도가 선교신학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새로운 시도이며 이번 마닐라 선언은 선교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집중적으로 재조명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로 선교의 주체를 확대하고 있는 점이 새로운 시도이다.
 
새 선교선언은 성령과 선교의 관계를 1) 성령의 선교, 2) 피조물의 구원의 선교, 3) 영적 은사와 분별력, 4) 변혁적 영성 이란 네 부분을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1) 성령의 선교: 성령은 하나님의 창조과정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의 탄생, 가난한 자와 눈먼 자와 갇힌 자를 위한 예수의 해방선교(툭 4:18), 십자가위의 죽음과 부활(롬 8:11), 선교에로의 부름(요 20:21-22), 초대교회의 형성(눅 24:49, 행 11:19-30)에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 이후에 예수의 지속적인 현존이자 예수의 선교를 성취할 대행자(agent)<18>로서 한 역할은 지대하다. 성령은 바람이 임의대로 불듯이 우주 속에 자유로이 움직이며(요 3:8) 생명의 원천, 진리의 영으로서 창조에서부터 종말까지 하나님의 창조, 구원, 섭리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다. 이 성령의 역사가 바로 하나님의 선교에서의 성령의 역할이다. 선교에 있어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사실상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Missio Trinity)이며 이 삼위일체 선교에 있어 성령의 독특한 역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알리는 기독교 증언에 동력을 제공하는 동시에 전 창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역동적인 개입을 천명하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와의 교제, 혹은 교통(Koinonia)의 독특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19>
 
2) 피조물의 구원 선교: 우리의 선교는 인간 영혼 구원에만 한정 된 것이 아니라 피조물 전체의 구원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교는 창조역사에서부터 시작한다. 창조는 하나님의 선교의 시작이다.<21> 성령의 구원사역은 인간뿐 아니라 온 피조물의 구속에도 미치고 있다.(롬 8:19-20) 새 선교선언은 과거의 선교학이 피조물도 하나님의 선교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Creation as an integral part of the Missio Dei)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자성하고, 지구는 버려지고 우리의 영혼만 구원받는 선교신학은 믿지 않겠다."<22>고 잘라 말하고 지구와 우리 영혼 모두가 성령의 은총으로 변화받는 선교를 말하고 있다.
 
3) 영적 은사와 분별력: 영에 대한 분별력은 중요한 성령의 은사이다. 초대교회에서도 그렇지만 오늘의 교회안에서도 선한 영, 악한 영들을 우리는 많이 경험한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만남은 물론 내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하지만 성령의 역사가 개인적이고 내적인 차원뿐 아니라 선교와 관계되는 관계, 삶, 그리고 창조세계의 모든 삶의 영역과 연관되어 있음을 영적으로 분별해야 한다. 새 선교선언은 “우리는 성령안에서 무엇이 참된 것인지 확언할 수 있고 무엇이 거짓되고 악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것”<31>이라고 하고 우리는 죽음의 세력과 생명의 파괴가 자행되는 곳에서 악한 영들을 분별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이처럼 선교에 있어 생명을 위한 영적 분별력을 발휘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4) 변혁적 영성: 성령은 죽음의 상황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선교영성은 변혁적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맘몬 제국과 정면으로 대치된다.”<33>라고 규정함으로 오늘의 제국이 하나님의 통치와는 정면으로 위배됨으로 이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 곧 변혁적 영성이며 이것이 오늘의 중요한 선교임을 촉구하고 있다. 따라서 경제와 생태정의는 신앙의 문제이며 선교는 하나님의 생명살림의 선교에의 참여이며 진정한 기독교 증언은 우리가 선교를 통해서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만이 아니라(not only in what we do in mission) 우리가 선교를 실천적 삶에서 어떻게 살아내는지(but how we live out our mission)<37>에 관한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새 선교선언은 여종의 비천함을 통해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일을 하시는 마리아찬가(눅 1:46-55)를 예로 들면서 이런 자기 비움의 영성(self-emptying spirituality)이 오늘의 경제세계화를 주도하고 있는 지구 제국주의의 구조적 폭력을 자행하는 세력과 그에 의한 피해자 모두에게 도전과 힘이 된다는 실천적 방안을 제시한다.
 
세상의 소금: 변방으로부터의 선교
 
새 선교선언은 이전의 기독교 선교가 “하나님은 계속 변방으로 밀려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41> 적절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변방으로 밀려난 사람들 속에서 선교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서 선교를 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갇힌 자를 자유케 하고 눈 먼자들을 보게 하며 짓밟힌 자들, 이방인들, 고아와 과부를 먹이시는 예수의 선교’(눅 4:18)에서 이런 선교를 분명하게 본다. 가난한 자들의 부르짖음과 더불어 오늘 인류의 개발주도의 문명에 의해 계속 변방으로 밀리는 피조세계의 신음소리에 응답하며 이 세상 모두에게 충만한 생명을 주는 것(요 10:10)이 곧 예수의 변방을 위한 정의의 선교이다. 변방으로부터의 선교는 생명을 부인하는 일체의 것들과 맞서며 변혁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껴안으시려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에 응답하는 선교이며 오늘의 상황에서 대량기근과 차별, 비인간화를 조장하고 계속 이렇게 되도록 하는 인간과 지구를 착취하고 파괴하는 문화와 구조에 대한 변혁도 곧 선교의 과제<42>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변방으로부터의 선교는 1) 왜 변방으로서의 선교인가? 란 문제를 제기하고 2) 투쟁과 저항으로서의 선교, 3) 치유와 온전함으로서의 선교, 4) 정의와 포용 추구의 선교를 성찰하고 있다.
 
