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수학

성 경 / 고린도전서 13:8-13

오늘 읽은 이 사랑의 시에서 우리는 이런 수학공식을 하나 산출해 낼 수 있습니다.
 
방언 - 사랑 = 0
천사의 말 - 사랑 = 0
예언의 능력 - 사랑 = 0
믿음 - 사랑 = 0
자선 - 사랑 = 0
희생 - 사랑 = 0
 

이것을 저는 사랑의 수학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습니다. 이 사랑의 수학공식을 성경은 자세히 언급했습니다. 우리가 방언을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천사의 말, 아무리 아름다운 말을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울리는 꽹과리처럼 공허할 것이요. 아무리 좋은 설교를 하고 전도를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자기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안되고 남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줄 정도로 희생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랑의 능력에 대해 길게 설명한 뒤에 이렇게 다시 말합니다. 예언이나 방언이나 남을 설득하는 설교나 산을 옮길만한 믿은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 이런 것들은 어린아이에 해당한다면 사랑은 장성한 사람에 해당하고,또 위의 것들이 부분에 해당한다면 사랑은 완전에 해당한다고 했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믿음이 뜨거워져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비한 신앙의 경험을 하여 방언을 하고 예언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놀랄만한 믿음을 나타내 보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를 희생하기까지 남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에는 말이 많고 시끄러웠습니다. 인간적인 경쟁이 있고 자기의 믿음이나 방언 예언 등의 영적 경험이 다른 사람들 보다 우월하다는 자만심이 있었고 교회의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서로 파당을 지어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바울사도는 괴로웠습니다. 이 귀한 믿음,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과 해방의 은혜를 받고서도 그것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여전히 인간적인 한계를 드러내는 현실에 대해 마음이 아팠습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다른 곳으로 전도하러 간 사이에 이런 지경이 된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긴 편지를 쓰면서 결국 너희들이 아무리 믿음을 이야기하고 예언의 능력을 이야기하고 희생을 하고 봉사를 한다는, 다시 말해서 아무리 영적인 경험을 심오하게 했다 하더라도 사랑을 잃어버린 그런 영적 경험은 전혀 무의미하다고 아주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논조가 격렬하다는 것을 우리는 어디에서 읽을 수 있느냐 하면 마지막 결론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 중에 제 1은 사랑이라. 바울이 믿음을 얼마나 강조했습니까?
 
바울신학에서 믿음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강조한 믿음조차도 사랑의 하위 개념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까? 바울은 이 모든 고난을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소망을 이야기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소망에 근거하여 그 고난을 이겨 나가도록 독려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랑의 하위 개념이었습니다. 그렇게도 중요한 이 두 가지를 많이 강조하였는데도 여기에서 사랑이 없으면 그 모든 것들도 헛것이고, 사랑은 믿음과 소망보다 선위 가치이며 믿음과 소망은 사라지지만 사랑은 영원하다는 궁극적인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신앙행위와 그리스도인의 인격은 물론 이 세상 전체가 성숙되어져 가야하는 궁극적 가치이고 목표입니다.
 
이 사도바울의 말을 오늘의 상황에서 옮겨 볼까요. 오늘 우리는 많은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근대에 와서 상당히 많은 개념들이 우리의 역사철학을 지배했습니다. 이를테면 식민지시대가 난무하고 해방의 열망이 무르익을 때는 “자유”란 개념이 부각되었습니다. 계층간에 차별이 심하게 이루어지고 있을 때는 “평등”이란 개념이 그렇게 소중했습니다. 불의가 판을 치고 많은 사람들이 불의한 억압에 시달릴 때는 “정의”의 개념이 중요했습니다. 세계가 냉전의 시대를 맞이했을 때에는 평화가 그렇게 중요했습니다. 전체주의, 독재권력이 세상을 지배할 때는 “민주”란 말이 우리에겐 절실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도 결국 사랑이 그 동기가 되어야 하고 사랑을 향해 승화되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가 불완전하며 사랑이 없는 평화도 불완전합니다. 사랑이 없는 인권도 완전치 않으며 사랑이 없는 민주도 부분적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 통일을 많이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통일은 온데 같데 없고 다시 남북이 대결하도록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것을 보면 그 동안 우리는 통일을 이야기하긴 했으나 사랑이 없는 통일은 이야기해 왔다는 결과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 동안 이야기해왔던 통일은 진심이 결여된 통일이었고 그렇게 때문에 언제든지 깨어질 수 있는 통일이었습니다. 즉 사랑이 없는 통일은 완전한 것이 못됩니다.
 
