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1 - 창조: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성

본문: 창세기 1:1-31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coln)은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나의 학교도, 나의 스승도, 나의 도서관도 성서였다.”

성서의 위대한 능력을 증언하는 말입니다. 한국장로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Underwood)목사와 감리교 최초의 선교사인 아펜젤러(Appenzeller)가 1885년 4월 5일 부활절날 역사적으로 한국에 첫발을 디뎠을 때, 그들의 손에는 이미 한국말로 번역된 성서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 성서는 이수정이란 분이 일본에서 번역한 것인데 그 뒷이야기가 감동적입니다. 이수정씨는 원래 한국에 농업기술을 도입하기위해 일본에 건너갔습니다. 그리하여 일본농학자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벽에 걸린 산상수훈 족자를 보고는 감명을 받아 일본 농학자에게 그 출처를 물었습니다. 일본 농학자로부터 그 산상수훈의 출처가 성서란 것을 알고는 한문성서를 빌려다가 넋을 잃고 단숨에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서 그의 사상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와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농업이전에 성서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서를 번역하였고, 최초의 선교사가 들어올 때 그 손에 들고 올 수 있게 하였습니다.
 
성서는 개인의 삶과 인격뿐만 아니라 민족과 국가, 시대를 열고 깨우치는 보고(寶庫)임을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특히 우리 개신교회는 성서를 교회의 유일한 권위로 여기며 신앙과 삶의 표준으로 여기기 때문에 성서를 깊이 이해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수요일은 창세기부터 성서연구를 아주 심도 있게 해 나가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구약 66권이 다 중요한 책이지만 창세기를 먼저 공부하는 그 이유는 오늘 저녁에 말씀드리는 가운데 자연히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는 원어로 된 구약성서에는 제목이 따로 붙어있지 않습니다만 헬라어 번역본에는 창세기의 히브리어 첫 단어 “tyviareb ray-sheeth' : 브레쉬트(Breshit)란 말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Genesis” 창세기라고 이름을 붙여 놓았습니다. 창세기란 말은 탄생, 시작이란 말인데 이 말 때문에 사실 창세기를 이해하는데 많은 혼돈을 불러일으키고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를 들면 주일학교 때는 교회 열심히 다니고 신앙이 참 좋았던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면 신앙에 대해 회의를 가지기 시작합니다. 어렸을 때 교회에 다닐 때는 우주는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믿어왔는데, 고등학교에 가니까 우주는 수억만 년 전에 어떤 폭발에 의해서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지구가 형성되고 인간이 지구상에 태어나는데 까지는 6일이 아닌 수억만 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과학적 지식을 배우게 되니까 과학적으로 제시하는 증거가 옳다고 생각되어 성서의 창조론에 대해 회의를 가지고 따라서 신앙자체에도 회의를 가지게 됩니다. 또 진화론이니 창조론이니 하면서 과학자들 사이에도 논쟁이 일고 있어서 이것에 의해 혼돈은 더욱 증폭이 됩니다.
 
분명한 것은 무조건적이라 할 만큼 독실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창세기는 그저 신화 정도로 생각하여 받아들이고, 실제 우주의 생성이론에 대해서는 과학을 믿는 이중논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편의상 그렇게 할 뿐이지 어떤 해결책은 아닙니다. 문제는 창세기의 목적을 잘못 이해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우선 현대과학적 사고로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은 분들에게 창세기에는 과학적으로 모순되는 이야기라는 생각을 꽤 합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의 기사를 바탕으로 우주의 배치도를 그린다면 그림의 한 가운데 지구가 평평한 땅처럼 펼쳐져 있고 그 위에는 대형 텐트와 같은 막이 형성되어 있고 그 위에는 물이 고여 있고 그 위에는 해와 달과 별이 배치되어 있고 밑으로는 음부, 즉 지옥이 있는 것으로 그림을 그릴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우주 전체의 중심은 지구입니다. 그러나 현대과학이 그리는 우주배치도를 보면 태양계의 경우 태양을 중심으로 수많은 별이 돌고 있는데 지구도 그 별중의 하나로 되어 있으며, 이 우주에는 거대한 우주의 그릇으로 갤럭시(Galaxy)란 것이 있는데 그 엄청난 태양계도 갤럭시의 한 구성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창세기의 창조기사는 현대과학이론과 상당히 다른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금 더 세밀한 예를 들어봅시다. 창세기 1:3-5에 보면 낮과 밤이 태양이 창조되기 전에 먼저 창조됩니다. 그리고 태양과 달은 1:16에 가서야 창조됩니다. 현대과학으로 보면 낮과 밤은 해에 의해서 좌우되므로 창세기의 기사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논리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식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부모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창세기를 우주의 창조의 물리적인 순서, 즉 과학적 이론으로 파악하면 여러 가지 과학적으로 증명해야 될 문제가 많고, 하나님의 창조가 세상의 진화론과 이론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최근에 들어와서 과학자들 사이에서 창조과학회란 것이 조직이 되어 진화론에 대항해 창조론을 펼치고 있지만 전 세계의 과학계에서 창조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는 극소수의 크리스챤 과학자들로서 주로 미국과 한국에 있고 대부분은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저도 창조론에 대하여 미국의 학자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는데 여러 가지 수긍이 가는 면도 많으나 이론적으로는 비약이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과학적 이론으로서의 창조론을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저는 진화론까지도 창조론에 포함된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포괄적인 이론적 설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성서의 창세기는 단순히 창조의 과학적 이론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주장하려는 성서의 의미를 이해해야지만 창세기의 기사 전체가 확 뚫리고 혼돈과 모순이 없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창세기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다.
 
