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아, 강아,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렇게 초청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오늘 주제강연은 WCC 모의 총회이므로 (강남 스타일로가 아니라) WCC 스타일로 하려고 합니다.


냇물아!

우리 한국 동요 한곡 같이 부를까요? 이 동요는 한국 사람들이 어렸을 때 많이 불렀던 노래인데 권길상씨가 곡을 만들고 이종구씨가 노랫말을 쓴 “냇물아”라는 노래입니다.




1.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 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2. 강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우리 이 노래를 청아할 정도로 아름답게 흘러가는 강물을 머리에 그리면서 어떤 영감이 올 때까지 같이 불러볼까요?

<노래가 계속되는 동안 물흐르는 장면의 동영상을 올린다.>

어때요? 어떤 영감이 떠오르나요? 무슨 생각이 떠오르나요?


신음하며 울부짖는 땅과 물의 이야기

이번에는 또 다른 영상 하나 감상하시겠습니다.

<‘신음하며 울부짖는 땅과 물의 이야기’ 영상을 올린다.>

무엇을 느꼈나요? 이 영상을 보면서 혹시 머리에 어떤 성경귀절이 떠오르지 않나요?

내 머리에는 로마서 8장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8:22)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는 생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는 정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는 평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천지에 생명이 있나요? 정의가 있나요? 평화가 있나요?

조금 전 동영상을 보면서 인간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 피조물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과 부르짖음속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지 않나요? 2011년 겨울 한국에는 구제역으로 수백만의 소와 돼지들이 산채로 매장당했습니다. 그 때 농부들은 마치 자기 자식을 생매장하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고 직업적으로 매장하는 사람들까지도 짐승들을 생매장하고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의 땅, 생명의 물이 성경말씀대로 인간문명의 썩어짐의 종노릇하느라 엄청나게 시달리고 있습니다.


땅아, 강아,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번에는 마태복음 16:13-20을 한번 생각해 볼까요?

이 이야기는 개신교회는 교회가 바로 그 위에 세워졌다고 생각하는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하고 로마가톨릭교회는 사도성(Apostolicity)이라 보는 교회론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유대가 로마황제에게 충성을 보이기 위해 별도로 만든 신도시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이루어진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이야기는 Q & A 형식으로 진행된 이 이야기를 약간 다른 각도에서 한번 보겠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궁금했고 제자들은 시중에서는 “예언자 중의 한 분으로 이해한다고 보고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 자신들의 이해를 물었고 제자들이 멍하고 있는 가운데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란 기념비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2천년 역사를 두고 태어난 신학자 중에 가장 명석한 신학자가 바로 베드로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이런 신학이란 것을 한 마디로 설파할 수 있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신학 끝!’입니다. 베드로의 이 한 마디는 세기적 신학입니다. 이 후의 모든 신학은 이 신학의 각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신앙고백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기독교 교회론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여러분과 함께 월터 부르지만 (Walter Bruggemann)의 말대로 예언적 상상력으로 한번 상상해 보고 싶은 부분은 바로 예수님의 질문 부분입니다.

<스탠리 스펜서 닭과 예수 그림을 보여준다.>

이 그림을 한번 보시지요! 이 그림은 영국 화가 스탠리 스펜서 (Stanley Spencer)가 그린 광야의 그리스도 (Christ in the Wilderness)란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란 마태복음 23:37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그림을 보면서 또 다른 예언적 상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신 물음을 닭가 병아리에게 물으시는 상상 말입니다. “닭아, 병아리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요한복음 10:10에 예수님을 이 세상 모든 생명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러 오셨다고 하셨으므로 이 질문은 상당히 의미 있는 질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하나님만이 아닌 우주의 생명의 알파이고 오메가이신 그런 우주의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질문과 제자들의 대답을 오늘의 생명세계 전체의 관점에서 재구성해보면 어떻게 될까요?

“땅아, 강아, 너희를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한 땅과 강의 대답은 과연 무엇일까요? 모든 피조물에게 예수님은 누구실까요?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얼굴의 살아있는 아이콘

<성 크리소스톰 그림을 보여준다.>

교회사를 배울 때 교부 성 크리소스톰에 대해 들어보았지요? 이 분은 676년에 다마스커스에서 태어나 749년 예루살렘 근처 마 사바(Mar Saba) 수도원에서 사역하다 돌아가신 아랍계 최고의 교부였습니다. “황금의 혀”라는 별명을 가진 성 크리소스톰으로 알려져 있지만 공식적 이름은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St. John of Damascus)입니다. 그 분이 자연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 이런 신학선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얼굴의 살아있는 성상(聖像)”

(The whole world is a living icon of the face of God.)

생태신학에 관한 한 우리 개신교는 정교회, 카톨릭 교회에 비해서 많이 뒤떨어집니다.

고대교회에 이미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체를 하나님의 집(Oikos)의 가족으로 본 선배 생명신학자, 생명목회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Hildegard von Bingen 그림을 보여준다.>
독일출신 여성으로서 12세기 베네딕트 수도원 수도원장이 되었던 힐데가르드 폰 빙엔(Hidegard von Bingen 1098 - 1179)이 있습니다. 그녀는 신과 우주, 인간은 유기적 관계 속에서 하나라고 했습니다.

