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정의


때아니게 한국에는 요즈음 ‘정의’공부에 대한 열풍이 불고 있다. 과거 독재 정권 때는 절실한 개념인데도 쉽게 접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요즈음은 마이클 샌델의 책이 날개 돋힌듯이 팔리고 여기저기에서 정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독재 정권보다 더 불의하다는 반증인가? 한국사회의 이 ‘정의열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의 분석이 있는 것 같다. 결국 한국사회는 지금 ‘정의’에 목마른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정의에 대한 막연한 개념이 느낌이 아니라 정의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것이리라.


한국교회사상 처음으로 2013년, 10월 30일부터 11월 8일까지 부산 벡스코에서 열리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0차 총회 주제에도 정의가 들어있다.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God of Life, lead us to Justice and Peace!) WCC 총회 주제는 보통 그 시대적 징조에 대한 세계교회의 복음증언의 과제와 총회가 개최되는 나라를 포함한 해당 대륙의 제안으로 정해지는데 부산총회를 위해서 한국교회가 제안한 핵심개념은 ‘생명’이었고 한반도 분단상황을 고려해 ‘평화’의 개념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2010년 11월 아시아교회대표와 신학자들이 모여 아시아적 관점에서 WCC 총회 주제에 대해 논의했을 때 아시아교회대표들은 생명도 중요하고 평화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정의가 더 중요한 것으로 강조하였다. 정의 없는 생명도 진정한 생명이 아니고 정의 없는 평화도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진정한 생명과 평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의에 기초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산총회 주제에 함유된 개념은 생명, 정의, 평화이지만 그 중심 개념은 정의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에서 정의는 항상 중요하게 다루어져 왔다. 물론 속죄, 구원, 성결, 성화 등 종교적 개념이외에 사랑, 자비, 평화, 생명 등이 중요한 개념으로 다루어져 왔지만 정의는 항상 기독교 가치의 중심개념으로 자리 잡아 왔다. 그러면 기독교가 생각하는 정의는 어떤 개념인가? 성서는 정의를 어떻게 말하고 있으며 그 정의의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광범위한 주제여서 전체를 다 다룰 수 없지만 핵심적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경전인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의 개념을 살펴본 후 이의 신학적 의미를 성찰하는 방법으로 좁혀서 집중하려 한다.
 
성경적 ‘정의’ 언어
 
성경에서 정의를 가리키는 말에는 구약에는 ‘쩨데크’, ‘미슈파트’란 히브리어가 있고 신약에는 ‘디카이오수네’란 희랍어가 있다.
 
먼저 쩨데크(tsedeq)란 개념을 살펴보자. 이 단어는 짜다크란 어근에서 파생했다. 서부 셈어 계통에서 발생한 이 어근은 아카드어에서는 ‘올바르다’, ‘정당하다’란 뜻이다. 아모리어에서는 신의 이름이나 사람의 이름으로 종종 나타나는데 이 말도 ‘정당함’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남부 아랍어에서는 ‘의무를 이행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고 명사로서는 ‘권리, 의무, 진실, 사실’등을 뜻한다. 형용사로서는 ‘행복하다’ ‘만족스럽다’란 뜻도 내포하고 있다. 마이클 센델의 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추구, ② 개인의 자유와 권리존중, ③도덕적 이상을 충족시키는 미덕 추구 란 세 가지 정의 개념 중의 첫 번째가 이것과 상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행복이란 개념이 여기에 나온다. 우가릿어에서는 ‘합법적이다’ 혹은 ‘정당하다’란 의미로 사용된다. 위의 어근이 의미하는 바를 영어로 표현한다면 대체로 ‘fairness’, 혹은 ‘justice’ 란 말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쩨데크가 동사원형으로는 41회 사용되었고 그 의미는 ‘의롭다. 옳다. 정직하다.’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이 말속에는 원래 ‘똑 바르다.’란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 말에는 자(尺), 저울을 가리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오늘 정의를 가리키는 상징에 저울이 쓰이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인지 모른다. 이 쩨대크란 말에는 결국 윤리적, 도덕적 개념으로 표준 혹은 기준에 일치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여기에서의 표준, 혹은 기준은 하나님의 표준, 혹은 기준을 말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고 정당한 것이 정의가 되는 것이다. 후에 기술하겠으나 쩨데크에는 바르게 하려는 하나님의 성품과 의지가 반영되는데 이것은 수동적 의지가 아닌 능동적 의지이다. 따라서 하나님에세는 ‘반드시 바르게 하는’ 정의의 의지가 숨어 있다.
 