1) 왜 변방으로서의 선교인가?: 변방에 사는 사람들이란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구조로부터 배제되어 있고 존엄한 삶, 충만하고 정의로운 삶으로부터 원천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이다.<43> 따라서 변방에 있는 사람들은 변방 사람들의 삶과 기득권층의 삶 양쪽 모두에서 무엇이 불의이며 어떤 요인들이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인지, 그 구조가 어떻게 변혁되어야 할 것인지를 잘 인지한다.<43> 소외를 당해 본 사람들은 무엇이 삶을 가능케 하는 것인지, 무엇이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지, 무엇이 공동체에 유익한 것인지, 무엇이 해가 되는지, 무엇이 복지의 삶에 유익한 것인지 무엇이 그렇지 못한 것인지를 잘 구별할 수 있다.<48> 그런데 종래의 선교는 이 변방의 사람들을 선교의 수혜자로 볼 뿐 무엇이 그들에게 기쁜 소식인지를 규명하는 주체자로 인식하지 못했다.<45> 서구선교는 복음을 전파하는 자의 입장에서 선교를 보았기 때문에 기독교복음을 서구문명과 동일시 내지는 서구문명을 전파하는 하수인으로 전락시키는 실수를 하였다.<45> 이제 복음은 변방과 함께 하신 예수의 선교를 따라 변방으로부터의 선교가 되어야 한다.<47>
 
2) 투쟁과 저항으로서의 선교: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정의와 평화 그리고 화해를 통하여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의 충만함을 주시기를 원하는 것이므로 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한다는 것은 착취하고 노예화하는 악을 분별하고 그 가면을 벗기는 동시에 억압과 폭력과 유린과 파괴의 문화와 그 문제의 뿌리와 대결하며 그것을 변혁시키는 것을 의미한다.<49> 따라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데는 피조물 모두를 위해 풍성한 생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세력에 대한 투쟁과 저항에 대한 헌신이 필요하고 때로는 기독교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지만 정의와 존엄, 생명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과 운동들과도 기꺼이 함께 일할 자세도 필요하다.<51>
 
3) 치유와 온전함으로서의 선교: 모든 사람들은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보장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세상에 사는 사람 중 다수가 그런 권리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56> 육체적, 정신적, 영적 치유는 예수의 선교에 중요한 부분이었다.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선교에는 목회적 돌봄과 더불어 의학적 치유를 포함한 총체적 치유가 포함된다. 하나님의 선교에는 치유와 삶의 모든 부분의 온전성이 포함된다.<52> 더 나아가 장애나 질병을 죄나 문제로 보고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예수의 치유사역에서 보듯이 치유는 질병의 고침뿐 아니라 전인격적 회복과 사회공동체로의 복귀까지를 포함한다.<55>
 
4) 정의와 포용의 선교: 하나님의 주권아래서는 배제보다는 포용이 선교의 목표다. 복음은 이방인, 성적 성향, 언어, 장애, 무능력과 같은 환경에 처한 사람들이나 에이즈 양성보균자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옳지 않음을 지적한다.<58> 교회는 세상 안에 존재하지만 세상에 속해서는 안된다.<61> 세상에 속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역행하는 세상적 가치를 받아들인다는 말인데 계약공동체에 주신 성서적 명령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마태 20:26)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 그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60> 세상과 달라야 한다는 점이다. 교회는 변방인들 모두의 참여가 보장되는 포용적 지체이며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교에 온전히 참여하는 것을 보장하는 공동체이다.<60>
 
생명의 물: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기
 
성경은 성전을 생명의 물이 흘러내리는 수원지로서의 이미지로 많이 그리고 있다.(겔 47:12) 교회는 이처럼 사랑으로 생명을 공급하는 수원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공동체를 양육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파괴하고 잔인한 처사를 조장하는 그런 종교적 이념과 강압적 주장으로 압도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어떻게 복음이 장애물이 아닌 기쁜 소식으로서 치유하고 회복하고 새롭게 하는 물처럼 흘러내리는 통로가 될 수 있는 길인지 탐구할 필요가 있다.<62)
 
생명의 물로서의 선교는 다음의 소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1) 전도를 위한 부름, 2) 진정한 전도, 3) 전도와 종교 간의 대화와 기독교 현존, 4) 전도, 예언, 선포, 5) 전도와 문화
 
1) 전도를 위한 부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모두를 위한 구원의 기쁜 소식’이라고 믿고 있고<63> 이 복음을 듣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고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의 경험으로 초대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전도에의 부름은 개인만 아니라 교회도 받고 있다. 전도는 우리의 신앙과 확신을 그들이 다른 종교적 전통에 속해 있든지 속해 있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이웃과 함께 나누고 그들을 제자도로 초대하는 것이다.<68>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 복음을 긴급하고도 지속적으로 나누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속이는 셈이 된다.<68> 그러나 이 전도가 양 훔치기식(proselytism) 전도가 되어서 안 된다. 강압에 의한 선교는 복음의 신뢰성을 상실하게 만든다. 그러나 강압적 개종에 대한 비난에는 어떤 경우 한 사회가 그 사회속의 변방에 대한 억압을 숨기기 위해 하는 경우도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67>
 
2) 진정한 전도: 진정한 전도는 말과 행동 모두를 통해 기쁜 소식을 나누는 것이다.<71> 언어로 하는 전도가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으면 진정한 전도가 못된다.<71> 전도는 교만한 전도, 사랑이 없는 전도, 정치적 목적으로 하는 전도 등 정당하지 않는 전도에 대한 회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72> 진정한 전도는 사회정의, 인권에 대한 성서적 명령의 선포, 모든 인간과 창조물에 대한 사랑, 불의한 정치 경제구조에 대한 정의의 선포들이며<74> 모든 형태의 폭력의 거부, 신앙의 자유의 천명, 모든 사람과 문화에 대한 존중, 거짓 증언에 대한 살핌과 이해를 위한 경청 등 생명을 보장하는 가치들을 따라야 한다.
 