<성 프란시스코 그림을 보여준다.>
또한 “평화의 기도”로 잘 알려진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코(St. Francisco of Assisi, 1182-1226)도 있습니다. 그는 해, 달, 별, 새, 나무, 물 등 자연을 형제자매로 생각했습니다.

<원주민 그림을 보여준다.>
많은 원주민들은 “땅”을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데 대해서 여성신학자들은 문제를 제기합니다만 원주민들이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에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강과 땅은 예수를 누구라 할까요? 내가 강과 땅이 아니라서 정확히 모르겠으나 이렇게 상상해 봅니다. 아마 강과 땅은 예수를 “엄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나의 어머니” 라고 부르지 않을까? 하나님이 만드신 아버지라면 예수님은 어머니라 고백하지 않을까? 아니 어머니이지 않을까요?


인간만? 혹은 자연과 인간 모두?

만약 로마서 8:19에서 사도바울이 문제를 제기한대로 인간만이 아니라 피조물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대상자에 포함된다면 현재의 신학담론으로 이 구원의 스케일을 다 담아낼 수 있을까요? 인간의 영적 죄성 - 영적 타락 - 영적 구원 - 영적 성화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구원 고리로 모든 피조물의 구원을 담아낼 수 있을까요? 심지어 그 구원의 범주를 사회적 차원과 경제적 차원, 인권적 차원, 정치적 차원의 범위를 다 포함하는, 흔히 말하는 통전적 구원이라고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중심적(anthropocentric)이라면 그 구원구조로 피조물 전체의 구원을 담아낼 수 있을까요? 만약 피조물 전체의 구원을 기독교신학이 관심해야 한다면 전통적인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론, 기독론, 속죄론, 구원론, 성화론 등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인간에게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선교는 정당한 것일까요? 인간만 대상으로 삼는 기독교교육, 인간만 섬기는 기독교봉사학,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면서도 인간의 찬양만을 부각시켰던 예배 등 철저히 인간중심적이고 피조물들이 배제된 채 전개된 이런 신학의 틀이 완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직 반성하지 않는 서구신학도 많이 있지만 비록 양심적인 서구신학자중에는 서구신학의 한계에 분명하게 선을 긋는 신학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나의 박사 지도교수였던 루카스 피셔(Lukas Vischer)박사는 기독교선교란 이름으로 확장된 서구문명이 오늘의 생태위기의 주범중의 하나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 서구문명의 저변에는 인간을 자연위에 군림하게 한 기독교인간학, 기독교신학이 자리 잡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번 부산총회에서 선언될 21세기 새로운 선교선언문에는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닌 온 피조물의 구원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우분투(Ubuntu)와 상생(相生)의 신학담론(神學談論)

<장성 한마음공동체 그림을 보여준다.>
2007년 8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젊은 신학자 30여명이 21세기의 세계 현실에 응답할 수 있는 새로운 신학과 선교, 영성 담론을 토론하기 위한 신학협의회가 전남 장성에서 열렸습니다.

당시 참석한 신학자들은 생태계의 존재와 위기가 심각하게 다가오는 21세기에는 서구신학의 틀이 결코 적절치 않다고 진단하고 신학의 틀이 아프리카의 우분투(Ubuntu)와 아시아의 상생(相生)같은 우주 만물의 관계적 인식의 틀로 대체될 필요가 있다고 공감했습니다.

<하나로 연결된 소나무 그림을 보여준다.>
우분투는 아프리카 개념으로 흔히 ”공동체가 존재하므로 나도 존재한다.“(I am because we are.)란 말로 표현되는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서로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보는 유기적 세계관입니다. 이 우분투의 개념에서는 심지어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이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도 불가능하고 인간 없는 하나님도 불가능합니다. 인간 없는 자연도 불가능하고, 자연 없는 인간도 불가능하며, 하나님 없는 자연, 자연 없는 하나님도 불가능합니다.

상생은 잘 아는 대로 아시아 개념으로 모든 존재의 삶이 서로 연결되어 상부상조하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신학자들은 21세기의 우주적 세계를 그야말로 통전적으로 보려면 우분투와 같은 상생과 같은 새로운 인식의 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올리비에 메시앙의 “시간을 종말을 위한 4중주”

이번에 여러분을 또 하나의 동영상으로 초대할까 합니다. 이것은 프랑스 아비뇽 출신 올리비에 메씨앙(Olivier Messiaen)이란 작곡자가 쓴 총8장으로 구성된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 Quatuor pour la fin de temps, Quartet for the end of time”라는 작품을 현대의 누군가가 동영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 곡은 요한계시록 10장을 주제로 작곡했는데 총8장을 쓴 것은 바로 6일 동안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제7일에 쉬셨는데 제8일은 하나님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므로 인간의 유한시간을 넘어 하나님의 영원으로 들어가는 영성을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이 곡을 가지고 어떤 현대인이 현대문명의 유한성과 하나님의 창조의 영원성을 대조한 영상을 만들었습니다. 이 영상이 오늘 하나님과 창조세계의 신적 관계를 아주 잘 표현하는 것 같아 여러분과 나눕니다.