성경에는 짜다크 동사의 어근에서 파생된 명사로 남성형 쩨데크와 여성형 쯔다카가 각각 119회, 157회 나오는데 이 둘의 뜻의 차이는 없다. 그런데 쩨데크는 주로 재판과 관련하여 쓰이며(시 48:11, 전 5:8, 습 2:3, 신 16:20, 잠 2:9) 이 때 재판관은 권리를 빼앗긴 자에게 그것을 다시 찾아주기 위해 노력하는, 즉 빼앗긴 사람, 곤핍한 사람의 편에서 판결하는 재판의 행위와 주로 연결되어 있다. 이 때 재판관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지칭한다. 여성명사인 쯔다카는 주로 ‘자비’와 상호 관련되어 쓰인다.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 등을 보살피며 나그네와 손님을 잘 보살핀 것을 의미하는데 쓰인다.(욥 31:21-32).
 
구약에서 또 하나 쓰이는 정의란 단어는 ‘미슈파트’이다. 구약성경에서 422회 정도 나타난다. 미슈파트는 통치의 모든 기능을 지칭하는 사역동사인 쉬파트(Shaphat)에서 파생했는데 이 쉬파트 동사는 구약에서 202회 쓰였고 한글로는 ‘판단하다. 재판하다. 판결하다. 다스리다.’등으로 번역되었다. 명사 미슈파트는 율례, 규례, 법도, 제도 등으로 주로 쓰였고 공의, 재판, 판단, 판결, 의 등의 단어로 등장한다. 정해진 원칙이나 규칙과 관련하여 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의 법률개념으로 말하면 민사행정상의 정의의 특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입법, 사법, 행정상의 기능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통치자의 바른 심판의 종합적 기능을 대표하는 말이다. 해리스(R. L. Harris)는 이 ‘정의’는 하나님의 속성이되, 하나님의 법령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정당한 요구‘라고 정리한다.
 
신약에서의 정의는 디카이오쉬네이다. 어원은 ‘디케’이다.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관습, 관습적인 것’이란 뜻인데 이 후에 사법적으로 사용되면서 ‘재판, 소송, 형벌, 민족’ 등의 의미로 쓰였다. 디케의 명사형인 디카이오쉬네는 신약성경에서 약 92회 나타난다. 그 뜻은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정직하고 법을 준수하는 시민의 공민적 미덕을 가리킨다. 마이클 센델의 세 가지 정의 중의 하나인 ‘도덕적 이상을 충족시키는 미덕 추구’가 바로 이를 가리키는지 모르겠다.
 
성서적 정의의 신학적 의미
 
성경의 ‘정의’ 언어도 평면적으로 볼 때는 일반적 ‘정의’ 언어와 특별히 다른 것이 없다. 그러나 성경의 ‘정의’개념을 신학적 차원에서 성찰하면 상당히 그 폭이 달라진다.
 
첫째 성서의 정의는 ‘하나님의 시각’ 에서 보는 정의이다.
 
쩨데크도 그렇고 미슈파트도 그렇다. 이 두 언어 안에 있는 독특한 부분은 이 정의가 하나님의 성품이란 뜻이다. 해리스의 말대로 하나님의 법령의 범주를 넘은 ‘하나님의 정당한 요구’이다. 위르겐 몰트만이 쓴 책 중에 ‘하나님의 이름은 정의이다’란 책이 있는데 그야말로 하나님의 이름은 정의이다.
 