3) 전도와 종교 간의 대화와 기독교 현존: 전도와 대화는 별개의 것이 아닌 상호 관계적 개념이다. 대화의 목적이 곧 전도는 아니다. 그러나 대화는 헌신을 위한 상호 만남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화 속에 나누는 것은 정당하다.<77> 대화는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도 중요하며 특정종교가 다수인 지역에서의 대화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로써 종교의 자유와 한 공동체 안에서 모두를 위한 공동선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78>
 
4) 전도, 예언, 선포: 복음은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지만 거짓과 불의와 억압을 조장하는 세력들에게는 부담되는 소식이다.<81> 복음은 해방적이고 변혁적이며 복음의 선포는 정의롭고 포용적 공동체를 만든다는 측면에서 문화의 변혁을 포함한다.<81> 예언적 복음 선포에는 때로 순교적 고통이 따를 때도 있다. 그러나 성경의 증언자들은 “예배가 우상 아닌 하나님을 향한 행동”(마태 4:10)인 것 같이 복음의 선포는 오늘날 권력과 부, 소비주의와 이런 형태의 생명을 부정하는 세력과 같은 우상을 거부하는 것이어야 한다.<83>
 
5) 전도와 문화: 복음이 특정 문화, 정치, 종교적 현실과 관련된 상황에 뿌리를 내리려면 전도는 문화와 중첩하기도 하고 상호작용을 하기도 하며 때로는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84> 복음의 효과적인 수용을 위해서는 사람들이나 그들의 문화, 상징의 삶의 세계에 대한 존중이 필수적이다.<84> 전도는 바벨탑과 같은 획일성의 시도가 아닌 오순절과 같은 개별성속에서 일치를 도모하고 공동체의 정체성이 손상되지 않고 존중되는 그런 식이 되어야 한다.<88> 서구 식민지화와 선교가 결부된 경우와 같이 경제적 권력이나 문화적 헤게모니의 의도를 가진 사람들의 전도는 복음의 왜곡을 초래하기도 하는데<85> 이 점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변화의 바람: 계속 움직이는 교회
 
오늘의 기독교 지형은 1세기 전 에딘버러 선교대회 당시의 상황과는 확연하게 변했다. 당시에는 금세기 안에 세계의 복음화가 실현되리라고 보았다. 오늘 기독교의 대다수가 당시 비복음화 지역에 있기 때문에 그 비전은 어느 정도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과거의 소위 기독교 국가는 오늘날 재복음화가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91> 또 달라진 상황은 경제세계화로 인해 생겨난 이민 상황이다. 이민자들은 현지에서 이민교회공동체(migrant churches)를 조직하게 된다. 이 공동체들이 현지 교회공동체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가 새로운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92> 또 달라진 상황은 강력한 오순절 성령운동 형태의 기독교의 등장이다. 이 성령운동은 활기를 잃어버린 서구교회에 비해 세계 곳곳에서 대규모 민중운동, 특히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선교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교회성장이 다른 교회 교인수를 감소시키면서 진행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교회간의 갈등이 나타난다.<93> 이 새로운 공동체와의 선교적 협력이 절실히 요청된다. 또 하나의 새로운 변화는 개인이나 구룹이 조직한 "의사 교회“(para-church) 선교단체의 선교활동이다. 이들의 ‘단기선교여행’식 선교는 무책임한 선교가 되기도 하고 현지교회와 협력 없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이 있어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오늘의 선교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는 이런 운동들이 성령이 이끌린 변화의 바람이 될 수 있도록 모으는 것이다.
 
변화의 바람은 다음과 같은 소주제를 다루고 있다: 1) 겸손과 존중 속에서의 선교, 2) 하나님은 교회를 움직여 선교하게 하신다. 3) 다양성 속에서의 공동증언, 4) 하나님은 교회에게 선교의 능력을 주신다.
 
1) 겸손과 존중 속에서의 선교: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 종이지 주인이 아니다. 선교적 교회는 자기 비움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96> 과거 선교운동이 승리주의의 희생물이 된 적이 있는데 21세기의 선교는 겸손과 공동증언으로 승리자나 정복자의 이미지를 극복해야 한다.<98> 이미 교회에 소속된 그리스도인들을 다른 교파교인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은 선교가 아니다.<99> 옛 고객을 지키면서 새 고객을 모집하는 식의 경쟁선교는 지양되어야 한다.<100>
 
2) 하나님은 교회를 움직여 선교하게 하신다. 교회와 선교는 그 기원과 목적 면에서 서로 분리할 수 없다.<102> 신학적으로 보거나 경험적으로 볼 때 역사속의 교회는 선교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다.<102> 하나님의 선교적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다. 불이 연소됨으로 존재하듯이 교회는 선교 때문에 존재한다. 교회의 선교적 본질은 교회와 선교에 헌신하는 “의사 교회”가 함께 긴밀히 협력해야 하는 근거가 된다. 교회는 선교단체들의 사역이 가능하도록 도와주고 선교단체는 교회의 확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구체화하는 교회의 역동적인 사도적 특성을 잊지 않아야 한다. 또 선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 일치 (요17:21)이며 이 일치는 교회의 일치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적 일치, 더 나아가 피조물 전체와의 우주적 일치까지를 열어야 한다.
 
