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C에 대한 오해와 바른 이해

한국교회는 WCC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 감리교회, 기장, 성공회, 예장통합 등 WCC 회원교회는 물론 구세군, 복음교회, 정교회, 오순절 교회 등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원교회들은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나 WCC와 WCC총회에 대해 반대하는 교단들도 있다.

한국교회 일부의 WCC에 대한 오해에는 미국의 반공주의자이자 근본주의자인 멕킨타이어의 영향아래 WCC를 용공주의, 자유주의로 몰아세운 것과 70, 80년대 군사정권아래 WCC가 한국의 인권과 민주화에 대해 지원을 한 것을 보고 군사정부가 WCC는 사회선교에만 관심을 두는 정치집단이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한 것 때문에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에 와서는 종교 간의 대화 때문에 다원주의라고 보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비난이 정당한가? 어떤 교회나 기관의 입장을 확인할 때는 그 기관의 공식입장에 근거해야 한다. WCC와 WCC 총회에 대해 교단 안에서의 다양한 신학적 입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교단적 차원에서의 공식적 입장에 근거하여 WCC와 WCC총회를 이해해야한다.
1) “WCC는 세계단일교회를 지향한다.” 이 주장은 사실인가?
WCC는 한국장로교회 분열의 원인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WCC가 세계 단일교회 형성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195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2차 총회에 보고된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의 보고서에는 “친선과 협조를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과거에나 현재에도 참가하여 왔으니 계속 참가하기로 하되, 단일교회를 지향하는 운동에 대하여는 반대하기로” 결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WCC가 세계 단일교회를 지향한다는 것은 당시에도 오해였고 지금도 오해이다. WCC는 1948년 창립총회 이후 1950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릴 WCC 중앙위원회로 하여금 협의회의 성격, 협의회와 회원교회와의 관계등에 대해 연구토록 했다. 토론토 중앙위원회는 이 문제를 연구하여 “토론토 성명서”(Toronto Statement)를 발표했는데 이 문서에는 “WCC가 아닌 것”과 “WCC의 기초가 되는 강령들”에 대해서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그 중 “WCC가 아닌 것”으로 제시된 첫째 조항에 “세계교회협의회는 단일교회(Super Church)도 아니고 결코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고 천명하고 있다. 이 첫 번째 항에 대한 부연설명으로 “세계교회협의회는 단일교회도 아니고, “세계교회도 아니고,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하나의 거룩한 교회(Una Sancta)도 아니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WCC가 추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며 구주로 고백하는 세계에 흩어진 교회들의 교제와 공동선교, 상호협력을 도모하는 일이다.
이와 더불어 주목할 것은 “WCC의 기초가 되는 강령” 제3항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우리가 각각 속한 교단보다 더 크다.”는 부분이다. 세상에 어떤 교단이나 교파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보다 더 큰 것은 없다. 세상의 모든 교회는 각각 보편적 교회이나 홀로 있어선 온전한 보편적 교회가 될 수 없다. 각 교회는 다른 교회와 서로 거룩한 교제로 연결될 때 비로소 온전한 보편적 교회가 되는 것이다. 교회들이 대화하며 교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의 거룩한(Una Sancta)교회를 바라보며 함께 거하고(Stay Together), 함께 기도하고(Pray together), 함께 일하고(Work together), 함께 봉사하며(Serve together), 함께 자라자(Grow together)’는 것이 WCC의 정신이다.
2) “WCC의 신앙고백이 의심스럽다.” 이 주장은 사실인가?
이는 WCC의 기본입장을 모르는 견해이다. WCC는 헌장 1조에서 “세계교회협의회는 성경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며 구주로 고백하며, 성부, 성자, 성령의 영광을 위하여 공동의 소명을 함께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교회들의 교제(Fellowship, Koinonia)이다. ”라고 그 신앙적 근거와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WCC는 같은 헌장에서 “한 믿음, 한 성례전적 교제 안에서의 가시적 일치, 예배와 공동생활, 세상을 향해 함께 증언하고 봉사함으로 교회의 일치를 이루어 세상이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그 목적과 기능을 밝히고 있다. WCC는 이처럼 성경, 예수 그리스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위에 굳게 선 세계교회 연합체이다. WCC가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은 “저희가 다 하나가 되어 세상으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성취하기 위한 세계교회의 공동 노력이다.