창세기 15:6에 보면 성경의 최초의 의인으로 지칭되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올바른 믿음의 행위를 보였는데 하나님은 이를 의롭다 하셨다.(창 15:6) 또 신명기 6:25에 보면 하나님께서 명하신 규례를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을 ‘의롭다’ 하고 칭하셨다.(신 6:25)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율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정의로 보신다. 하나님은 계약백성인 이스라엘민족에게 끊임없이 이 정의의 삶을 요구하셨고 이스라엘백성이 이 계약의 삶을 여겼을 때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복귀할 것을 요청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표준, 하나님의 시각에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명제는 창조이야기(창 1-2장)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창조이야기는 성서학적으로 제사장 문서(P문서)라고 하는데 이것은 유다민족이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제사장, 서기관, 정치지도자 등 유다의 지도층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온갖 조롱과 수모를 받는 가운데 기록된 것이다. 하나님이 택한 민족이라고 자임했던 자신들이 이방민족에게 견딜 수 없는 수모를 당했을 때, 아니, 시편 137편에 ‘이방민족이 이방 땅에서 여호와의 노래를 불러 보라’는 식으로 자신들의 그 하나님이 능멸을 받을 때 이들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에 대한 자기들의 불충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심각한 반성을 하게 된다. 이런 민족적, 신앙적 수모 속에서 유대인들은 세 가지 반성을 하고 바르게 하기 위한 작업을 한다. 첫째는 하나님을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안식일을 제정하고,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신체적으로 확인하는 할례 제도를 채택하며, 셋째는 그들의 역사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시 썼다. 왕조사와 시대사를 쓰면서 그 시대와 왕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았는가를 두고 역사를 재평가를 했다. 이것이 오늘 성경의 역대기상하, 열왕기상하, 사무엘상하이다. 이스라엘민족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았는지의 표준으로 그들의 역사를 재 이해한 것이다. 역사의 정의를 세우기 위한 조치였다.
 
WCC가 암스텔담에서 창립될 당시 1948년은 냉전체제로 세계가 심각하게 대립할 때였다. 이 이념의 갈등은 암스텔담 WCC 창립총회에서도 나타났다. 사회주의가 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체제인지, 자본주의가 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체제인지 체코 신학자 호마드카와 미국 교회 대표 둘레스 간에 심각한 논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WCC 총회는 격렬한 토론 끝에 하나님은 어떤 인간의 이념도 능가해서 존재하는 분으로 고백하고 신앙은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표준,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기로 한 것이다.
 
부산총회의 주제는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로 정해 졌는데 필자는 WCC 중앙위원회에서 주제를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당신의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God of Life, lead us to Your Justice and Peace!"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제는 ‘당신의’란 말이 없는 채 채택되었는데 이것은 여기에서의 정의와 평화는 곧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라는 것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당신의’ 란 말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적 시간에서 보는 정의와 평화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팔레스틴과 이스라엘 민족이 보는 평화가 너무 다르며 아랍세계와 서방세계가 보는 정의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정의까지도 자기의 시각으로 끌여들이려는 인간적 의도가 팽배하기 때문이다.
 
성서의 정의는 분명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고 정당한 것을 의미한다. 앞서 말했지만 쩨데크에는 바르게 하려는 하나님의 성품과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정의에는 굽은 것을 반드시 바르게 하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하고 그 유명한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로 하나님의 의지를 노래한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였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눅 1:46-53)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매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곳아 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모든 육제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눅 3:5) 하나님은 그 속성이 굽은 것을 바르게 하시고 험한 것은 평탄케 하시며 높은 것은 낮추시며 낮은 것은 높이시는 속성을 가지고 계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의 속성이다.
 
이것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는 수동적 의지가 아닌 능동적 의지이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하나님은 그의 정의를 ‘반드시’ 이루려는 의지를 가지고 계신다.
 
둘째 성서의 정의는 ‘관계’의 정의이다.
 
성서가 정의를 말할 때는 평면적 혹은 일반론적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관계적 차원에서 말한다.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든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든지 언제나 관계적 차원에서 말한다.
 
아프리카 철학 개념에 ‘우분투’(Ubuntu)란 개념이 있다. 그 의미는 “I am because we are. We are because I am.', 즉 내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고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곧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말로 풀이될 수 있다. 우분투는 우주의 모든 존재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명제를 가지고 있다. 성서의 하나님도 그냥 홀로 독존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성서에서 하나님은 계약관계로 출발하고 계약관계로 끝을 맺는다.
 
이처럼 ‘체데크’는 기본적으로 관계적인 개념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관계의 하나님이다. 세상의 창조에서부터 시작하여 노아와 맺은 구원의 계약, 홍수심판 뒤에 결코 물로써 다시는 심판하지 않겠다는 계약, 아브라함을 통하여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케 하겠다는 언약, 다윗의 위를 영원무궁토록 하겠다는 언약,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맺은 새 계약까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계약의 목적은 인간과 피조물을 끝까지 보호하며 구원하고자 함이 목적이다.
 