3) 다양성 속에서의 공동증언: 기독교공동체는 다양성속에서 동반자성과 협력의 정신으로 서로 존중하면서 공동증언의 방법들을 찾고 실행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 공동증언은 심지어 교회가 분리되어 있을 동안에도 특별협력을 통해 행해야 한다.<110> 교회는 인종과 문화의 경계선을 넘어 하나님의 선교에 봉사하도록 부름 받고 있으며 다양성 속에서 공동증언의 구체적 표현의 하나로 다문화 사역과 선교를 창안해 나가야 한다. WCC는 최근 세계복음주의연맹(WEA)과 로잔위원회와 더불어 선교에 관한 공동관심사를 함께 나누고 “온 교회가 온 복음을 온 세계에 증거하는 일(The whole church should witness to the whole gospel in the whole world.)에 협력하고 있다.<114>
 
4) 하나님은 교회에게 선교의 능력을 주신다. 하나님은 성령안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구성원들에게 능력을 주시고 힘을 주시며 교회에 내재하신다.<116> 그래서 선교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강력한 내적 부름(compulse)이 되게 한다.(고전 9:16)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선포하는 바를 제대로 행하고 서로 일치한다면 이는 다른 공동체나 전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큰 모범이 될 것이다.<117>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회역사는 분열과 배제로 그리스도의 몸을 해치는 오점을 남겨왔다.<116>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간의 일치, 그 자체가 중요한 선교적 행위임을 인지하고 일치하여 선교하고 선교하며 일치하는 운동을 계속해야 한다.
 
생명의 축제: 결론적 선언
 
그리스도에 대한 공동증언으로서의 선교는 하나님의 나라의 축제에로의 초대이다.(눅 14:15) 교회의 선교는 잔치를 준비하고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초대하는 것”(눅 14:21)이다. 그 잔치는 하나님의 사랑과 풍성한 생명의 수원지에서 흘러나오는 창조와 결실을 축연하는 것이다.
 
◇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의 목적이 생명의 풍성함(요 10:10)이며 이것이 선교를 분별하는 기준임을 확신한다.
◇ 우리는 선교가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와 함께 시작하며 성령의 생동케 하시는 능력으로 계속해서 재창조함을 확신한다.
◇ 우리는 영성이 선교를 위한 동력의 근원이며 성령 안에서의 선교는 변혁적인 것임을 확신한다.
◇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선교는 전 창조세계를 새롭게 하는 것임을 확신한다.
◇ 우리는 오늘날 선교운동이 지구남반구, 동반구에서 일어남으로 다방향적이고 다양한 측면이 있음을 확신한다.
◇ 우리는 변방인들이 선교의 수행자들이며, 모두를 위한 생명의 풍성함을 강조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수행해야 함을 확신한다.
◇ 우리는 하나님의 경제는 모두를 위한 사랑과 정의의 가치에 근거하며 변혁적인 선교는 자유시장경제체제의 우상에 저항함을 확신한다.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시대와 모든 곳에 기쁜 소식이고 사랑과 겸손의 영으로 선포되어야 함을 확신한다.
◇ 우리는 생명을 위한 대화와 협력이 선교와 전도에 있어 필수적 요소임을 확신한다.
◇ 우리는 하나님이 교회가 선교하도록 움직이시고 능력을 부여하시는 분이심을 확신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람들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요 10:10)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노라!”(사65:17)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통치의 비전을 선언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온 창조세계를 생명의 축제로 초대하신다. 우리는 겸손과 소망가운데 하나님의 재창조와 화해의 선교에 헌신해야 한다.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마닐라 토론
 
A.
 
마닐라 토론은 참여적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각 부분마다 부차적 발제가 있은 후 약 6~8명으로 구성된 분임토론으로 이어졌다. 이 분임토론의 결과는 청취구룹에 보고되고 청취구룹이 이 모든 토론의 결과들을 취합해 종합보고를 했다. 청취구룹은 청취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네 부분으로 정리했다: 1) 공감, 2) 문제제기, 3) 평가, 4) 형식. 여기에는 청취구룹이 정리한 내용들을 생생히 이해하기 위해 그 내용을 거의 그대로 열거하는데 이를 통해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과연 이런 협의를 위한 국제신학협의회에서는 개인, 혹은 지역교회를 대표하는 참여자들의 시각에서 에큐메니칼 문서들은 어떻게 평가되고 판단되는지를 알 수 있고 둘째는 에큐메니칼 선교토론에 얼마나 복음주의적 비판들이 전개되는지 참고할 수 있다.
 
