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에따 (Pieta)

성 경 / 요한복음 19:25-27 
 
마에 있는 성베드로 성당에 가면 성당 오른편에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조각품이 있습니다. 이 조각품은 삐에따 (Pieta) 란 이름이 붙여진 대작으로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아들 예수를 오른팔로는 머리를 안고 왼팔로는 다리를 감고 그 몸체를 무릎위에 놓고 처절하게 죽은 아들의 얼굴을 슬픈 얼굴로 내려다보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을 조각한 것입니다.

삐에따(Pieta)란 이 조각의 이름은 라틴어에서 온 것으로 효성스런 행동, 즉 효도 (孝道)란 뜻이 있습니다.또한 영어의 경건 (敬虔/Piety)이란 말이 여기에서 나왔고 더 나아가서 믿음이란 말도 이 “삐에따” (Pietas) 란 말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왜 이 죽은 아들이 어머니품에 안겨있는 모습을 효도라든가 믿음을 의미하는 삐에따 (Pieta) 란 이름을 붙혔는지 그 작가의 본래 의도는 명확히 모르겠습니다만 효도(孝道), 효성(孝誠) 이것이 경건(敬虔)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한 개념이라는데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혹은 경건(敬虔)이란 것은 바로 자식과 어머니의 이 거룩한 관계와 상통한다는 사실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것은 죽은 아들을 부여안은 성모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습에서 적어도 두가지를 표현하려 했습니다. 그는 먼저 죽은 아들을 부여안고 있는 어머니와, 죽었으나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아들을 그렸습니다. 그러면서 이 모습에서 죽은 인간을 부여 안고 있는 하나님과, 죽었으나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는 인간의 모습을 함께 표현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Pieta 에서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란 두 영상이 하나로 겹쳐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부모와 자식간의 부등켜 안음과 신적인 하나님과 인간간의 부등켜 안음이 같은 것이란 표현을 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미켈란젤로가 이 조각의 이름을 삐에따(Pieta)라고 지은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효도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것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부모와 자식이 경험하는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이 경험하는 보이지 않는 경험의 실상입니다. 따라서 孝道는 믿음을 증거하는 하나의 형태이며, 믿음은 효도라고 하는 실상의 보이지 않는 모습입니다. 이 말은 孝道란 것은 인간적인 동시에 신적이며, 믿음이란 것은 신적인 동시에 인간적이란 말도 될 것입니다.
 
이제 좀 더 깊이 들어가서 미켈란젤로가 나란히 나타내려고 했던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다. 이 문제는 효도(孝道)의 본질인 동시에 믿음의 본질입니다. 여기에는 효도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중대한 문제가 걸려있습니다.
 
효도란 과연 무엇입니까? 효도란 부모님을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한번도 효도를 한적이 없는 자식입니다. 그는 상당히 어머니를 염려케 했읍니다. 효도란 머리털 끝 하나 상하지 않고 온전히 보존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불효자 중에 불효자입니다. 어머니의 눈앞에서 십자가 형을 받고 죽어간 사형수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효도입니까? 어머니의 고생을 알아주는 것입니까? 어머니에게 맛있는 고기를 사드리는 것입니까? 어머니를 효도 관광시켜 드리는 것입니까? 어머니에게 좋은 선물을 사 드리는 것입니까? 우리는 보통 효도를 이 차원에서 생각합니다. 우리가 부모님께 효도할 때도 그렇고 우리가 부모되어 자식에게 효도를 기대할 때도 그렇습니다. 더 나아가서 효도와 믿음은 비슷한 것이란 관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이 차원에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무조건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 혹은 내가 행복하고 다치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 생각하는 것, 하나님을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매주일 교회에 나오는 것, 하나님에게 좋은 선물을 드리는 마음으로 헌금을 바치는 것으로 믿음을 생각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물론 이 모든 것도 효도의 행실이 되고 믿음의 행실이 됨에는 틀림이 없으나 이것이 믿음과 효도의 본질은 아닐 것입니다. 효도와 믿음의 본질은 십자가에서 끌어내려진 아들을 부여안고 있고, 그 아들은 어머니의 가슴에 안겨있는 이 미켈란젤로의 조각품에서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에서 두가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자식이 있는 자리입니다. 죽은 아들이 어머니의 가슴에 안겨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효도의 본질이란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가슴속에 있어야 합니다. 자식은 살아있다, 죽었다는 사실과 상관없이 어머니의 가슴의 안겨있다는 그 사실이 곧 효도입니다. 살아있건 죽었건 어머니의 가슴을 떠난 자식은 효자일 수 없습니다. 오늘 많은 자식들이 몸은 같이 있어도, 생활비는 보태드려도, 부모님의 마음에서 멀어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음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역으로 죽었건 살았건 어머니 가슴에 안겨 있으면 그것이 곧 효자입니다. 우리말에 부모 앞서서 죽는 자식은 불효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이것을 자식을 먼저 보내는 부모의 못견딜 슬픔을 표현하는 시(詩)적인 표현이지 실상은 아닙니다. 자식이 부모의 가슴에 있다는 자체는 이미 효도입니다. 이 말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보이는 차원이건 보이지 않는 차원이건 나눔이 불가하고 잊혀짐이 불가한 필연적인 관계란 말입니다.
 