인간적 차원에서 볼 때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관계는 하나님, 그리고 이웃임을 생각할 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는가 하는 것은 성서적 정의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이 관계적 사랑을 인간이 하나님을 향한 행위로 볼 때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규례를 따라 올바르게 살아감을 의미하고 이렇게 살 때 그 인간이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 한편 인간이 이웃에게 대해 ‘츠다카/체데크’를 행한다는 것은 그가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다(시 15:2). 이웃을 참소치 않으며, 행악지 않고, 훼방치 않으며(시 15:3~5), 주리고 어려운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고 그들을 도울 때, 그는 의로운 사람이 된다.(사 58:8-9 겔 18:5~9) 그러므로 체데크는 이웃에 대한 올바른 행실, 나아가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삶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웃에 대한 이러한 진실한 자세는 경제적인 거래에서도 일관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상거래의 기본은 ‘체데크의 저울’이다. (레 19:36; 신 25:15; 겔 45:10) 이래서 체데크가 단순한 의무만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실행해야 마땅할 바를 실행하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 독특한 성서적 정의라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
 
성경에는 두 가지 죄의 개념이 있는데 하나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범한 죄(Commission)가 있고 다른 하나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죄(ommission)이 있다.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에서 부자는 거지에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죄는 범하지 않았다. 그가 범한 죄는 가난한 자에게 보여야 할 부자의 의무를 행하지 않는 죄이다. 이처럼 성서적 정의의 관계적 개념은 약자에 대한 부자의 마땅한 배려인데 이 때 배려는 자선적이거나 시혜적 배려가 아닌 연대와 사랑의 배려여야 하며 바로 이런 배려가 정의에 해당되는 것이다.
 
셋째, 성서적 정의는 ‘구원’을 위한 정의이다.
 
하나님의 정의를 계약적 관계 속에서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시편 48: 9-11이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헤세드)을 생각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체데크)가 충만하였나이다. 주의 심판(미슈파트)으로 말미암아 시온 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시 48:9-11) 여기에서 하나님의 정의(체테크)는 어떤 절대적 윤리규범으로서의 정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약관계적 사랑(헷세드)의 발로로서 생기는 하나님의 성품으로서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고는 안 되는 사랑을 실천하는 정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정의에는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은 사랑하는 자에 대한 구원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이 원수의 손에서 위협을 당할 때 미슈파트(심판의 공의)를 행하심으로 그의 백성들을 그 행악으로부터 구원해내시는 정의를 실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에서 ‘야웨는 의로우시다’라고 선포되는 모든 서술문에 이런 모습들이 잘 나타나 있다.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시 7:9)
 
하나님의 정의의 응답은 구원을 목말라 하는 요구가 있을 때 빠짐없이 나타난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시 31:1)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시 5:8),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그들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시35:24)에서 보듯이 자신의 백성들이 원수들로부터 억울하게 능멸당하고 있을 때, 심지어 원수들로부터 구원받는 것뿐만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길까지 곧게 하는 일을 한다든지, 정의가 뒤집어져 불의를 범한 자는 기뻐하고 불의의 희생자는 오히려 억울함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정의를 세워달라는 간구를 계속 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정의는 정의의 존재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실현됨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는 데까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하나님이 구원은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배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피조물의 반복적인 계약파기, 배신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까지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담고 있다.
 
넷째, 성서의 정의는 ‘사회적 약자 편향적 정의’이다.
 
앞서서 성경에서 사용되는 남성형 명사 쩨데크는 재판관이 권리를 빼앗긴 자에게 그것을 다시 찾아주기 위해 노력하는, 즉 빼앗긴 사람, 곤핍한 사람의 편에서 판결하는 재판의 행위와 주로 연결되어 쓰인다고 했고 여성명사인 쯔다카는 ‘자비’(헤세드)와 서로 관련되어 쓰이는 말로서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 등을 보살피며 나그네와 손님을 잘 보살핀 것을 의미하는데 쓰인다고 했는데 이처럼 성서의 정의는 보편적 정의가 아닌 가난한자, 사회적 약자 편향적 정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WCC에서는 이 개념을 ’하나님의 가난한 자를 향한 편향적 선택‘( God's preferential option of the poor)란 개념으로 정리하고 쓰고 있다.
 
