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성 경 / 시편 8:1-9

          우리는 오늘 설교전 찬송으로 그 유명한 찬송가 40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불렀습니다.

1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2 숲속이나 험한 산골짝에서 지저귀는 저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은 주님의 솜씨 노래하도다

3 주 하나님 독생자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보내주셨네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주 내 모든 죄를 구속하셨네

4 내 주 예수 세상에 다시올 때 저 천국으로 날 인도하리
  나 겸손히 엎드려 경배하며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라

          이 찬송가는 야외예배나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찬양할 때 즐겨 부릅니다. 처음에는 1859년에 스웨덴 묀스터라스의 선창에서 일하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 나서 후에 목사가 된 스웨덴 출신 칼 구스타프 보베르그(Carl G. Boberg; 1859-1940)가 1885년에 스웨덴 민요곡에 9절의 가사를 붙여서 곡을 만들었습니다. 그 후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러시아 등지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적이 있는 스튜어트 하인 목사가 1절부터 3절까지는 보베르그가 쓴 노랫말을 영어로 개작하였고 4절은 자신이 작시하여 덧붙인 곡이라고 합니다.

          하인 목사가 이 가사를 쓸 때, 그냥 막연한 영감으로 쓴 것이 아니라 1절부터 4절까지 각각 다른 지역에서 만난 아주 절박한 실존적 상황에서 썼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1절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는 그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카바디아 산골 마을에서 엄청난 뇌우를 만나 하룻밤을 피신하고 있을 때 지은 것이고, 2절 숲속이나 험한 산골짝에서 지저귀는 저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은 주님의 솜씨 노래하도다  은 루마니아의 부코비아 산악지대를 방문하였을 때 숲속에서 한 무리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러시아어로 번역된 이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듣고 쓴 것이라고 합니다. 또 4절 내 주 예수 세상에 다시올 때 저 천국으로 날 인도하리 나 겸손히 엎드려 경배하며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라 는 부분은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으로 피난 온 폴란드인들이 우리는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하였을 때 영감을 얻어 썼다고 합니다.

          우리가 감동적으로 애창하는 이 찬송 시는 위대한 자연과 인간의 고난이 있는 실존적 상황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기대감으로 승화시키는 아름다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는 말할 수 없이 교만해지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년엔가 유행한 유행가 애모 (愛慕)에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란 가사가 있는데 그대앞이 아니라 정말 인간이 그 앞에 서면 자기 스스로를 겸허하게 생각하여 아주 작게 생각하는 경우가 세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 인간이 자연 앞에 설 때 자신을 작다고 여깁니다.

          저는 스위스에 살면서 그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알프스산에 자주 올라갔었는데 우람하게 솟은 봉우리 깊게 드리워진 계곡, 기암절벽, 눈과 꽃의 아름다운 조화, 그야말로 감탄에 감탄을 자아내며 그 자연 앞에 섰을 때 인간의 모습은 정말 작아집니다. 아무리 여성이 아름답게 생겼다 하더라도, 그 미가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하더라도 그 알프스산의 아름다움 앞에서는 정말로 새발의 피 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남성이 우람하게 생겼다 하더라도 그 산의 우람함 앞에 서면 그렇게 작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자연 앞에 서면 작아지고 겸손해 집니다.

          둘째 인간은 죽음 앞에 서면 작아지고 겸손해 집니다.

          제 아무리 세상을 호령하는 군왕이라도 죽음이 인간에게 찾아오면 인간은 그렇게 자신이 허약한 존재인줄을 절감하게 됩니다.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인간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어느 황제의 죽음 이라는 코메디를 보니까 황제가 죽음의 선고를 받는 순간에 그 황제의 위엄도, 그 호령도, 그 품위도 온데 간데 없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비로소 자신이 작다고 여기게 됩니다.

          셋째 인간이 그 앞에 서면 작아지고 겸손해 지는 존재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은 쏘크라테스(Socrates) 하면 네 자신을 알라. 는 말을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네 자신을 알라! 는 문구는 사실 쏘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라 어디에서 인용한 말인데 그 글귀가 쓰여져 있는 곳이 어디냐 하면 그리스의 델피(Delphi)에 있는 신전 앞입니다. 그 신전 앞에 가면 네 자신을 알라. 는 말이 희랍어로 쓰여져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이 자기에 대해 스스로 크다 생각할 때 신 앞에서 자기의 모습을 보면 결코 자신이 크다고 인정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연과 죽음과 하나님, 이 세 존재 앞에서 인간은 작아지고 겸손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른 이 찬송가 40장도 바로 이런 세 가지 실존적 상황에서 겸손해지는 동시에 저절로 찬양과 신앙고백이 동시에 터져나온 인간의 원초적 부르짖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8편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 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이 시를 읊은 시인은 아마도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란 찬송을 지은 스웨덴 출신 목사 칼 보베르와 이 찬송가 가사를 개작한 하인 목사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이런 신앙고백을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시인은 먼저 여호와 우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하면서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를 보고 감탄과 탄성을 자아내면서 그대로 그 자연의 위대함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연결되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재미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위대한 자연 앞에 선 인간은 드디어 자신의 실체를 바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권고하시나이까

