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일강에 띄운 미래

성 경 / 출애굽기 2:1-10
 
어린이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셨던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의 예찬’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마른 잔디에 새풀이 나고, 나뭇가지에 새움이 돋는다고 제일 먼저 기뻐 날뛰는 이도 어린이다. 봄이 왔다고 종달새와 함께 노래하는 이도 어린이고, 꽃이 피었다고 나비와 함께 춤을 추는이도 어린이다. 별을 보고 좋아하고, 바다를 사랑하고, 큰 자연의 모든 것을 골고루 좋아하고, 진정으로 친애하는 이가 어린이요, 태양과 함께 춤추며 사는 이가 어린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기쁨이요, 모든 것이 사랑이요, 또 모든 것이 친한 동무다. 자비와 평등과 박애와 환희와 행복과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만 한없이 많이 가지고 사는 이가 어린이다. 어린이의 살림, 그것 그대로가 하늘의 뜰이다. 우리에게 주는 하늘의 계시다.


오늘 방정환 선생이 노래하는 것처럼 우리의 어린이는 우리의 모든것 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우리의 어린이는 어떻게 자라고 있습니까?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은 우리의 어린이들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아름다움을 보며 제일 먼저 기뻐하는 그런 여유를 우리의 어린이들이 가지고 있습니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 별과 달을 노래할 여유는 있습니까?
 
오늘의 우리 어린이는 어른 보다 더한 무한 경쟁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며, 어린이의 단순성과 순수함은 옛적의 유물로 여겨질 만큼 많이 왜곡되었습니다. 그런 어린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앞으로의 역사를 누구와 의논해야할지 그리고 우리의 불안한 미래를 누구의 손에 넘겨주어야 할지 자뭇 망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앞으로의 우리의 역사에 대해 어떠한 대안을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이러한 답답한 질문에 대해 분명한 해답을 지닌 사람들과 방법중의 하나가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모세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가 지닌 유년의 기억 속에 으로 드라마틱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각인된 이 이야기는 단순히 아름다운 이야기로서가 아니라 참으로 중요한 역사이해와 실천 방법을 보여주는 생생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무엇이 그토록 어린이를 소중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다.
 
이집트로 내려간 야곱 집안 사람들은 요셉 덕분에 고센이라는 땅을 얻어 거기서 아주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왕조가 바뀌고 요셉을 인정하지 않는 새 왕조가 일어나면서부터 상황이 급박하게 바뀌고 있었습니다. 새 왕조는 우선 야곱 후손의 인구가 많이 불어난 것이 몹시 두려웠으며,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이 불어날 것이라던 하느님의 약속(창15:5)이 성취되고 있었습니다. 새 왕조는 정책적으로 히브리인들의 인구 증가를 억제시키기로 하고 두 번에 걸친 단계적 조치를 하기에 이릅니다.
 