많은 경우 일치, 하나됨을 이야기하는데 일치도 사랑을 향해 가는 일치여야지 억지로 하나되게 하는 구조적인 통합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지향하는 일치는 화해를 통한 일치인데 이것은 결국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화해를 말하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결과가 일치인 것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총도 결국은 인간과 인간이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이 더 나아가서 인간과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사랑하게 되기 위한 작업이 곧 구원입니다.
 
누가복음 10장의 말씀은 아무리 새기고 새겨도 지루하지 않는 말씀입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다 지켰느냐고 물었습니다. 율법사가 다 지켰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율법의 강령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주신 비유가 무엇입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것은 제사장도 아니고 레위인도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의 촛점은 이 사마리아 사람이 불행을 당한 이웃에게 행한 사랑의 행위에 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이란 종교적 가치도 불행을 당한 이웃에게 행하는 사랑에 촛점을 맞추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그 불행을 당한 이웃에 대한 사랑의 행위를 하는 것에다 촛점을 맞추었습니다. 영생을 얻고자 찾아온 그 율법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는 대답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힘(power)에 관해서 연구한 어떤 심리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변하게 하는 힘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강압의 힘입니다. 치자들이 백성을 다스릴 때 가장 손쉽게 쓰는 힘이 곧 이 힘입니다. 공안정국이란 것은 바로 이 강압의 힘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야만적이며 가장 유치한 방법입니다. 또 이 강압에 의해 다스려지는 백성도 가장 무지한 것입니다. 그 다음의 힘은 설득의 힘입니다. 설득력입니다. 설득력은 사실 강제적 의도가 상당히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설득은 어떤 의미에서 속임수에 해당합니다. 그럴싸한 논리로 막 설득하여 상대가 그 꼬임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나중에 지나고 보면 설득을 당해서 동의를 한 것이지 자기의 의지로 동의한 것이 아닌 경우가 허다합니다. 요즈음 우리는 이 언론(mass media)이라는 것을 통해 대중적으로 설득을 당하는 생활을 많이 합니다. 텔레비죤 선전을 통해 우리가 설득당하고 꼭 필요치 않는 것도 구매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약을 막 선전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그 약을 안 사먹으면 금방 병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필요치 않는데도 약을 사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언론의 설득에 의해 어제의 진실이 오늘은 어리석음이 되고 어제의 불의가 오늘의 정의가 되는 그런 경험을 많이 합니다. 자 이렇게 볼 때 강제력이나 설득력은 그 힘은 강하나 진실한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그 심리학자가 제시하는 가장 강한 힘은 사랑의 힘이란 것입니다. 실제 나폴레온이 헬레나 섬에 유배 가서 자기의 생을 비참하게 마감하게 되었을 때 여기에 대해 깊이 묵상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는 군대와 막강한 무력으로도 유럽조차 제패하지 못했는데, 예수는 사랑이라는 것 하나 가지고 세계를 제패했다는 겁니다. 사랑의 힘만이 진실하고 또 진실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이야기이겠습니다. 자녀를 키울 때도 우리는 강압의 힘, 권위의 힘을 먼저 씁니다. 아이들이 무슨 잘못된 일을 할 때 부모는 화가 나기도 하고 단단히 혼을 내어 주어야 되겠다고 생각하여 꾸지람을 합니다.
 