          인간은 늘 교만하다가 절묘하게 만들어진 자연을 보고 그 앞에서 한번 기가 죽고 그 절묘한 자연이 바로 하나님의 손의 의해 창조되었음을 알고선 다시 한번 기가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의 베풀어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볼 때 나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장엄한 자연을 마주하고, 그 자연을 만드신 더 위대하신 하나님과 마주하고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가 얼마나 편차가 심하며 하나님의 스케일과 인간의 능력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절감하게 됩니다. 유한(有限, Finitum)이 무한(無限, Infinitum)앞에 서게 된 셈이고, 순간적인 것(The transient)이 영원한 것(The eternal)앞에 서는 셈이고, 영속적인 슬픔과 염려 속에 살아서 끝내는 재로 변할 인간이 평화와 굳건함, 그리고 예정된 코스를 어김없이 미련없이 도는 자연의 법칙처럼 굳센 하나님의 질서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이 불안한 모습인 것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그런 경험을 이 시인은 하고 있는 셈입니다.

          구약성서의 욥이 경험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욥은 자기는 의롭다고 생각했는데 고난을 받게 되니까 하나님 앞에 내가 고난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달라 고 항변합니다. 그 고난과 그 고난에 대한 해결책도 다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데 욥은 자기가 똑똑한 것처럼 자꾸 하나님에게 자기의 고난의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조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하나님이 이렇게 묻고 나오셨습니다.

          내가 땅에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이 말은 너는 아직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너 자신은 이 창조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웅대한 세상을 지은 설계도를 내가 가지고 있는데 너의 고통에 대한 설계도 정도야 내가 가지고 있지 않겠느냐?' 하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자연의 창조자임을 발견할 때 드디어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아님을 발견하고 이 자연의 주인은 따로 있었으며 그 주인이 바로 나도 지으셨음을 알게 되는데 이 때가 비로소 인간이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찾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과 하나님 앞에 무조건 자기를 작게만 여겨야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우선은 하나님 앞에서 오만하고 자연 앞에서 오만하여 우리의 본질을 잘 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을 깨우친 다음에는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 하십니다. 처음에는 어마어마한 자연 앞에 인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자신은 너무나 작고 초라한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마치 갑자기 암실에 들어갔을 때 처음에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하지만 조금 있으면 점점 주위의 물체가 눈에 들어오듯이 이 시인도 처음에는 자연 속에 임재한 하나님의 영광 앞에 자신의 너무나 초라한 모습을 발견하고 떨고 있었지만 조금씩 생각을 가다듬기 시작했을 때 그는 또 다른 차원의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그것이 5절 이하에 나타나 있습니다.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인간은 자기가 전혀 무익하게 창조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천사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고 이 아무리 위대하고 아름다운 자연도 결국 인간의 발아래 두어서 그것을 우리에게 다스리라고 하셨으니 우리의 존재는 비교법에 의하면 자연보다 위대하게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보고서 그토록 감탄하면서 그 자연을 보고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가만히 보니 인간은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보다도 더 존귀하게 만드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다시 교만해져서 자연 위에 군림하고 하나님이 주신 법칙 위에 군림하는 자세입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스케일을 아직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어리석음의 발로입니다. 다 한 가지의 반응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라고 하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낳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우 중에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설악산을 자주 갔었는데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난 뒤에 설악산을 갔을 때는 그 전에 갔을 때와 전혀(Totally)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애인이 생겨도 세상이 달라 보이는데 창조주를 발견한 뒤에 세상은 엄청나게 달라져 보이게 될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15:16에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라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발견할 수 있는 최고 위대한 발견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 안겼습니다. 주 하나님이 지으신 이 아름다운 세계에서 우리는 이 위대한 창조를 이룩하신 하나님의 품에 있고 그리고 이 창조의 오묘함 보다도 더 오묘하게 우리를 지으시고 섭리하시며 돌보신다는 것을 깨닫고 자연과 더불어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박성원 목사, 1994. 5. 29 부산진교회 전교인 야외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