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이 다시 모으리라


성 경 / 미가서 2:12-13

우리가 성서를 읽으면 성서를 관통하는 뚜렷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함께 살아가도록 운명지어진 사람들이 때로는 흩어지고 때로는 다시 모이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은 이 세상에 만물을 지으시고 거기에다 사람을 지으시고 모두가 함께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을 보기싫게 생각하셔서 배필을 만들어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대와 꿈은 당신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꿈은 창세기는 3장을 넘기지 못하고 이 함께 살아야 할 존재들이 분리되고 흩어지는 경험을 하게 됨으로써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범죄함으로 인해 하나님과 떨어지고, 그에게 부여된 아름다운 기쁨의 동산 에덴을 떠나야 하고, 함께 도우며 살도록 지어진 두 부부는 서로가 서로에게 죄의 책임을 전가하며 갈라지고 모든 관계들이 산산조각이 납니다. 이것을 성경은 죄의 시작이요 인간의 불행과 비극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한 어머니의 배를 통해서 태어난 형제 가인과 아벨이 싸워서 형이 아우를 죽이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저는 가끔 이런 의문을 가져봅니다. 창세기의 기사에 보면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카인의 제사는 받으시지 않았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카인이 매우 섭섭하여 동생에 대한 분노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카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느냐? 카인이 살인하게 되는 것은 사실 하나님이 처음부터 편파적이었기 때문에 이해가 가는 일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대해 신학자들은 보통 하나님이 어떤 제물은 받으시고 어떤 제물은 안받으시는 절대자유를 갖고 계신다는 말로 설명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뚜렷한 이유없이 한 쪽 제사만을 받고 다른 쪽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는 것 자체는 정의롭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카인은 곡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동물을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에 대해 구약학자들은 이것을 곡물로 제사를 드리는 족속과 동물로 제사를 드리는 족속의 갈등이라고 했습니다. 이 배경을 생각하면서 곰곰히 들여다보면 이미 형제간에 시기하고 경쟁하는 그 인간의 분열과 갈등을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깊히 지적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모든 인간의 범죄의식을 설명하듯이 카인과 아벨의 이 형제간의 갈등은 우리 모든 인간의 형제간의 갈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카인이 살인을 했느니, 아벨이 희생을 당했느니 하는 문제를 따지기 전에 하나님은 과연 카인이 아벨을 죽이시기를 원했겠는가? 오히려 두 형제가 서로 경쟁하지 않고 내 제사만이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고, 곡물과 동물의 제물을 나란히 놓고 카인은 아벨을 위하여 아벨은 카인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더라면 형제간에 싸우는 이 비극적인 갈등은 없었을 것이 아닌가? 두 형제는 하나님께 은혜받기 위해 같이 제물을 드리고 같이 제사를 드렸어야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형제의 갈등, 집안의 갈등, 종족의 갈등, 민족의 갈등은 성서속에서 계속 불행한 이야기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열두아들 중 형들이 동생 요셉을 미워해서 애굽에 팔아먹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부터 시작한 일은 차치하고서라도 후일 왕국이 세워졌을 때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의 왕조역사를 보면, 끊임없이 같은 가족간에 같은 민족간에 서로를 죽이고 대결하는 불행이 연속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이 서로 분열하고 시기하는 역사가 거듭 반복이 되는 것을 자세히 보면서 우리는 어떤 일정한 공식같은 것을 하나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인간이 분열하는 것은 모두 인간의 죄에 기인하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징벌에 의한 것이란 일정한 공식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고 조상에게 약속하신 가나안땅에 들어와서 살게 되고 난 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애정은 남달랐습니다. 그들은 애굽이란 강대국에서 노예생활을 했던 고난의 민족이었기에 가나안 땅에 인도한 다음에 하나님은 다시는 서로 노예를 만들지 말며, 왕은 백성을 억압하지 말며, 서로 불쌍한 민족끼리 도우며 살되 과거 노예생활로 고난받던 것을 생각해서 사회에서 가장 연약하고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 배우지 못한 자들을 돌보며 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로 시작된 왕조는 다윗을 거쳐서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삼대가 지나지 못해서 왕은 백성을 억압하기 시작하였고 백성들과 더불어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계약을 어기고 이방신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방신을 섬겼다는 것은 다른 종교를 섬기기 시작했다는 의미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야웨 하나님에게 진지하지 않겠다는 표시입니다. 하나님이 이에 대해 진노를 하신 것입니다. 결국 솔로몬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려고 할 때 하나님은 나이 많으신 대신들을 통해서 부왕의 철권정치를 수정하도록 일러주었읍니다. 그러나 강권정치에 눈이 먼 왕과 젊은 신하들의 욕심에 의해 아버지 솔로몬 보다 더 철권정치를 펴며 결국 그 일로 나라는 분단이 되고 맙니다.

오늘 읽은 말씀의 주인공인 미가는 바로 이렇게 갈라진 나라 중 북쪽 이스라엘에서 예언을 하던 예언자입니다. 그의 예언이 몹씨 심상치 않는 것임을 우리는 그 뒤에 이스라엘 민족이 겪은 사실을 통해 예견해 볼 수 있습니다. 미가의 예언은 이렇습니다.

야곱아, 내가 기어이 너희를 다시 모으리라.
살아 남은 이스라엘 백성을
기어이 모아 오리라.
사람만 보여도 술렁거리는 양떼들을
한 돌담 안에 모으듯 하리라.

