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포괄적인 평가

성 경 / 창세기 21: 8-19

김일성 사후의 요즈음 우리 나라는 마치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 갈등과 같은 그런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한쪽에서는 북한에 조문단을 파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고 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과거 유신시대 때의 북한관과 같은 그런 극단적인 반응들을 보이고 있습니다.



학생들 중에는 주체사상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수가 적지 않고, 서강대학교 박 홍 총장은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안보회의가 아닌 대학총장회의에서 안기부장의 직책을 능가하는 정도로 누구의 배후에는 누가 있고 학생들은 북의 지령을 받아 적화통일을 기도하는 그런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보고를 듣고 있노라면 지금 우리 대학이 북한의 대남적화전진기지로 활용되고 있고 간첩들이 대학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활동하는 양 섬뜩한 느낌이 듭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분단 50여년만에 남북 정상이 만나고 이를 통해 반세기동안의 반목과 갈등이 획기적으로 해소되기를 기대했었는데 순식간에 마치 태풍이 몰아치듯이 날씨와는 반대로 차거운 냉기류가 한반도에 흐르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역사적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고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끌어안을 것은 끌어 안아야 하는지 그 정확한 판단기준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은 한갖 고대 이스라엘 가정에서 일어난 일상사이긴 하지만 이런 정황속에서 우리가 어떤 판단기준을 가져야 하는지를 암시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의 귀중한 아들 이삭의 돌잔치날 벌어진 사건입니다. 이삭은 약속의 아들로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기쁨이자 온 동네의 기쁨이어서 아브라함이 그를 위해 아주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이 귀한 날에 뜻하지 않는 일이 벌어졌습니다.하갈의 소생, 즉 이삭의 이복형인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여기에서 희롱했다는 것이 동생을 때린 것인지, 놀려준 것인지, 아니면 함께 논 것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이스마엘이 테어나고 이삭이 테어나기까지의 세월이 흐른 것을 대략 계산해 보면 이스마엘이 지금 약 16살, 내지 17살정도 되었다고 추측이 되는데 이 16살짜기 소년이 과연 이제 돌을 지내는 아기에게 어떤 희롱을 했는지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9절 본문에 보면 사라가 보니까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혹시 사라의 주관적인 판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스마엘은 동생을 그저 데리고 놀고 있었는데 마치 사라의 눈에는 그가 이삭을 괴롭히는 것처럼 보인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사라는 평소부터 이스마엘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져왔고 그 감정이 이삭의 돌잔칫날 폭발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라와 하갈간에는 이전에도 한번 긴장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16장에 나와있는데 그 때는 사라가 아기를 낳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사라의 주선으로 그렇게 된 것이지만 하갈이 아기를 낳고 으시대는 모습이 보이자 아브라함에게 은근히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그래도 상당히 부드러웠습니다. 그저 아브라함에게 그런 사실을 알리고 당신이 잘 판단해 보시라는 정도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상당히 입장이 다릅니다. 10절에 보면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가서 하갈과 그 소생을 내어쫓으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마 지난번 하고는 입장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는 자기에게는 아직 아들이 없는 상태이고 비록 여종의 몸으로 나긴 했으나 아브라함의 대를 이을 자손이 났으니 자기 입지가 그리 확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사라는 엄연히 아들을 낳았고 자기는 정부인이며 그리고 이 아들은 하나님의 약속한 아들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사라가 큰 소리를 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도 갑니다.
 
그러면 왜 사라가 이스마엘을 쫓아내려고 했을까? 9절에 있는대로 단순히 이삭을 희롱하기 때문이었을까? 그 이유는 12절에 더 명백히 나와 있습니다. 진짜 이유는 이스마엘이 그대로 집에 있게 되면 결국은 이스마엘이 맏아들이므로 나중에 상속권이 이스마엘에게로 갈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라는 이스마엘이 희롱하는 것을 트집을 잡아 내친김에 아주 집에서 몰아내어 버리기로 결심하였는지 모릅니다.
 
이 사라의 강력한 요구앞에서 번민하는 것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11절에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여기 그 아들은 이스마엘입니다 -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했습니다. 아마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의 고통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자가 남자보다도 훨씬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는 인상을 여기에서도 받습니다. 사라는 물론 자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서 그럴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내어좇는 일이 그렇게 마음에 걸려 가슴 아파했으나 사라는 냉정하게 쫓아내도록 일을 몰아갑니다. 조금 모진 그런 면도 보입니다.
 
여기에서 흥미있는 것은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내어좇아야 하는 입장에 처하여 괴로워하는 아브라함에게 해방감을 주셨습니다.
 