WCC에는 기독교를 사칭하는 온갖 단체가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예수를 안 믿고 다른 종교를 믿는 단체도 들어와 있지 않느냐고 극단적인 오해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터무니없다는 것은 WCC의 회원교회가 되는 과정만 보아도 드러난다. WCC의 회원이 되려면 먼저 헌장 1조에 해당하는 교회의 신앙고백을 제출해야 한다. 그러면 중앙위원회 회원영입위원회가 이를 심사하고 통과되면 해당 국가에 이미 회원이 되어 있는 교회에 신청교회에 관한 확인을 요청한다. 만일 입회신청을 한 교회가 정당한 교회가 아니라면 WCC는 결코 그 교회를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앙고백에 있어 정교회는 개신교회보다 더 엄격하다. 만약 WCC의 신앙고백이 의심스럽다면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령의 역사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는 정교회는 어떤 개신교회보다도 먼저 WCC를 탈퇴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총회에서 그 어떤 교회도 WCC의 신앙고백을 의심한 교회는 없다.
3) “WCC는 선교에는 관심이 없다.” 이 주장은 사실인가?
이는 전혀 사실무근이다. 위 헌장에서 볼 수 있듯이 공동의 소명을 함께 성취한다는 것이 곧 선교라는 사실도 명시되어 있지만 1910년 에딘버러에서 선교와 일치를 위해 전 세계교회가 함께 모인 세계선교대회가 바로 에큐메니칼 운동의 직접적 배경인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지금도 WCC안에는 에딘버러 대회의 전통을 이어오는 “선교와 전도위원회”(Commission on World Mission and Evangelism)가 지속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사무국에는 ‘선교와 전도 일치국’이 설치되어 세계교회의 선교와 전도에 대한 지원과 협력, 선교신학의 성찰 등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WCC 선교와 전도위원회는 복음이 시대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증언되어야 하는 지를 지속적으로 연구해 왔다. WCC는 총회와 별도로 총회만큼이나 큰 규모로 진행하는 양대 대회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기독교 교리를 다루는 신앙과 직제 대회이고 다른 하나가 선교를 다루는 선교와 전도 대회이다. 부산총회에서도 새로운 에큐메니칼 선교선언이 채택될 예정이다.
최근에 WCC는 세계복음주의연맹(WEA)과 로마카톨릭교회와 더불어 선교에 대한 행동강령에 합의한 바가 있다. 중요한 점은 선교에 있어 복음주의권과 에큐메니칼권과 로마카톨릭교회까지도 선교강령에 대해 합의했다는 점이다. 혹자는 이 합의가 다른 종교가 강세인 지역에는 선교를 하지 않는다는 입장표명으로 생각하지만 오히려 이 합의에는 복음전도는 어떤 국가나 어떤 문화나 어떤 체제도 막을 수 없다는 입장을 선명하게 하였다.
복음주의권 선교문서인 1974년에 작성된 세계선교에 대한 로잔협약은 “선교란 온 교회(the whole church)로 하여금 온 복음(the whole Gospel)을 온 세계(the whole world)에 증거하게 하는 것” 이라고 정리했는데 이것은 초대 WCC 총무를 역임한 네델란드 신학자 비써 후프트 (Visser't Hooft) 박사가 WCC에서 발표한 선교에 대한 이해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WCC의 통전적 선교(holistic mission)는 오늘날 세계의 복음주의권인 세계복음주의연맹이나 로잔협약 쪽도 수용하고 있는 선교관이다.
4) “WCC는 용공이다.” 이 주장은 타당한가?