기어이 너희를 다시 모으리라는 말은 너희는 멸망하여 흩어지리라 라는 전제를 안고 있습니다. 미가가 예언을 하던 그 당시 이스라엘은 나라가 분단이 되어 있었는데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왕은 백성을 억압하며 부자는 가난한 자를 착취하며 힘있는 자는 연약한 자들에게 마음대로 행패를 부리며 사법부, 행정부, 입법부 어느 것 하나 정의롭게 움직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신 민족이 이렇듯 하나님의 뜻과 역행하고 있을 때 그들을 치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민족의 멸망, 다시 강대국의 식민지가 되게 하는 심판을 통해 치료하시려 했습니다. 우리가 예언서라고 알고 있는 구약의 거의 모든 부분은 바로 하나님이 강대국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심판하시겠다는 메시지입니다.

결국 남과 북이 모두 다 멸망합니다. 강대국의 포로가 됩니다. 여기에 대해 우리는 상당히 주의를 해야 합니다. 민족이 흩어지고 갈라지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축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것이고 거기에서 다시 돌아와야 할 회개의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나라는 분단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수많은 외적의 침입에서 보호해 주시고 특별히 일제의 식민지치하에서 해방을 시켜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진정한 해방을 가져오기는 커녕 서로 싸우고 서로 기득권을 소유하려 하고 형제가 형제를 이기려고 하는 틈바구니 속에서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분단은 강대국의 패권주의에 의해 일어난 것입니다만 거기에는 우리 자신이 서로를 감싸고 용납하고 이해하고 높여주는 대신 우리끼리 싸우고 정복하는 그 갈등을 강대국이 적절하게 이용을 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점을 참회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40년이상이 지나는 동안 남과 북이 서로가 당한 비극적인 처지를 두고 진지하게 반성하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것 보다는, 항상 서로 헐뜻는 일에 발벗고 나서왔고 서로를 비난하는 것이 곧 자기쪽의 애국인 것으로 간주해 왔습니다. 그러나 바로 형제끼리 서로 헐뜯는 그것이 강대국에게 늘 분단상태를 유지하도록 철저하게 이용되어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것은 한 개인이라도 인생을 4, 50년을 살면 불혹의 나이가 되고 좌우를 분별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데 한 민족과 역사가 분단 50년의 세월을 지내면서도 아직도 우리는 분단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작금의 핵문제를 둘러싼 남북의 공방을 보면 아직도 우리 나라는 남한이든지 북한이든지 제대로 철이 든 나이가 못됩니다. 아직도 골목대장처럼 소아병적인 사고와 발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서글픈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복음을 믿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판단을 해야 하느냐? 하나님의 궁극적 목표는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하고 하나가 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결국 만물이 화해하고 하나가 되는 평화의 나라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골로새서 1:19 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 이 땅위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신 그 이유는 곧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하나님 안에서 만물이 화목하게 되게 하기 위하여 희생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결국 화목을 이루지 못한 상태는 아직 불완전한 상태이며 그것은 하나님이 기쁨을 누리시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가 되게 하고 원수된 것이 다시 화목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집요한 하나님의 뜻이며 꿈이냐 하는 것을 우리는 다시 미가서의 예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야곱아, 내가 기어이 너희를 다시 모으리라.
살아 남은 이스라엘 백성을 기어이 모아 오리라.
사람만 보여도 술렁거리는 양떼들을
한 돌담안에 모으듯 하리라.
내가 기어이 너희를 다시 모으리라
한 목장에서 풀 뜻기듯 하리라.

기어이 갈라진 동족을 함께 모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뿔뿔이 흩어졌던 양떼들을 한 목장 안에 다시 모아 풀을 뜯게 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집요하게 계속 됩니다.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모아져서 살아나는 이야기가 나오는 에스겔 36장, 37장에 가면 그 메시지가 주어진 배경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 남과 북이 다시 하나가 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마른 뼈의 이야기가 다음에 곧 이어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말씀을 내리시기를 너는 막대기 두 개를 가져와서 한 막대기에는 “유다와 그와 한 편이 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쓰고 다른 막대기 하나에는 “ 에브라임의 막대기와 한 편이 된 이스라엘의 온 족속”리라고 쓰고 그 두 막대기를 붙여서 한 막대기로 만들어 둘이 하나가 되게 잡고 있어라. 우리 상황으로 말하면 막대기 하나에는 “남한과 한 편이 된 북쪽의 백성”이라고 쓰고 다른 막대기 하나에는 “북한과 한 편이 된 남쪽의 백성”이라고 썼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 그게 무엇이냐고 묻거든 그것은 하나님이 갈라진 두 민족을 하나가 되게 하시는 일이라고 해라.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가 되게 한다.”는 하나님의 뜻임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갈라진 형제가, 원수된 형제가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은 우리 인간의 편의나 우리의 이기적인 뜻 이 아니라 만물을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갈라진 민족이 하나되고 분열된 공동체가 모아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지극히 복음적이며 구원사적인 사실은 형제가 서로 얼싸안고 그의 허물과 고난을 덮어주고 위로하면서 하나가 되는 것이지 서로 비난하면서는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으로써는 도저히 취할 수 없는 인간의 형체 그것도 종의 형체를 지시지 않았습니까? 세리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과연 세리와 죄인과 한 편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구원과 사랑과 화목은 바로 여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집요하리만큼 강하여 내가 기어이 너희를 다시 불러 모르리라고 하십니다. 이 통일의 과제 뒤에 하나님의 뜻이 강하게 있음을 우리가 알아차립시다. 이를 위해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하나되게 하시고 화목하게 하시려는 뜻을 충실히 쫓아서,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와 축복을 누리는 그 날을 우리가 앞당겨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다. 분단은 하나님의 징벌이고 하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기록한 시편의 말씀에도 우리의 귀를 기울이십시다. 시편 133 편에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가지 내림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같도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느니 곧 영생이로다.
아 멘.

<박성원 목사 1994. 6. 19. 부산진교회 주일설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