성경에 부부가 되는 것은 “둘이 한 몸이 된다”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은 “한 몸이 둘이 되는 것”입니다. 부부는 둘이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둘로 돌아가려는 성향이 있어 이혼이란 것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은 원래 하나가 둘이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둘로 만들어 놓으려해도 하나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아니 둘로 존재 하나 두 존재가운데 한 존재 즉 부모가 죽든지 자식이 죽든지 한 존재가 가시적으로 그 존재의 삶을 마감하면 부모는 자식의 존재속에, 자식은 부모의 존재속에 다시 한 몸으로 합쳐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효도의 본질은 우리자신이 부모의 가슴에 있고 부모가 우리 가슴에 있는 이 자리의 엄숙함 지킴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의 가슴을 떠난 자식은 효자일 수 없고 자식을 가슴에 품고 있지 않는 부모는 부모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인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이야기 할 때 가장 본질적인 의미는 우리는 하나님의 가슴에 안겨있고,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가슴에 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가슴에 안겨있는 것이요, 은총은 하나님이 우리를 안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죄악과 불의와 모순에 의해 그 머리에는 가시로 찔리고 그 옆구리는 창으로 찔려 그 피와 물을 다 쏟고 돌아온 아들을 부여안고 다시 그 따뜻한 어머니의 가슴속에 안아들이는 예수님의 어머니의 모습처럼, 이 세상의 죄악과 불의과 모순에 만신창이가 되고 상처투성이가 된 우리를 당신의 연민의 가슴으로 끌어안으시는 하나님의 그 모습과 그 가슴에 안겨지는 우리의 이 모습이 바로 은총과 믿음이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효도는 이 사랑에 대해 믿음, 즉 신뢰로써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효도의 제일 중요한 면은 부모님의 가슴에 우리가 안기는 행위입니다. 여기에는 이미 불효란 그 씨앗도 배태되지 않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에서 나머지 하나 남은 효도의 의미는 그 아들이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어머니의 품속에 돌아왔다는 사실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고 부른 노래는 아기를 가진 어머니의 기쁨 그 자체였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주세주 하나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
...
주님은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눅1:46-53)
 
우리가 이 찬가를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형편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상당히 고상하고 좋은 가정에서 자라난 때묻지 않는 여성으로 생각하지만, 이 찬가에서 상상되는 모습은 상당히 다릅니다. 그는 권세있는 자들에게 억압을 당했고 보잘 것없는 비천한 사회계급에서 살았고 배가 고프도록 가난했고 부자들의 횡포에 시달리고 여성으로서 더욱 비천한 생애를 살았던 여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잉태하고 하나님이 그를 높혀주셨다는 기쁨에 가득찼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뿐 아기를 낳자마자 헤롯의 칼날을 피해서 애급으로 피난을 해야 했고, 이윽고 고향에 돌아와서도 성전에 아기를 바치러 간 자리에서 간담이 서늘한 이야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누가복음 2:34이하에 보면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성전에 바쳤을 때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역시 기뻐하며 찬양하였으나,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마리아에게 해 줍니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눅2:34-35)
 
마리아는 영문을 몰랐으나 예수님이 성장해서 성전에 다시 갔을 때, 어머니의 보호에서 벗어나 성전에서 없어진 예수님을 다시 찾았을 때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는 대답을 듣고 마리아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마음에 새겼다 했습니다.
 