▷ 참석자 전체는 새 선교선언 중에 삼위일체적 선교론,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성과 세상의 삶과 희망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현존과 역사에 열린 선교론,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선교의 중심관심인 점, 과거 선교행태에 대한 자성적 비판, 선교를 교회의 본질로 본점 등을 전반적인 독특한 기여로 치하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제기했다.
▷ “우리”라는 주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우리는 누구인지? 특히 우리가 중심에서 결정권을 가진 구룹들을 지칭하지 않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 현재의 문서가 신앙, 회심, 세례, 개인적 제자도 등 개인적인 면에서 약하다고 보고 회심은 개인적 차원에서 먼저 일어난다는 점을 중시하며 개인적 차원에서의 변혁을 좀 더 강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개 교회가 어떻게 변혁적 선교의 수행자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지침이 약하다고 지적하고 선교의 대행자로서의 지역교회를 강조할 필요가 있음을 요청했다. “복음의 유일한 해석자는 그 복음을 믿는 교회”라는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 WCC가 진행해 온 폭력극복의 노력들을 화해와 평화를 위한 선교로 조명할 필요가 있다.
▷ 선교와 관련된 봉사(diakonia)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
▷ 자유시장 우상화와 마찬가지로 복음에 적대적이고 파괴적인 이념들, 예를 들면 국가공산주의, 파시즘, 종교적 근본주의 등도 지적해야 하며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탐욕과 부의 우상화임도 잊지 말도록 촉구했다.
▷ 1982년 이래로 분명하게 일어난 변화가 인터넷의 발전이다. 이것이 전도, 대화, 선교와 어떻게 연결될 것인지 그리고 중심주와 변방에 대한 우리의 사고, 혹은 만인사제설 등과 어떻게 관련 있는지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 여성의 관점을 더 포함할 필요가 있다. 특히 자기 비움이 성 문제와 어떻게 관련이 되는지 좀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선교에 있어서 어린이와 청년의 관점도 중요하다.
▷ 새 선교선언에는 순교자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으므로 선교와 관련된 순교에 대해 언급할 필요, 특히 우리 시대의 순교자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 영원성에 대한 선교적 언급이 전혀 없다는 지적도 제기되었다.
▷ 생명이 새 선교선언에 중심에 온 것은 좋으나 개념이 너무 공허하고 구체적이 아니며 추상적이다.
▷ 이 외에도 문서 길이, 반복, 흐름, 제목 등에 대한 다양한 지적도 있었다.
 
이와 같은 총론적인 지적과 제안이 있은 다음 각 부분에 대한 지적과 제안도 이어졌다.
 
불의 혀
 
▷ 성령론적 접근은 정교회의 기여였던 것 같다.
▷ 중심부와 변방의 구분이 필요하다.
▷ 성령에 대한 분별이 필요하다. 어떤 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어떤 것이 악령의 역사인지 구분하는지 그 기준점이 필요하다.
▷ 박해와 순교적 상황에서 신앙의 용기를 주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조명이 필요하다.
 
세상의 소금
 
▷ 변방을 선교의 주체로 보는 파라다임전환이 인상적이다.
▷ 그러나 변방이 왜 이렇게 선교의 중심이 되는지에 대한 신학적 근거가 문서에는 약하다.
▷ 변방, 중심, 변방화, 우리, 그들, 이런 편 가르기식 언어가 아닌가 생각되어 불편하다.
▷ 변방을 중심으로 이동하는 것이 목적인가? 아니면 중심부의 권력을 변방으로 해체 해산시키는 것이 관심인가?
▷ 변방을 너무 낭만화하고 객관화 하지는 않는지? 변방도 죄인일 수 있고 변방도 권력을 행사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 자기 비움의 영성에 대한 요구를 변방에 할 경우에 너무 요구가 큰 것은 아닌가?
▷ 누가 선교의 주체이고 누가 선교의 객체인가? 교회는 주체이고 변방은 객체인가?
▷ 치유의 선교는 예배의식과 더 깊이 연결할 필요가 있지 않는가?
 
생명의 물
 
▷ 선포와 봉사와 사회정의를 연결한 것이 좋다.
▷ 겸손에 대한 관점도 높이 살만 하다.
▷ 선교와 전도가 어떻게 서로 다른지 구분이 필요하다. (개신교는 선교를 포괄적인 개념으로, 전도는 개종을 겨냥한 개념으로 인식하는데 카톨릭은 반대로 전도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선교는 개종의 의미하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 상황화(contextualization)에 대한 작업이 좀 더 필요하다. 전도의 변혁적 차원에 대한 연구도 더 필요하다.
▷ 전도를 물건판매의 일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으며 회심에 대한 적절한 이해도 필요함이 제기되었다.
▷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기가 무슨 말인지 명료화 필요
▷ 종교간의 대화를 해야 할 상황이 다양한데 이 다양한 상황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 지 교회의 삶에 나타나는 코이노니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변화의 바람
 
▷ 기독교인 숫적 증가로 선교의 성공여부를 판단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선교로서의 환대가 점점 주요 주제로 등장하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 한편, 단기선교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언급하지 못하고 있다.
▷ 변화의 바람이 성령보다는 교회와 지형변화에 더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 지역문화와 상황 속에서 영성들의 다양성이 부정되고 있다.
▷ 자기비움의 영성은 여성이나 가난한 자를 약화시킬 수 있다.
▷ 신 수도원 운동, 새롭게 부상하는 교회, 신선한 표현 등 서구사회에서 새롭게 정의하는 교회에 대한 언급이 약하다. 따라서 이런 변화의 바람은 간과된 것이 아닌가?
▷ 다양한 영성, 성령의 다양한 차원 등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 이민교회현상은 모든 곳에서 발생하며 이민자들에 대한 환대, 이민정책, 강제이민문제 등 이민에 대한 전반적인 성찰이 필요하고 이민교회를 새로운 선교적 변화의 바람으로 인식하고 성경속의 이민자의 성공스토리와 오늘의 이민교회 이야기를 연결하여 이민공동체 속의 다문화 교회을 위한 가능성을 탐구하는 등 이민교회에 대한 전반적인 선교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 복음의 선포로서의 전도가 좀 덜 강조된 것 아닌가?
▷ 교회가 특별한 상황에 대해 응답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교회로 남을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가?
▷ 다문화 사역이 창조적 선교의 큰 기회이다. 이점을 심각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B.
 
마닐라 토론은 참여적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각 부분마다 부차적 발제가 있은 후 약 6~8명으로 구성된 분임토론으로 이어졌다. 이 분임토론의 결과는 청취구룹에 보고되고 청취구룹이 이 모든 토론의 결과들을 취합해 종합보고를 했다. 청취구룹은 청취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네 부분으로 정리했다: 1) 공감, 2) 문제제기, 3) 평가, 4) 형식.
 