12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이니라.”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자비하심을 갖고 있지만 그 자비하심으로 일을 무질서하게는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괴로워하는 심정을 먼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러길래 그 일로 너무 괴로워하지 말라고 아브라함을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그 위로가 곧 이스마엘의 존재에 대해 근본적인 변경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마엘은 아무리 먼저 나고 아브라함에게서 났다 하더라도, 즉 그가 아무리 잘 했다 하더라도 엄연히 그는 하나님의 약속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깊이 위로하고 나중에 보면 그 하갈과 이스마엘을 극진히 보살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질서에 관한 한 분명한 선을 그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하는대로 하라고 하셨고 그 이유는 이삭을 통해 나는 씨만이 네 후손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일단 혼선이 온 아브라함을 이렇게 정리하였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비본질적인 일 때문에 본질을 그르치거나 본질을 왜곡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비본질적인 것도 충분히 고려 대상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이 본질의 의도를 그르치게 할 만큼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죄인들을 용서하는 것은 역사의 수정까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는 분명히 사실대로 존재하는 것이고 그 속에 있는 인간의 고통을 고려하면서 그 괴로움의 짐을 벗겨주는 것은 자비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역사의 길에 대해서는 아주 분명하게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역사의 길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때문에 거기에서 짓밟히는 인권침해를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다음에 보면 하나님은 쫓겨하는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그렇게 다정하게 따뜻하게 보살펴 주실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위로를 듣고 난 뒤에 비로소 방향을 잡고 일찌기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했습니다. 아마 아브하람의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을 것입니다. 자기 손수 먹을 것을 장만해서 내 보내는 이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좇겨나 사막을 방황하다가 가죽부대의 물이 다하고 이스마엘이 목이말라 기진맥진하고 마침내 죽을 것같자 자식이 눈 앞에서 목말라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여 대성통곡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그 아이의 우는 소리를 들으시고 천사를 보내 하갈에게 아주 지극한 도움을 주십니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내가 들었다고 하시고 하갈의 눈을 밝혀서 그 주위에 샘물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하시고 그 물로 갈증을 채우게 하시고 생명을 건지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서는 그 이스마엘을 통해서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면 위에서는 그렇게 분명히 역사의 매듭을 짓고서 여기에서는 그 소외되어 있는 이 사람들에게 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이렇게 세밀하게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라고 부르는데 하나님은 정의로우시지만 동시에 자비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정의를 세우면서도 결코 그 정의 때문에 자비를 거두는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이 정의와 자비가 어떻게 함수관계를 이루어야 하느냐에 따라 그가 아무리 크리스챤이라 하더라도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만 머무느냐 하나님의 판단의 차원에까지 성숙할 수 있느냐가 달려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라와 아브라함 두 사람은 모두 인간적 차원의 한계를 들어냅니다. 첫째, 사라는 타당한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 속에는 자기의 감정이 많이 개입이 되어 있고 아주 무자비한 그런 모습을 보입니다.
 
둘째, 아브라함은 인정이 있고 아주 포용성이 있긴 하지만 아주 심한 편향성이 존재합니다. 결국 사라와 아브라함이 보인 태도는 흑백론입니다. 흑백론은 반드시 다른 한편을 희생시켜야 하는 그런 논리입니다. 여기에 비해서 하나님은 아주 객관적이면서 그러나 쫓겨나가야 하는 하갈과 이스마엘의 살길을 세심하게 보살펴주는 그런 처리를 하심으로서 그 어떤 것도 배타되지 않는 포괄성을 보이셨습니다. 이 원리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요즈음 김일성 사후에 우리 남한에서 보이는 극단적인 두 대립적 견해는 모두 타당하지만 인간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사라형의 반응입니다. 마치 김일성의 죽음과 더불어 북한 전체가 지구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고 이 기회를 통해 북한이 아주 붕괴되어 버리기를 기대하는 그런 기대는 약간은 하갈과 이스마엘에 대해 사라가 가진 반응에 비슷한 것 같습니다. 물론 사라의 판단에는 일리가 있었지만 그의 반응은 너무 주관적이었다는데 문제가 있고 자비함이 없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아브라함형의 반응입니다. 아브라함은 마치 북한에 조문단을 보내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처럼 상당히 인도주의적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도주의와 역사에 대한 평가는 혼돈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문제는 바로 그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반응은 편향적이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김일성에 대한 객관적 역사평가는 유보하고 오히려 김일성을 찬양하는 그런 분위기는 역사의 객관화와 배치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의 견해는 항상 대립적인 일에 한쪽의 편만을 들어야 하는 우리 인간의 한계와는 다른 아주 포괄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깊이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역사의 정도가 무엇인지를 지적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죽지 않게 하고 살게끔 그 길을 마련해 주신 것처럼 그들이 생을 포기하거나 빼앗기지 않고 살도록 모든 자비의 배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그 이유는 이스마엘은 인간적 동기에 의해 생겨나긴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도 아브라함의 아들이며 크게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사태를 포괄적으로 보고 인간 감정에 얽힌 역사평가가 아닌 객관적인 역사평가를 위한 성서적인 시각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박성원 목사, 부산진교회 주일설교, 1994. 7. 24 김일성 사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