첫 단계는 히브리인들을 강제노동에 징용하여, 국토건설도 하고 인구증가도 막아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히브리인들을 이집트 나라의 곡식 저장 창고가 들어설 비돔과 라암셋이라고 하는 두 도시를 건축하는 일에 강제로 동원하였습니다. 이 공사에서 수많은 히브리인들이 숨져갔습니다. 그러나 강제노역으로 인구수를 줄인다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강제노역에서 히브리인들을 아무리 희생시켜도 히브리인들은 그들의 미래가 되는 아이들을 계속해서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온 조치가 두번째 조치였는데,이번에는 인구를 강제노역으로 인구를 감소시키는 위로부터의 억제정책을 쓰지 않고 아예 태어나는 아기를 죽여서 인구증가의 밑둥치를 잘라버리는 아래로 부터의 인구증가억제책을 썼습니다. 이 두 번째 단계의 조치는 선별 산아제한이었습니다. 이집트 왕은 히브리 산파들을 시켜 히브리 여인이 해산하는 것을 돕다가 아들이거든 죽여버리고 딸이거든 살리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왕의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산파들이 왕의 명령을 듣는 척하면서도 교묘한 방법으로 왕에게 협조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종족의 멸절, 따라서 미래의 단절이라는 급박한 역사의 벽을 뚫고 나가는 히브리인들의 지혜와 용기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본문의 이야기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레위집안에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간난 아이를 살려 보려고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면서 석달동안을 숨겨서 키웠습니다. 다시 말해 아이가 외부로 노출될 때까지 아기를 숨겨 키웠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의 이러한 노력도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왕골상자를 구해다가 거기에 역청과 송진을 발라 물이 스며들지 않게 하고 그 속에 아기를 뉘어 나일 강가 갈대숲 속에 띄워보냈습니다. 이렇게 사내 아이의 어머니와 그 누이는 그들이 지닌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미래를 위해 그 희망을 남겨 두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기를 이집트 공주 일행이 자주 목욕하러 나오는 강가 한 지점을 골라 거기에 아기가 든 상자를 놓을 만큼 슬기롭고 치밀하게 계획했습니다. 생각했던 대로 공주가 시녀들과 함께 강으로 목욕하러 왔다가 그 상자를 발견합니다. 영리한 공주는 거기에 뉘인 아기가 히브리인이 버린 아기인 것을 알고 히브리 여인 가운데서 유모를 찾아 키우기로 마음먹고 이런 기회를 노린 것이 바로 멀찌감치 서서 일의 진행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피던 그 아기의 슬기로운 누이였습니다. 아기의 누이는 이집트 공주에게 유모를 구해 주게 되는데 그 유모가 바로 아기의 어머니였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까?
 
그것은 히브리민족의 투철한 민족의식과 역사의 진행 속에서 그들이 보았던 거시적인 시각입니다. 다시 이야기를 되돌려 살펴보면 이집트 왕의 명령을 받은 산파에게서 시작합니다. 산파들은 추상같은 이집트 왕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했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역사의식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아기를 살려주게 된 동기가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 것은 무서워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이집트 왕의 명령보다 더 존중했다는 의미입니다. 서슬퍼런 왕의 명령 앞에서도 그 명령에 따르지 않고 소위 천명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여인들의 고고한 역사의식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역사의식은 모세의 어머니와 누이에게로 이어집니다. 모세의 어머니와 그의 누이가 보여준 인간의 연민이나 순수한 애정은 그 시절 자신의 아이를 자신의 손으로 버려야 했던 다른 부모들의 ‘한’에 비해 무엇인가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면 이들도 왕의 명령에 정면으로 맞서서 감히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일, 아기를 숨겨서 그 생명을 지속시키는 비밀역사를 주도했기 때문입니다.
 
이 보잘것없는 네 여인들의 역사의식은 나중에 장대한 민족해방의 역사인 출애굽의 역사로 이어지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된 것입니다. 이 역사의 진행을 보면 끊어질 듯 이어지는 역사의 진행을 우리는 봅니다.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 산파들의 모험을 거쳐 아기는 생명을 건집니다. 아기는 3개월 동안 온갖 위험 속에서 숨긴채 키워집니다. 그러나 이제 이 히브리민족의 미래의 운명을 짊어질 아기의 운명은 그나마 지금까지의 어머니의 품을 떠나서 완전한 위험으로 노출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누이가 아기를 살려낼 온갖 궁리 끝에 갈대상자를 만들고 나일강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는 이 지혜는, 결코 아기를 더 키울 수 없기 때문에 마지막 수단을 다 해 보는 것이 아니라 기필코 아기의 생명을 지키겠다는 치밀한 계획과 강력한 신앙 그리고 소망 속에서 진행된 작업이었습니다.
 