청취구룹이 공감한 부분으로는 새 선교선언이 삼위일체적 접근을 하고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성과 세상의 삶과 희망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현존과 역사에 열린 선교론을 제시하고 있는 점,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선교의 중심관심인 점, 과거 선교행태에 대한 자성적 비판, 선교를 교회의 본질로 본점 등을 전반적인 독특한 기여로 치하했다.
 
성령론적 접근은 정교회의 기여인 것 같다. 변방으로부터의 선교가 상당히 인상적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선교와 봉사, 그리고 사회정의를 연결한 것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고 특히 겸손을 선교에 임하는 중요한 자세로 강조한 것에 대한 공감이 많았다. 이것은 아마 기독교선교가 다소 공격적이라는 모습을 극복하고 싶어 하는 바램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여전히 좀 더 명확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제제기들은 선교에 대해 통전적으로 이해하면서도, ‘우리-그들’ ‘중심-변방’ 등의 편 가르기 식 사고구조였고 여기에 대해 많은 참석자들이 불편함을 드러내었다. 그러면서도 ‘중심’과 ‘변방’의 구분점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했고 변방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약한 부분도 지적되었다.
 
관점의 문제가 계속 제기되었는데 여성의 관점, 청년의 관점, 어린이의 관점에서 보는 선교에 대한 성찰이 부재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겸손이 선교에 있어 중요한 자세로 언급되는데 동의하면서도 이 겸손이 더 겸손할 수 없는 사람들, 이를테면 지속적으로 소외되는 여성, 가난한 자, 변방에 소외된 자 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
 
성령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지 가이드라인이 필요하고 선교에 있어서 지역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 지역교회가 해야 할 선교적 지침이 무엇인지 제시하는 부분이 약하다는 비판이 많이 제기되었다. 또한 국가공산주의, 파시즘, 근본주의 등 복음과 대치되는 인간의 이념들에 대한 선교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점이 언급되고 특별히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인간의 탐욕(human greed)과 부의 우상화에 대한 성찰이 더 깊이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선교와 순교는 깊이 연결되어 있는 문제인데 순교자에 대한 선교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이 제시되었다. 생명에 대한 개념이 너무 추상적이고 모호하다는 지적도 있었고 영생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아쉬움도 표현되었다. 이런 일련의 지적들은 전통적 선교신학의 관점에서 보는 아쉬움이 토로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같은 주제에 관한 에큐메니칼적 시각도 공존한다. 이를테면 인간의 이념이나 순교에 대한 부분에서 인간의 탐욕과 부의 우상화에 대한 문제제기와 순교자와 관련하여 오늘 인권과 사회정의를 위해 일하다 희생된 오늘의 순교자에 대한 성찰의 필요 같은 에큐메니칼 관점도 동시에 강조되고 있다.
 
혹시 언급이 부족하거나 간과한 부분이 없는지를 살피는 평가부분에서는 선교와 관련된 이민교회의 중요성과 역할이 거듭 거듭 강조되었다. 이민교회는 새로운 교회지형변화의 상황 속에서 새로운 선교동력체가 될 수 있다. 이민교회현상은 모든 곳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이민자들에 대한 환대, 이민정책, 강제이민문제 등 이민에 대한 전반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성경속의 이민자의 성공스토리와 오늘의 이민교회 이야기를 연결하여 이민공동체 속의 다문화 교회을 위한 가능성을 탐구하는 등 이민교회에 대한 전반적인 선교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는 등 이민교회가 변화의 바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신 수도원 운동, 새롭게 부상하는 교회들(emerging churches), 신학과 신앙의 새로운 표현 등 서구교회에서 전통적 교회를 새롭게 인식하려는 움직임도 변화의 바람으로 인식할 필요가 잇지 않을까? 이는 선교적 차원에서 점점 쇠퇴해 가는 서구교회의 생존의 몸부림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인 성찰이 필요하다는 소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번 회의에서 개념에 대한 에큐메니칼 이해가 다양함이 또 한 번 노출되었다. 이를테면 아직도 선교와 전도에 대한 개념의 구분이 잘 안 되고 있었다. 이를테면 개신교회와 카톨릭은 선교와 전도에 대해 서로 반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개신교회는 선교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전도는 개인전도와 같은 개종을 뜻하는 개념으로 인식하는데 카톨릭교회는 반대로 전도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선교는 개종의 의미하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약간 의아했던 점은 선교과 종교간의 대화문제이다. 종교간의 대화, 특히 선교와 관련된 대화에 대해 한국에서 WCC총회에 대한 반대하는 교회들이 WCC를 다원주의로 몰아붙이는데 이번 토론에서는 과거에 비해 참석자중에 복음주의와 오순절 계통의 참석자들이 많았는데도 이 점이 전혀 문제로 제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종교간의 대화가 필요한 다양한 상황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이 제안되었다.
 
청취구룹 보고서를 통해 두 가지를 부가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과연 이런 협의를 위한 국제신학협의회에서는 개인, 혹은 지역교회를 대표하는 참여자들의 시각에서 에큐메니칼 문서들은 어떻게 평가되고 판단되는지를 알 수 있고 둘째는 에큐메니칼 선교토론에 얼마나 복음주의적 비판들이 전개되는지 참고할 수 있다.
 
평가
 
WCC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는 새로운 에큐메니칼 선교선언을 준비하면서 이것은 1982년 에큐메니칼 선교선언을 대체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새 선교선언은 오늘의 변화된 상황을 반영하고 이 시대의 선교적 과제가 무엇인지 찾고자 하는 노력이다.
 