시대착오적 말이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WCC 창립총회때 이미 격렬한 논쟁을 한 바 있다. 당시 세계는 자본주의권과 사회주의권으로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더 복음의 정신과 맞느냐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이 때 WCC는 ‘교회의 연합체’이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이념도 지향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복음은 인간의 이념 그 위에 존재한다. 당시 공산주의 권에서 온 교회들과 자본주의 권에서 온 교회 모두가 자신들이 처한 이념적 체계가 서로 달라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공동의 신앙고백 위에 함께 머물기로 (Stay together) 서약했다. 이후 WCC는 복음 이외에 어떤 이념도 편향적으로 지지한 적이 없다. 자본주의도 지지한 적 없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도 지지한 적이 없다. WCC에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교회인가 아닌가하는 점이다.
WCC는 냉전시대 때 공산체제 속에 있는 교회도 회원교회로 받아들였고 함께 교제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어떤 정치체제 속에 있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교회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두고 용공이라고 한다면 그 주장은 복음을 이념 아래에 두는 셈이 된다. 혹자는 WCC가 인종차별철폐운동을 지원했다고 해서 용공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 3:2*)란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또한 WCC가 인민해방운동을 지원했다고 하는데 동서냉전시대에 많은 민족운동들이 이런 오해를 받았었다. 만약 일제치하의 우리 독립운동이 이 시대에 전개되었다면 같은 오해를 받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은 공산체제아래 있던 교회들의 보존을 위해 WCC가 엄청나게 노력했고 그 노력으로 공산권이 무너졌을 때 교회가 다시 부흥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북한 교회가 세계교회와 연결되는데도 WCC가 정치적 장벽을 무릅쓰고 교제를 시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만약 WCC가 용공이란 주장을 한다면 지금 북한교회와 만나며 교제하며 지원하는 한국교회는 모두 용공이 되고 만다. 한국교회는 북한교회를 남한교회와 연결해 준 WCC에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
5) “WCC는 사회선교에만 관심이 있다.” 이 말은 사실인가?
WCC를 전체적으로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WCC가 사회선교를 열심히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WCC에는 선교와 전도, 기독교교육 이외에 거대한 양대 흐름이 있다. 하나는 ‘신앙과 직제’ 흐름으로 신앙과 일치를 강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삶과 일’ 로서 복음의 사회적 증언을 강조하는 측면이다.
한국에는 WCC가 70, 80년대의 정치사회상황과 관련하여 인권과 민주화에 연대했기 때문에 WCC의 사회선교적 측면만 부각되어 WCC는 사회선교에만 관심이 있다고 알려진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WCC안에 이 두 흐름이 팽팽하게 공존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한국교회가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사이에서 갈등했듯이 이 갈등과 견제가 지금도 WCC속에 상존하고 있다.
사회선교에도 두 흐름이 존재한다. 하나는 인권이나 민주화와 같은 정치적 증언이고 이것과 대등하게 큰 또 하나의 사회선교는 봉사(Diakonia)이다. WCC의 사회선교에는 봉사의 면도 강하게 포함되어 있다. WCC 창설직후 WCC의 대부분의 사회선교는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유럽사회와 유럽교회의 재건에 집중되었다. 이 에큐메니칼 독려로 오늘 유럽교회에서의 봉사는 세계적으로 큰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WCC 총회를 계기로 WCC의 신앙과 영성, 선교와 봉사 부분에도 이해의 폭을 넓혀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양쪽 날개 모두를 통전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WCC의 사회적 증언과 관련하여 꼭 알아야 할 부분은 WCC의 사회적 증언은 신앙적 기반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WCC의 사회적 증언은 사회참여 차원이 아니고 복음증언의 차원이다. WCC의 사회참여는 복음에 대한 신실성 때문에 이루어진다. 인종주의에 대한 WCC의 입장이 그 한 예이다. 1954년 제2차 에반스톤 총회에서는 인종주의와 식민주의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총회는 “인종, 피부색, 종족을 근거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복음과 교회의 본질에 위배된다.”고 선언하고 모든 회원교회가 자신들의 삶과 사회 안에 존재하는 인종차별을 철폐하라고 촉구했다. 나치주의에 대한 독일 고백교회의 바르멘선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이외의 어떤 주권도 인정할 수 없는 독일교회의 신앙고백 행동이었고 백인과 흑인을 구분하고 격리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분리정책(Apartheid)에 대한 저항은 그리스도 안에 어떤 인종차별도 있을 수 없다는 복음에 대한 고백이었다. WCC의 사회증언은 교회의 사회참여, 정치참여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대한 복음의 선포, 신앙의 증언으로 이해해야 한다.