“다음부터는 절대로 안그러겠다고 대답해라!” 억지로 항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오래 유효한 것이 아니고 진정한 항복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특히 사춘기로 접어들면 이런 식의 방법은 아이들이 냉소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가능하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장 오랜 후에 영원히 자녀들이 부모의 말씀을 기억하고 혹시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려 할 때 작용하는 힘은 부모가 자신들을 극진히 사랑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랑의 힘은 정말 금방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유명한 “나와 너”란 철학개념을 창출해서 세계의 사상계에 영향을 준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인간세계의 문제를 “나”와 “너”가 잘 관계하지 못하는데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나”와 “너”의 관계가 잘못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슬픔이 생기고 소외가 생기고 정복이 생기고 억압이 생기고 반항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마틴 부버는 말하기를 “나”라는 존재가 너라는 존재를 만날 때 항상 “나”가 주체가 되고 “너”는 객체로 두는데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나”가 주체가 되고 “너”를 객체로 두면 항상 “나”가 중심이기 때문에 내 중심으로 사고를 해서 정의로운 관계가 형성될 수 없고 또 내가 객체로 둔 너가 자기입장에서 사고를 할 때는 너가 주체가 되고 나는 객체가 되 기 때문에 나가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버는 “나”도 주체가 되고 “너”도 주체가 되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나고 너는 너인데 어떻게 그런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하는데 거기에 대해 부버는 나와 너 사이의 이 “와”의 자리에 사랑이 자리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것이 바로 나와 너를 둘 다 주체로 관계하게 하는 매개체란 것입니다.
 
상당히 철학적인 분석을 동반한 이야기입니다만 결국 사랑이 모든 인간의 갈등과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열쇠란 점에는 같은 이야기가 됩니다.
 
이 사랑은 일찌기 동양 고전에서도 중요하게 취급되었습니다. 공자가 태어나기전 중국의 지혜를 공급했던 묵자는 그의 兼愛 : 즉 서로사랑 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하면서 인간관계에서 시작하여 사회적 관계 국가간의 관계까지 이 사랑이 그 바른 관계를 좌우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후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곧 반드시 들에서 전쟁을 하게 된다.
 
집안 가장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곧 반드시 서로 빼앗게 된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곧 반드시 서로 해치게 된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곧 은혜롭거나 충성스럽지 않게 된다.
 
아버지와 자식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곧 자애롭지 못하게 되며 효도를 잃게 된다.
 
형과 아우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곧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강한 자가 반드시 약한 자를 잡아 누르고
부한 자가 반드시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며
귀한 사람들은 반드시 천한 사람들에게
오만하고 사기꾼들은 반드시
어리석은 사람들을 속이게 될 것이다.
 
모든 천하의 재난과 찬탈과 원한이 일어나는 까닭은
서로 사랑하지 않는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겪는 모든 인간적인 갈등, 사회적인 균열, 서로 미워하고 멸시하고 질시하고 억압하고 따라서 정의가 무너지고 존엄성이 무너지고 그래서 결국 전쟁을 하고 싸워야 하게 되는 근저에는 이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는 간단한 원인분석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고린도전서 13정이 말한 대로 오래 참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고, 사욕을 품지 않고,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고,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어주고 모든 것을 기대하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 힘이기 때문에 이런 사랑으로서는 그런 대립과 갈등과 억압이 불가능합니다.
성경은 더 나아가서 사랑은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나시는 계시이며 사랑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우리가 하나님을 보는 실체라고 했습니다. 요한 1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요한 1서의 이 두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서로 사랑을 통해서 완성되며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비결은 사랑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로 다가가는 길에 해당하고 소망은 하나님께 다가간 것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잡는 밧줄 같은 것이라면 사랑은 지금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있는 상태를 말하며 그 분과 더불어 기쁨을 누리는 것이 되며 하나님의 모든 것을 우리 삶속에 꽃피우는 신앙의 꽃봉오리에 해당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므로써 이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실제로 누리며 즐기는 아름답게 피어난 꽃봉오리 같은 삶을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박성원 목사, 부산진교회 1994. 7. 31. 주일설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