기본적으로 새 선교선언은 1982년 선교선언과 기본적인 선교인식에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삼위일체론적 선교, 사회적 약자를 강력히 염두에 두는 선교, 종교간의 대화, 기술사회에 대한 대응, 심지어 이민교회에 대한 언급도 양쪽 문서에 모두 나온다.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그러나 차잇점도 분명히 있다.
 
비교를 위해 먼저 1982년 선교선언은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1982년 선교선언은 그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첫째 1982 에큐메니칼 선교선언은 통전적이고 포괄적인 선교개념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증언으로서의 선교와 이 세상의 사회적 경제적 구조에 의해 소외되고 착취당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와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가난한자와의 연대없는 전도는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없는 연대도 없다고 했다. 이것이 기독교선교의 양면성 신뢰기준(double credibility criterion)이 된다고까지 했다.
 
둘째 선교와 교회의 긴밀한 연관관계이다. 교회자체가 하나님의 선교의 기능이다. 교회의 선교가 사회정의운동과 깊이 관련이 있다 하더라도 교회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개인과 공동체의 회심을 촉구하는 선교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세포(cell)이다. 그러므로 이 땅위에 교회세우는 일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해외로 파송되는 선교사의 존재도 이 차원에서 분명히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해외파송선교는 자국 교회의 선교가 아닌 온 세계의 교회가 함께 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선교로 인식해야 한다.
 
셋째,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하는 선교 (mission in Christ's way)가 강조되고 있다. 교회가 어떤 선교방식을 택하든지 중립적인 방법이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이 복음을 나타내든지 배반하든지 하는 것이다. 교회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도 선교, 전도, 목회, 예배, 예언과 사회개발 등 어떤 면에서도 교회가 해야 할 일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하신 선교방법대로 선교해야 하는 것이다.
 
1982년 에큐메니칼 선교선언의 이러한 특징에 비추어 볼 때 새 선교선언은 언어에 있어 훨씬 덜 직설적 언어를 쓰고 있다. 1982년의 선교선언은 사실 아프리카 케냐의 에큐메니칼 지도자인 존 가투(John Gatu) 목사가 제기한 선교 모라토리움이 큰 논쟁점이 되었던 1975년 나이로비 총회의 분위기에 대한 응답적 성격이 짙다. 가난한 자와의 연대와 선교의 깊은 연관성에 대한 강조는 분명 1973년 오늘의 구원(Salvation Today)로 인식되는 인간해방과 사회선교를 선교의 중요한 축으로 보려는 방콕 선교선언과 1975년 나이로비 총회를 반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하는 선교, 해외선교의 유효성, 교회와 선교의 불가분리성은 오히려 선교 모라토리움에 대한 대응적 성격이 짙다고 볼 수 있다.
 
1982년 선교선언의 언어가 상당히 직설적인데 비해 이번의 새 에큐메니칼 선언은 언어가 상당히 포괄적이다. 그러면서도 몇 가지 중요한 선교신학의 진보 내지는 발전이 있다. 이번 새 에큐메니칼 선교선언의 특징은 네 가지의 파라다임 변화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서 삼위일체하나님의 선교(missio trinity)로의 파라다임 변화이다. 선교에 있어 성령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고 하나님의 선교가 삼위일체의 선교로 확대되고 있다. 선교에 있어 성령의 역할은 전통적으로 ‘선교를 하게 하시는 역할’로 인식되고 있는데 이번 선교선언에서는 성령이 창조주 하나님, 구속주 그리스도와 함께 직접 선교하시는 삼위일체적 선교론이 부각되고 있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를 강조하는 동방정교회의 신학과 신앙생활과 복음증거에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오순절 교회의 신학의 영향이 많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둘째, 구원선교에서 생명선교(Life-giving mission)로의 전환이다. 새 에큐메니칼 선교선언에는 생명선교가 강조되고 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요 10:10)이라고 직접 선교의 목적을 밝히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생명선교를 강조하게 되었다. 생명선교의 강조는 오늘날 극도로 물질문명화되는 인류문명의 영적공백(spiritual vacuum)의 현실과 기후변화, 생태위기 등 생명파괴의 현실에서 모두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시러 오신 예수님의 생명선교를 재천명하는 의미가 있다.
 
셋째, 영혼구원, 인간해방의 선교에서 온 피조물의 구원으로 선교가 확대되고 있다. 새 선교선언에는 온 피조물의 구원이 강조되고 있다. 기독교의 구원은 전통적으로 인간의 영혼구원에 초점이 맟추어져 있었고 에큐메니칼 운동에서는 영혼구원과 더불어 사회구원이 부가되었다. 그러나 오늘의 심각한 생태위기에 직면하면서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기다리는 온 피조물의 탄식’(롬 8:18-22)을 심각한 선교적 과제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구원이 온 피조물의 구원까지를 포괄하는 것으로 선교의 영역을 넓게 인식한 것이다.
 