6) “WCC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이다.” 이는 올바른 이해인가?
솔직히 말하면 WCC의 신학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WCC는 회원교회들의 다양한 신학이 서로 대화하고 조정하고 공통의 신학적 견해를 찾아가는 문자 그대로 ‘협의체’(council)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한다면 WCC 고유의 신학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면 WCC 안에는 여러 신학노선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자유주의 신학도 존재하고 보수주의적 신학도 존재한다. 정교회의 신학은 한국의 보수신학보다도 훨씬 더 보수적이고 회원교회 중에는 복음주의교회, 성령운동인 오순절 교회도 상당히 참여하고 있다. WCC의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 일변도로 비춰진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우리나라에는 WCC가 주로 인권이나 민주화 등 사회적 증언 쪽으로만 알려져서 그렇게 비춰진 면이 있다.
WCC의 신학적 성향이 자유주의 신학으로 비친 이유는 구원은 전통적인 인간 영혼구원 만에 머물지 않고 온 복음(the whole Gospel)은 인간 영혼의 구원에서부터 시작하여 통전적 인간(the whole human beings)의 구원으로 넓혀서 이해하기 때문인 것 같다. 온 복음이란 인종차별로부터의 구원, 성차별로부터의 구원, 장애인에 대한 편견으로부터의 구원, 정치적 탄압으로부터의 자유 등 인간의 사회적 구원까지도 포함하고 이런 이해는 세계의 복음주의교회들도 공감하고 있는 바다.
우리 한국교회에 친숙하지 않는 WCC 신학은 동방정교회의 신학이다. 동방정교회의 신학은 우리 한국 개신교회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다. 신앙과 직제 위원회를 중심으로 집중 논의되고 있는 신학은 이런 사회참여의 신학보다도 오늘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선교적 위탁을 받은 사도적 교회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성령의 교회가 될 수 있는지, 오늘 세계에 흩어진 교회가 어떻게 한 하나님, 한 그리스도, 한 성령을 고백하며 한 세례공동체로서 한 주님에 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지,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의 신학적 근거가 무엇인지에 더욱 집중되어 있다. 이번 총회를 통해 한국교회도 세계 교회의 신학과 접하고 교제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7) “WCC는 가시적 일치를 주장한다.” 여기에 대한 진실은 무엇인가?
WCC가 가시적 일치를 추구한다는 것을 많이 오해하고 있다. WCC가 가시적 일치를 추구하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만약 세계의 모든 교회가 분열을 극복하고 구조적 일치를 이룬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WCC가 추구하는 그 가시적 일치란 외형적 일치 혹은 구조적 일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WCC가 추구하는 가시적 일치란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란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인 것 같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도 하나가 되어 하나이신 하나님 안에 있길 원하셨고 그 목적은 세상으로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선교와 일치의 부름은 바로 에큐메니칼 운동의 모태가 된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의 비전이기도 했다. WCC가 추구하는 가시적 일치는 이런 선교적 목적 때문이지 결코 세계 교회의 외형적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WCC가 항상 강조하는 일치는 다양성속의 일치(unity in diversity)이다. 앞서서 언급한 WCC 토론토 문서 “WCC 기초가 되는 강령들” 8항에 밝힌바 “WCC 회원교회는 서로 영적 관계 속에 들어가 서로 배우며 서로 도와주어 그리스도의 몸을 굳건히 세우고 교회의 삶이 갱신되도록” 하는 것인데 이를 1항에서 “WCC 회원교회들은 대화를 하든지 협력을 하든지 교회의 공동증언을 하든지 모든 것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거룩한 머리라는 공동의 인식에 근거해서 해야 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세계교회는 다양하지만 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다양한 지체임 강조하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WCC가 추구하는 가시적 일치이다.