성경의 또 다른 정의의 언어인 미슈파트가 쓰이는 경우를 보면 더욱 그렇다.‘미슈파트’는 하나님의 법도에 근거해 이루어지는 올바른 사회 질서를 가리키는 말로서 '법, 재판, 규례 혹은 심판'까지 넓은 의미 영역을 지니게 된다. 츠다카와 미슈파트 혹은 정의와 공평이 다루어지는 주된 현장은 구약에서 주로‘성문(城門)’이다. 성문은 우물이 존재하는 곳으로(삼하 23:15) 이스라엘의 공동체생활의 중심지였다. 여기에서 누군가의 덕행에 대한 공개적인 칭찬이 이루어지기도 하고(잠 31:23),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왕하 7:1) 그러나 성문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재판'이었다. (룻 4:1이하 신 21:18~21; 22:13~21; 25:7) 성문에서 올바른 판결이 내려지지 않으면 사회 전체에 죄가 만연케 된다. 가령, 누군가가 자신의 가난한 처지로 인해 억울한 일을 겪게 되었을 때, 그는 성문으로 나아가 성읍의 장로들이 앉은 곳에서 호소한다. 그의 이웃들은 그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그를 불쌍히 여기면서 그를 위해 옳고 그른 것을 증언해준다. 이렇게 행하는 것이 곧 츠다카를 실행하는 것이다. 성읍의 장로들은 이 호소를 듣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결하되, 이 가난한 사람을 억울케 한 사람들의 '외모'-그들의 권세, 부귀 혹은 인맥-나 그들이 가져다주는 뇌물에 현혹되지 않은 채 곧게 판결해야 한다. 이러한 판결이 곧 미슈파트를 행하는 것이며, 이렇게 해서 그 가난한 자의 억울함이 풀어질 때, 그 사회는 미슈파트가 살아있는 사회, 츠다카와 미슈파트가 실행되는 사회, 즉 정의로운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뇌물과 불의로 인해 그 억울함이 풀려지지 않을 때, 억울한 사람들은 이제 그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 외에는 달리 의지할 데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친히 그 부르짖음을 듣고 친히 미슈파트를 세우시며 불의를 징벌하고 책망하며 나아가 때로 그 성읍 전체를 진멸하신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미슈파트와 츠다카의 준수 여부는 그 사회의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통해 정면으로 드러난다.
 
구약의 가난한 자를 대표하는 표현은 고아, 과부, 이방인이다. 이들은 하나님 외에는 달리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며, 하나님은 이들의 보호자이시다.(시 68:5; 140:12)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케 하면 하나님께서 명하신 공의(미슈파트)가 세워지지 못한다.(암 5:12,15) 이렇게 궁핍한 자가 억울케 되는 주된 원인은 뇌물이다.(암 5:12) 성문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분명히 밝히는 사람들-증인이든, 재판장이든, 혹은 억울함을 호소한 사람이든-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사 29:21; 암 5:10) 그들은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리기를 애쓰는데(사 29:21), 이들은 ‘강포한 자’ 혹은 ‘경만한 자’로 불리며, 이들이 사라지게 될 때 ‘겸손한 자’와 ‘빈핍한 자’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한다.(사 29:19~20). 그래서 구약의 많은 본문들에서 미슈파트는 ‘자비’를 뜻하는‘헤세드’와 함께 쓰이곤 한다. “그런즉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헤세드)와 공의(미슈파트)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찌니라"(호 12:6); "…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슥 7:9~10).
 
가난하고 약한 이웃에 대한 긍휼에 기반한 츠다카와 미슈파트의 실행은 단순히 구제사업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가난한 자들을 재물로 도와야할 때가 있지만(charity), 구약의 본문들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그들을 억압과 압박 속에서 건져내는 것,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정의’의 수립이다.(시 146:6~9 사 1:16~17). 그런 점에서 츠다카와 미슈파트의 실행은 그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와 연관되어있음이 분명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정의가 핍박을 받는 자의 구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억압받고, 자기 권리를 빼앗긴, 이른바 압제자의 모든 희생자들을 ‘의인’으로 간주했다. 시편 시인들은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가난한 자들, 피억압자들, 감옥에 갇힌 자들, 과부들, 고아들, 나그네와 같은 ‘고난받는 자’ 혹은 ‘사회적 약자’들을 ‘의인’과 동의적 평행법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산상수훈에는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기업의 소유주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전혀 보호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이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의 편이 되시지 않으면 도저히 그들이 구원받을 길이 없다. 하나님의 가난한 자를 향한 편향적 선택이 바로 여기에 필요한 것이다. 칼빈도 노동자들이 부르짖을 때 그 부르짖음은 하나님의 소리라고 했다.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것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했다.
 