그들이 당하고 있는 폭압의 그늘과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강제노역 그리고 불평등의 구조는 이제 그들 스스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입니다. 그럼에도 이 두 여인은 그 상황에 좌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그 신실하신 약속이 지금도 살아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신앙은 그 상황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지혜와 믿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거대한 약속의 성취계획은 다 알지 못하더라도 인간이 행해야 할 최소한의 책임, 즉 하나님이 그 그루터기를 통해서 미래를 이어갈 희망의 싹을 남겨두는 일을 그들이 할 사명으로 깨달은 그 역사의식을 우리는 부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히브리여인들이 벌인 역사를 이어가는 지혜 앞에서 오늘 우리의 교육현실을 내다보면서 서글픔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역사철학과 교육철학이 서있지 않고 술취한 사람보다도 더 비틀거리는 교육정책, 고등학생이 일어서면 정권은 끝장이라는 두려움 앞에 학생들을 입시지옥으로 몰고, 보충수업으로 학교안에 밤이 맞도록 가두어 둔 역대정권들의 정권안보정책, 친구 마져도 견제상대로 삼아 철저히 자기의 학습을 비밀로 해 가도록 만드는 비인도주의적 교육현실, 교육자로 하여금 인격교육보다는 업적교육을 하도록 모든 교육의 자율성을 빼앗는 현실, 학생들의 교육마저도 치부의 대상으로 삼는 교육사업가들의 횡포, 이 모든 현실들이 오늘 우리의 민족적 치욕을 느끼게 하는 현실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노래했던 것처럼 아이는 미래의 회귀(回歸)이며, 아이는 태(胎)이며 바다입니다. 어린이는 무한 가능성이며 어린이는 역사의 찬란한 해방의 역사를 이룰 연결고리입니다.
 
그러나 오늘 어린이를 향한 우리의 현실은 그 어떤 것도 이런 철학이 담겨진 배려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오늘의 이 현실 속에 사는 한국 크리스챤은 여기에서 세 가지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 왕명을 거역하면서까지 아기의 생명을 살려낸 히브리산파들처럼 긴 역사의 진행을 보고 오늘의 무서운 왕명 앞에서도 천명, 즉 하나님의 명령을 알아내고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참교육을 하겠다고 발버둥치던 교사들을 좌익이라고 몰아치지 말고 그들의 비판과 아픔의 소리를 오히려 귀담아 듣는 역사의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정권은 잠깐이고 역사는 영원하며, 왕은 잠깐이고 하나님은 영원한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후일 그 그루터기를 중심으로 찬란한 해방의 역사를 이어가실 그 미래의 밑둥치를 우리는 남겨두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지구의 환경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그 환경을 다스릴 미래의 인간을 건강하게 남겨놓지 않은 채 아무리 환경을 지킨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그 뜻을 헤아릴 줄 아는 미래를 남겨놓으면 이 모든 것은 그들의 손에 의해 새로워 질 것이며 그들의 손을 하나님이 다시 쓰실 것입니다.
 
셋째는 모세의 어머니가 그의 희망을 물이 새지 않는 광주리에 담아서 미래로 흘려 보내는 것처럼 우리의 미래가 나일 강물에 휩싸이지 않는 최소한의 노력인 갈대상자를 만들어 그 안에 역사의 미래를 보호하는 일입니다. 나일강의 범람하는 파도에 실렸어도 나일 강물이 도저히 스며들지 못하도록 역청을 바르고 나무진을 칠하여 이 악한 세대의 파도가 엄습하지 못하도록 갈대상자를 만드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오늘 우리 교회가 이 갈대상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범람하는 나일강에 띄우는 갈대상자가 되어 이 세상의 파도가 그들의 생명을 앗아가지 못하도록 그들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책임을 다 했을 때, 우리의 미래는 건강하게 이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갈대상자를 만듭시다.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나일강의 파도가 삼킬 수 없도록 갈대 상자를 만듭시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 하나님이 전개할 출애굽의 역사, 이 세상의 구원의 역사를 하나님과 더불어 영도할 미래들을 이 갈대상자에 담읍시다. 이것이 오늘 이 현실 속에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으로 인식하고 그 지혜와 용기를 지니는 부산진교회가 됩시다. 아멘.
 
<박성원 목사, 1994. 5. 1. 부산진교회, 어린이 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