이 때부터 마리아는 아들이 자기의 아들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아들,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는 사명을 가진 역사의 아들로 생각하였습니다. 그 아들이 그 장엄한 구원의 역사를 마치고 이제 어머니의 가슴에 안긴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찢어지게 가난했고 냉대와 비천함을 당하는 수모의 삶을 그 아들이 높혀주리라는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염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처참한 모습으로 어머니의 가슴에 안겼습니다. 자식이 눈앞에서 처참하게 희생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아야 했던 어머니의 심정을 위로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가난한 사람과 온갖 압박에 신음하는 사람과 근원적인 죄악에 고통당하는 인류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 죽은 이 아들을 안은 어머니는 서서히 그 아들의 죽음을 헛되이 않고 열매맺게 하기 위한 거룩한 단계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마리아뿐아니라 조국을 구원하기 위해 자식을 바친 어머니와 보다 정의롭고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자신을 희생하는 자식을 둔 모든 어머니의 아픔이요 희망일 것입니다. 저는 87년 6월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불꽃을 지피게 된 이한열군의 어머니를 그 이후에 88년에 만난 적이 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써 그 어머니는 아직도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정신을 가다듬고 이야기할 때 처음에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슬픔을 당하고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세상을 한탄했지만, 서서히 자신의 자식이 무엇때문에 죽은 것임을 알고 비로소 그 죽음의 의미가 개인적이거나 가족적인 것이 아닌 역사적인 것임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식이 죽음으로 말하려고 했던 그 의미를 실현하기 위해 안일했던 자신의 삶에서 역사적 소명을 느끼는 삶으로 전환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식을 더욱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앞서간 자식은 불효이지만 그러나 그의 삶의 가치는 그 불효를 민족을 위한 부분적인 효성으로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머리에는 가시관의 자국, 허리에는 굵은 창자국으로, 온 몸은 채찍에 맞은 상처로, 양 손과 발에는 못자국으로 그 몸이 상하여 어머니 품에 안김으로 안일한 세상적 시각에서는 어머니에게 말할 수 없는 불효를 행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뜻인 인류의 구원과 전 인류가 지은 죄의 속죄의 양이 되었다는 차원에서 그의 삶은 더 크게 전 인류를 위한 효성을 한 것입니다.
 
부모도 그렇고 자식도 그러해야 하는데 우리는 효를 거시적인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부모님이 가슴으로 헤아리는 자랑스런 자식의 삶을 살며 그래서 부모의 가슴에 뿌듯한 자식으로 남아있는 것, 그것이 진정한 효도이며 잘 되든지 잘 못 되든지 그 마음이 부모의 가슴을 떠나지 않는 그런 깊은 효도가 우리에게서 우러나와야 할 것입니다.
 
어머니는 불의하고 비겁하게 돌아온 자식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의젓하고 자랑스럽게 돌아오는 자식을 기뻐합니다. 우리 한국의 고전에 나타나는 위대한 어머니들은 모두 자신의 자식들이 자기의 안일을 위해 대사를 놓고 돌아오는 것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부모님에 대한 효도는 자식이 이 땅 위에 온 그 의미를 실현하고 살아가기를 기대하는 그 사명을 다하고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하나님께 대한 효성인 믿음도 이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진리와 의의 사명을 다 하고 의젓한 모습으로 당신의 품에 안길 때 그 때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자랑스럽게 당신 가슴에 깊이 안고 감격해 하실 것입니다. 아멘.
 
<박성원 목사, 1994. 5. 8. 부산진교회, 어버이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