넷째, 중심부중심의 선교에서 변방자중심의 선교로 축이 이동되고 있다. 과거에는 선교의 중심이 복음을 전파하는 자였고 변방에 있는 사람들은 복음을 수용하는 입장에 있었다. 새 선교선언에는 복음을 받는 자 입장에서의 선교가 강조되었다. 전통적으로 복음은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입장’에서 이해해 왔다. 그러나 복음은 그 소식을 받는 자에게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한다. 성경의 복음은 늘 복음을 받는 자에게 기쁜 소식이었다. 복음이 필요한 쪽이 복음이 어떻게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새로운 선교신학의 성찰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위의 내용적 특징 이외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새로운 에큐메니칼 지형이 반영된 포괄적 에큐메니칼 선교이해의 변화이다. 이번 새 선교선언 작성에는 오순절교회, 복음주의 교회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다. 북미,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등지에서 온 많은 오순절교회, 복음주의 교회 참여자들이 적극 의견을 개진했고 많은 기여를 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로잔대회’ 대표가 인사말에서 '복음은 복음 전체(the whole Gospel)를 삶의 모든 면(the whole life)에 선포하는 것'이라고 강조함으로써 전통적인 에큐메니칼 선교관과 차이가 없는 선교적 입장을 공표한 점이다. 이는 방콕 에큐메니칼 선교선언에 대응해 1974년 결성된 로잔구룹이 로잔언약을 밝표함으로 에큐메니칼 선교신학과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관점이 상당히 벌어졌다. 그러나 로잔언약은 1989년 마닐라 선언에서 사회참여를 중요한 교회의 선교과제로 인식하고 WCC는 1982년에서 교회의 전통적 선교임무를 강조함으로 다시 그 사이가 가까워지기 시작했으며 이는 2011년 세계복음주의연맹(WEA) 세계교회협의회(WCC) 그리고 로마카톨릭교회 종교간의 대화추진위원회(PCID)가 5년의 연구와 협의를 거쳐 2011년에 발표한 다종교사회에서의 기독교 증언이란 ‘개종선교에 대한 합의 가이드라인’을 채택함으로써 세계의 교회가 이제 거의 포괄적 시각으로 선교를 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제언
 
새 선교선언은 에큐메니칼 선교신학 여정에 의미 있는 방점을 찍을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 면에서 보완할 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 시대의 징조에 대한 더욱 심층적 분석이 필요하다. 물론 새 선교선언 서두에는 약간의 시대에 대한 진단이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오늘의 시대는 총체적 위기의 시대이다. 최근의 경제위기는 도미노현상처럼 전 세계를 총체적 경제위기 쓰나미로 강타하고 있고 기후변화 등 생태위기는 회복이 어려운 상황까지 치닫고 있다. 지금 세계에는 2020년에 대한 종말론적 위기의식이 가득차 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제기를 종교가 아닌 사회가 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의미에서 부산에서 10차 총회가 열리는 2013년부터 11차 총회가 열릴 2020년까지는 인류문명의 차원에서, 특히 생태차원에서 카이로스적 시기가 될 것이다. 이 총체적 위기 속에서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선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성찰하려면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인지 시대의 징조를 좀 더 세밀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둘째, 지금 세계는 정보기술의 시대(Information Technology)에서 융합기술의 시대(Convergence Technology)로 넘어가고 있다. 과거와 확연히 다른 오늘의 상황은 인터넷문화라고 새 에큐메니칼 선교선언 초안도 언급되어 있지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단순한 인터넷문화의 시대만이 아니다. 앞으로는 기술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계몽주의 때까지는 하나님이 삶의 기획자였다면 계몽주의 때부터 오늘날까지는 하나님을 제쳐두고 인간이 삶의 기획하려고 해 왔다. 그런데 앞으로는 인간도 뒤로 물러가고 기술이 삶의 기획자로 등장할 시대를 우리는 예견하고 있다. 이런 기술문명이 삶을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주도하는 시대에 선교의 의미는 무엇인지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셋째. 새 선교선언도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의 새로운 선교적 과제와 도전에 대한 성찰을 한다고 했는데 지금 변화하는 세계는 단순히 교회지형변화, 세계인구와 문화적 이동, 다문화사회, 다종교사회만의 차원이 아니다. 오늘은 가치관 자체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는 시대이다. 이런 후기산업시대, 융합기술의 시대, 맘몬 숭배의 시대, 가치관완전실종의 시대에 하나님의 의미는 무엇이며 인간은 무엇이며 삶은 무엇이며 영성은 무엇인지 새로운 신학적 규명이 필요하고 그 신학이 오늘의 문화에 어떤 상관성(relevancy)을 가지는 것인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넷째, 서구교회의 선교 난제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살펴야 한다. 새 에큐메니칼 선교선언이 과거 서구에서 남반구와 동반구로 가는 선교를 넘어서서 선교는 어느 곳에서, 어떤 시대에든지 이루어 나가야 할 교회의 과제라고 포괄적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은 과거 선교에 주력하던 서구교회는 미래에 신앙과 교회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염려할 만큼 극심한 신앙과 교회쇠퇴 현상 속에 있다. 모른 척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토론에서 서구교회가 새롭게 교회를 인식하려는 변화에 주목하라는 요청도 있었지만 이제 세계교회가 함께 서구교회의 선교에 대한 집중적 고민을 함께 나누어야 할 필요가 있다. 서구교회는 겸손한 자세로, 남반구와 동반구 교회는 함께 짐을 나누어지는 심정으로 서구교회의 선교에 열정을 같이 투여해야 한다.
 
갈무리하는 말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에서는 역사적으로 두 번의 큰 전환점이 있었다. 1952년 빌링겐 세계선교대회에서 하나님을 선교의 주체로 이해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이 등장했을 때와 1973년 WCC-선교와 전도대회에서 인간의 사회적 구원개념을 강조함으로 선교의 지평을 영혼구원에서 사회구원까지로 넓혔던 ‘오늘의 구원’(Salvation Today)개념이 등장했던 때였다.
 
이번 부산총회에서 선언될 21세기 새로운 선교선언은 세 번째 전환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하나님의 선교를 인간중심적인데서 하나님의 온 피조물의 구원(salvation of the whole creation)으로 확대하는 통전적 생명선교로 지평을 넓히는 차원과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미래를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포함한다는 차원에서 ‘내일의 구원’(Salvation Tomorrow)의 신학이 아닐까 성찰한다.
 
 
※ 일러두기: <>안의 숫자는 초안의 번호를 표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