8) “WCC는 다원주의이다.” 여기에 대한 진실은 무엇인가?
WCC는 종교간의 교리를 섞은 적이 한 번도 없다. WCC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의 교회를 표방하는 가시적 일치라 할지라도 교리적 차원에서 현재로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 이유는 WCC밖에 있는 로마 카톨릭교회도 그렇지만 WCC안에 있는 양대 교회, 즉 정교회와 개신교회도 결코 서로의 교리를 섞을 수 없다는 입장 때문에 교리적 일치에 이르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WCC를 통해 세계교회가 에큐메니칼 운동을 하면서도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WCC 회원교회가 한 자리에서 성만찬을 나누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에 대한 이해도 달라서 같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가 성만찬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데 하물며 종교 간의 교리를 섞는 일이 가능하겠는가? 이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WCC는 종교 간의 대화와 협력을 중요하게 여긴다.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에 있을 때 천도교, 불교, 기독교가 민족의 독립을 위해 함께 독립선언을 했듯이 정의와 평화, 그리고 인류의 화해를 위한 인류공동의 과제 때문에 종교 간의 대화와 협력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종교 간의 협력과 다원주의는 다르다.
WCC가 종교간의 대화를 해 온 데에는 역사적 필요의 배경이 있다. 에큐메니칼운동에서 종교 간의 대화가 맨 처음에 거론한 것은 WCC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국제선교협의회가 1928년 예루살렘에서 대회를 가졌을 때였다. 당시 세계에는 세속화의 조짐이 일기 시작했는데 종교가 사회를 향해 신앙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일이 필요하다고 제기되었다. 종교 간의 대화가 WCC의 주요 과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1961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WCC 제3차 총회 때였다. 세계 주요 종교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아시아에 오면서 아시아의 종교를 접하고는 타 종교에 대한 이해할 필요를 느꼈다. 이는 타종교의 가르침 앞에 기독교는 무엇인지를 더 깊이 이해하려는 열망에서였다. 1975년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5차 총회에는 타종교 지도자를 초청하였다. 그러나 막상 타종교 지도자를 초청한 상황에서 많은 총대들이 대화에 대해 주저하기 시작하였다. 혹시 대화를 하다가 기독교정체성을 잃어버리지는 않게 될까 하는 두려움에서였다. 그래서 총회는 WCC가 종교간의 대화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작성하도록 결의하였다. 이 모두는 종교 간의 만남과 대화를 가지되 원칙 없이 하지 말고 기독교정체성을 지키려는 원칙을 가지고 대화에 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 다음에 종교 간의 대화가 절실해 진 것은 9.11 사태이후이다. 이때부터는 종교 간의 대화보다는 종교간의 협력을 강조하게 되었다.
대화는 선교의 시작이며 영성에 대한 추구의 공동여정이다. 그러나 대화를 통해 때로는 깊은 진리를 접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여인과 우물가에서 가진 대화는 사마리아여인으로 하여금 영생의 의미에 대해 깨닫는 대화의 시초였다. 선교사들의 선교는 항상 비 기독교권과의 대화로부터 시작되었다. WCC는 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화를 통해 기독교신앙의 진수를 더욱 명확히 이해하기도 하고 타종교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이해의 폭이 넓어질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종교적 교리를 넘어선 인류의 공동의 문제에 대해 공동의 대처를 하는데, 그것도 신앙공동체의 차원에서 협력을 하는 모습은 세속사회가 종교에 대해 깊은 신뢰를 하게 하는데 선교적 도움이 되게 할 것이다.  

박성원 (영남신학대학교 교수, WCC 중앙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