이것을 위해서 조금 전에 창세기의 혼돈점의 예로 인용한 바로 그 귀절을 가지고 풀어 보려고 합니다. 여기에는 창세기의 구조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있고 신앙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열쇠가 있습니다. 창세기는 먼저 낮과 밤을 이야기하고 그것의 근원이 되는 해와 달은 뒤에 언급했습니다. 이것은 순서가 뒤에서 앞으로, 결과에서 원인을 유추해 내고 있습니다.
 
구약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창세기가 쓰여진 연대는 대략 BC 6세기 즉, 예수님 오시기 약 550년전에 창세기가 쓰여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지금부터 약 2,500년전에 수억만 년 전의 그것도 인간이 생기기 전의 우주의 창조이야기를 여기에 기록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나운서가 마치 중계방송을 하듯이 하나가 생겨나면 기록하고, 또 하나가 생겨나면 기록한 것이 아니라 현재 눈앞에 보이는 것을 보고서 그 근원으로 올라가서 이 모든 창조물의 근원을 밝히는 작업인 것입니다.
 
이것은 결과를 보고 그 원인을 유추해내는 그런 과학적인 이론이 아니라 모든 것의 근원을 밝히는 문제입니다. 성서의 창조론은 근원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고백입니다. 낮과 밤이 지금 있는데 이 근원에는 해와 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기자의 관심은 언제, 무엇이, 어떤 경로로 생겨났는가를 찾는 물리적 관심이나 또는 보도적 관심, 역사적 관심이 아니라 모든 우주의 저 근본 뿌리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철학적이고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관심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기자가 창세기의 첫말을 뭐라고 쓴 줄 아십니까? “태초에” 영어는 “In the Beginning”이라고 했습니다. 더 이상 그 전에는 아무것도 없는 아주 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즉 모든 창조물의 근원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의 메시지는 창조론의 과학적 이론이 아니라 이 세상,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은 하나님이라는 신학적 혹은 신앙고백적 선언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모든 것을 하나님과 관계 지어 보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포함한 모든 것, 모든 것의 근원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의 가장 핵심적인 관심은 세상과 하나님의 관계성입니다. 세상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 멋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의 근원에도, 정신의 근원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도, 우리의 고통 속에도, 우리의 기쁨 속에도, 시장에서도, 길거리에서도, 우리의 정치적 사건 속에서도, 우리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도, 경제구조 속에서도 -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은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고 그 근원이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우리 교회당안에는 수많은 전기불과 전기기구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가 전원, 즉 전기의 근원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모든 삶의 부분들은 무조건 다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이 창세기의 신앙선언입니다.
 
창세기는 11장까지는 우주의 큰 덩치를 논하지만 12장부터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같은 개인들이 나오고 그들은 곧 이스라엘 민족의 근원으로 연결이 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가만히 읽어보면 그가 갈데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애굽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가족과 함께 이동하는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데 중요한 것은 그 이동자체가 아니고 이 모든 이동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는 이것을 고백하려는 것이고 이것을 만천하에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의 신앙을 고백할 때는 창조론이다, 진화론이다라는 지엽적이고 논리적 토론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에 계신다는 고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신앙을 가진 사람은 우리의 모든 일상사의 근원에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를 보아낼 줄 아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더 나아가서 신문을 받아보았을 때 그 신문의 모든 정치면, 사회면, 문화면의 기사를 하나님과의 관계성하에서 읽어내는 안목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의 모든 일상사에 나타나는 일들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읽어낼 줄 아는 창조 신앙적 시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존재의 근원은 과학도 경제도 운명도 자기자신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박성원 목사, 1993. 3. 17 부산진교회 수요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