<올리비에 메시앙 동영상을 올린다.>
무엇을 느끼셨나요? 나에게는 다음의 네 가지, 즉
   1) 예수의 영원성, 즉 하나님의 영원에 대한 찬양,
   2) 훅 불면 흐트러져 버릴 것 같은 민들레의 모습,
   3) 인간의 개발문명의 상징인 불도저와 그리고 인간문명의 편리함의 상징인 자동차,
   4) 그리고 교회의 장면,
이 네 가지 주제의 교차가 참 인상적입니다.

결국 엄청나게 힘이 있어 보이는 인간의 문명보다는 흐트러지기 직전의 자연의 모습과 예수의 영원의 모습을 오버랩하는 그 장면이 자연의 시간성과 인간의 시간성의 차이를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민들레와 불도저, 그리고 자동차 그 뒤에는 교회가 계속 나타나는데 이것은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교회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의도가 아닐까요? 시간 속에 존하면서도 영원을 의미하는 교회의 자리에 대한 물음, 그 신학의 입장에 대한 물음, 그 설교의 입장에 대한 물음이 아닐까요? 시간 쪽인지, 진정으로 영원 쪽인지?


누가 더 영원한가? 인간인가? 자연인가?

도덕경 8장에는 물에 대한 덕목론이 나옵니다.

   上善若水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습니다
   水善利萬物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而不爭              다투지 않습니다
   處衆人之所惡  뭇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합니다
   故幾於道          그러므로 도에 가깝습니다
   居善地              살 때는 낮은 땅에 처하기를 좋아하고
   心善淵              마음 쓸 때는 그윽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與善仁              벗을 사귈 때는 어질기를 노력하고
   言善信              말할 때는 믿음을 가지고 하고
   政善治              다스릴 때는 바르게 다스리고
   事善能              일할 때는 능력있게 하고
   動善時              움직일 때는 때를 가려 움직입니다.
   夫唯不爭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故無尤              나무람 받을 일도 없습니다

나는 이 도덕경에 근거하여 물의 속성을 생각해보면서 물의 경제학(Economics of Water)란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만 도교에서는 물이 최고의 덕스런 존재이며 물의 성품은 우리 기독교의 로고스에 해당하는 도(道)의 경지에 가까운 것이라 예찬했습니다.

물뿐이겠습니까? 우리가 마음대로 무시하고 억압하는 모든 자연의 품격이 인간의 인격보다 더 고상한 경우가 훨씬 더 많지 않을까요?


힘내라 맑은 물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의 말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얼굴의 살아있는 아이콘, 성상(聖像)”이란 말이 자꾸 가슴을 찌릅니다. 내가 밟고 다닌 흙, 내가 목마르면 마신 물, 내가 지치면 앉아서 쉬는 나무그늘, 죽어서도 내가 책상으로 쓰던지 혹은 땔깜으로 쓰는 그 나무, 내가 바라보면 그렇게 선한 마음이 솟아나는 꽃, 이 세상의 생명의 이음을 위해 자기 생명을 다하는 미생물까지 하나님의 살아있는 얼굴의 아이콘이라니... 부끄러워집니다. 송구스러워지고...

인도의 아룬다티 로이(Arundathi Roy)란 작가는 “당신이 신앙인이라면서 자연을 파괴하면 신성모독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흙과 물, 땅과 강을 하나님의 얼굴 대하듯이 대해야겠습니다. 이제 자연을 하나님의 살아있는 얼굴의 성상(聖像) 대하듯이 대해야겠습니다. 신학도 자연의 마음으로, 자연의 가슴으로 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에게 주신 청지기의 본래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이번 WCC 부산총회는 생태총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 총회를 깃점으로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구원받는 메시지를 세계와 우주에 선포하고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죽음에서 구해내는 일에 세계교회가 앞장서길 기대합니다. 그 첫 단추로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생명을 주는 이 세계의 땅과 이 우주의 물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힘내세요, 맑은 물, 힘내세요, 4대강, 당신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셨기에 그 하나님이 생명의 동역자인 당신도 살릴 것입니다. 우리만 부끄러워지겠네요. 이 생명살림의 신학에 우리 몸을 담그지 않으면...

   힘내세요, 맑은 물!
   힘내세요, 4대강!
   부디 부디 힘내세요.

류형선씨가 새롭게 만든 강 노래를 우리 함께 힘차게 부르면서 마칠까 합니다.

   힘내라 맑은 물, 류형선 전경옥

   힘을 내거라 / 강으로 가야지 / 힘을 내거라 / 바다로 가야지
   흐린 물줄기 / 이따금 만나거든 / 피하지 말고 / 뒤엉켜 가거라
   강물아 흘러 흘러 / 바다로 가거라 / 맑은 물살 / 뒤척이며 / 바다로 가거라

<류형선 힘내라 맑은 물 동영상 상영>

<박성원, 2012. 10. 25. 영남신학대학교 WCC 모의총회 주제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