성경에는 인권이란 단어가 따로 없다. 그러나 억압받는 자들이 하나님을 향해 구원을 호소할 때 하나님이 거기에 응답하시는 그 행위가 바로 성서적 인권의 개념이다. 히브리노예들이 애굽에서 극심한 노역에 시달리고 있을 때 그들은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이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응답하신다. 이것이 바로 성서적 인권 개념이다. 하나님께 호소하지 않고는 다른 곳에 호소할 수 없는 자를 향한 응답이 하나님의 인권이고 하나님의 정의이다.
 
다섯째 성서적 정의는 윤리의 문제가 아닌 ‘신앙의 문제(matter of faith)’이다.
 
이스라엘의 왕의 기본적인 임무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러한 체데크와 미슈파트를 실행하는 것이다.(시 72:1~3) 왕이 체데크와 미슈파트를 실행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꺽”는 것이다.(시72:4,12~14, 잠31:8~9, 단4:27) 다윗은 온 이스라엘을 공(미슈파트)과 의(체데크)로 다스렸다.(삼하 8:15)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다윗의 후손에 대한 기대는 체데크와 미슈파트에 의한 통치에 대한 기대이다.(사32:1; 9:7; 16:5; 렘 22:15-16; 23:5; 33:15) 그러므로 미슈파트와 체데크가 행해지지 않는다면 다윗 왕가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무의미하다.(렘 22:30)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사야서에서 메시야가 다스리시는 새로운 세상의 성격에 대해 표현하는데 메시야가 다스리시는 그 나라는 평화의 세상이며 이는 정의와 공평의 통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나타난다.(사 9:6~7; 11:1~5) 하나님의 나라는 ‘체데크와 미슈파트’에 기반한 평화의 세상이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불의를 타협없이 고발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체데크와 미슈파트’인데 이스라엘은 예배와 제사를 종교적 의무의 열매로 여겼다. 예언자들은 체데크와 미슈파트가 없는 제사는 공허한 것이며 백성을 미혹하는 우상숭배와 다름없는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예레미야는 이웃들 사이에 공의(미슈파트)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않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않는 삶이 없는 채 성전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우상숭배와 동일하게 무익하다고 선언하면서(렘7:5~6) 성전에 예배하러 온 이들을 향해 “이곳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는 “무익한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선포했다.(렘 7:4,8) 주의 거룩한 산에 거할 자는 공의를 행하는 자이다.(시 15:2) 이러한 공평과 정의를 행하지 않은 채 드려지는 모든 예배는 하나님 보시기에 역겨운 것이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이요…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 1:11~15) 아모스의 선포는 여호와를 찾는 것이 성소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암 5:4~5) 성문으로 나가서 그 곳에서 공의를 세우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암5:14~15, 미 6:6~8)
 
그러므로 이스라엘 즉 하나님이 부르신 백성의 존재의 의미는 제사하는 백성이 아니라 체데크와 미슈파트, 즉 정의와 공평을 행하는 백성이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삶을 살 때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만민이 하나님께로 나아오며 그 복을 함께 누리게 된다. 이 어구가 특히 이사야서에서 ‘신실한’(hnman) 혹은 이 단어의 변화형과 함께 나타난다는 점은(사1:21,26-27, 11:4-5, 16:5, 28:16-17, 33:5-6) 이 어구가 단순한 사회정의에만 머무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H.G.M. Williamson, Isaiah 1-5 (ICC; London: T & T Clark, 2006), 135.)
 
사실 사회정의 혹은 사회윤리라는 말은 체데크와 미슈파트가 하나님백성의 삶에 있어 가장 본질적인 명령이라는 점을 흐리게 한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신앙적 삶이 있고, 마치 체데크와 미슈파트는 그것에 별도로 부가되는 또 다른 윤리처럼 여기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 5장의 포도원의 노래에서 보듯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에 관한 본문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신 전부는 예배나 제사나 다른 무엇이 아니라 체데크와 미슈파트이다. 체데크와 미슈파트, 정의와 공평을 행하는 삶은 하나님 백성의 사회윤리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하나님백성을 부르신 목적이다.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암 5:24) 하나님 앞에서의 정의는 단순히 자선사업이나 윤리나 도덕의 일이 아닌 바로 신앙의 문제(matter of faith)가 되는 것이다.
 
<박성원, 2012. 7. 2. 광주 오방아카데미 제2기, 제6차 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