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 감사 찬양

성 경 / 시편107:1-15.                                                  
        
      우리 교회는 지난 해 우리 민족 감사의 절기인 추석을 중심으로 감사절을 지켰습니다.추석을 감사절로 지키자는 이야기는 지난 해에도 말씀드렸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지켜오던 감사절이 사실상 미국교회가 지키는 절기를 선교사들로부터 그대로 받아서 지켜왔었는데 이제 100년을 넘어선 우리 한국교회가 성숙된 자세로 우리의 감사절을 찾아서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요구가 많이 나온데 대해 부응하기 위함입니다.



      실험적으로 추석을 감사절로 지키는 몇몇 한국교회가 있었지만 역사와 전통을 가진 교회가 본격적으로 시도하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이번 장로회신학대학의 교육잡지도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지키자는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만 우리 교회는 선구적인 교회로서 지난해에 처음 추석을 전후로 감사절을 지켰습니다. 왜 추석을 감사절로 지키느냐에 대해서는 이제 9월 25일에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내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도 추석을 전후하여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목회계획을 당회에서 논의하게 되었는데 참으로 뜻은 좋으나 현실적인 문제가 몇몇 있다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이번 추석이 예년과 달리 9월 중순으로 당겨졌기 때문에 도무지 추수감사절의 기분이 안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곡식이 충분히 익고 풍성하게 수확되는 기쁨으로 해야 되는데 아직 추수도 하지 않았으니 추수감사절의 기분이 안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추석은 햇곡식을 거두어 차례를 지내는 절기이고 또 구약에서도 감사는 추수를 모두 끝낸 다음이 아니라 항상 맏물, 즉 제일 처음 거두는 햇곡식으로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렸으니 신학적으로는 오히려 추석이 더 감사제에 맞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 이유는 더욱 현실적인 이유인데 그것은 우리 교회의 예산으로 볼 때 추수감사절의 헌금이 년중 가장 중요하고, 만약 예산에 미달될 때는 교회재정에 어려움을 갖게 되니까 뜻은 좋지만 현실적으로 좀 어려움이 있지 않나 고민했습니다.실제 작년에도 추수감사절헌금이 예산 4천5백만원에 4천3백6만5천원이 나옴으로서 조금 미달되었었는데 물론 반대로 성탄절 헌금은 예산보다 훨씬 많았습니다만 어쨌든 올해는 너무 절기가 이르므로 조금 더 염려가 많이 되었습니다.

          이와같은 현실적인 염려를 하다가 당회는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내는 목적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지 헌금이 목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런 염려는 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일을 하며 동시에 모처럼 개척자적인 결단을 우리 교회가 하였고 다른 교회도 좋은 의견이라고 기대하니 조금 이르더라도 그대로 지키고 앞으로는 아주 이렇게 못을 박고 더 변경하지 말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이번에 논의를 하면서 저는 중요한 과제를 하나 찾게 되었습니다. 감사 란 과연 무엇인가? 기독교인에게 감사는 어느 정도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래서 오늘은 다가 올 감사절을 준비하는 일환으로 기독교의 감사 란 과연 무엇인가를 한번 깊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흔히 교회에서 헌금이야기를 하면 참 듣기 안좋다는 말을 하는데 혹시 오늘 헌금이야기가 삽입될 때 그런 기분을 드렸다면 용서하시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감사 의 의미를 한번 숙고해보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독교 하면 우리 기독교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떠올리는 개념이 사랑 입니다. 누구나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우리 나라 중고등학교 사회과목 교과서에도 여러 종교를 소개하면서 기독교를 박애(博愛)의 종교 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 이 기독교의 최고 덕목이고 간판격의 윤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명령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기 때문에 사랑이 우리 기독교안에서는 아주 중요한 개념인 것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또 율법과 예언의 대강령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으니 사랑이 기독교의 최고 덕목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조금 다른 측면이 발견됩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덕목을 수평으로 늘어놓고 순서를 매겨본다면 아마 사랑은 중간쯤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의 덕목은 사랑을 전후로 해서 좌측으로 한 면이 있고 그 다음에 우측으로 해서 다른 한 면이 있는데, 이 좌측의 덕목이 사랑을 축으로 해서 그 우측의 덕목으로 승화된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제가 최근에 묵상한 기독교윤리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좌측은 무엇이고, 사랑의 우측은 무엇이며 거기에서 사랑이란 어떤 역할을 하느냐를 규명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로마서 5:3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을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단어들을 가만히 보면 우리의 삶 속에서 만나는 여러가지 환란과 어려움을 극복하는 신앙적인 덕목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환란을 받지만 그 환란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즐거워하게 된다, 왜냐하면 환란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을 소망을 이루게 해 주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닥쳐오는 온갖 환란과 어려움을 극복하며 이겨나가는 힘겨운 신앙의 투쟁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가지는 가치의 기초적인 부분은 환란을 만났을 때 절망하거나, 지난 주일 트로얀 목사님이 말씀하신대로 포기하거나 하지 않고 더욱 적극적이 되어서 환란을 오히려 즐거워하게 되는 힘입니다. 신앙은 평소에는 내 속에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다가 우리가 환란을 만났을 때 신비하게 그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 신앙의 힘이 환란을 대처하게 해 나가고, 심지어 환란을 적극적으로 해석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려는 연단으로까지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내로 환란을 이겨내고, 지난 5일 고 김종수 장로님이 죽음의 문턱에서도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고 묵상하신 욥기의 말씀대로 연단을 거쳐 희망의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환란은 결국 인내를 거쳐 우리를 새롭게 연단하고 그래서 큰 소망을 품게 하는 것입니다. 환란에 처한 사람이 소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결과론적으로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5장의 그 다음에 연속되는 말씀을 보면 이제 사랑이 나옵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가 신앙 속에서 이렇게 환란을 딛고 일어서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이기게 하시고 경건치 못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 일로 인해서 가능해 졌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이란 것입니다. 앞에서의 환란과 인내와 연단과 소망이 의미하는 것은 절망과 고통속에 사는 우리 인생이 그 고통과 환란을 이기는 힘겨운 싸움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제 이 싸움이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좌편에서 우편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유도에 보면 업어치기 라는 기술이 있는데 업어치기는 적이 되는 상대편을 등에 업어서 앞으로 내다 꽂는 동작입니다. 우리의 모든 환란과 고통과 죄악과 심지어 심판의 두려움이 이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랑으로 완전히 역전이 되어서 이제는 기쁨과 희열과 의롭다함과 구원의 영역으로 완전히 바뀌어 지는 그런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인생의 여러가지 시험과 힘겨운 싸움을 하는데 사용되는 좌편에 있는 기독교의 덕목을 열거하였고, 사랑이 이 모든 것을 희망적인 쪽으로 넘기는 지랫대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사랑의 우편에 있는 덕목은 무엇이겠습니까? 고통과 힘겨운 투쟁이 없는,희망적이고 기쁨이 충만하고 고통이 없는 그 기독교의 덕목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이것을 세 가지로 봅니다. 즉 기쁨, 감사, 그리고 찬양입니다.

     구원을 받게 되면 제일 첫번째 나타나는 반응이 기쁨일 것입니다.학생이 온갖 고생을 다해서 입학시험에 합격하게 되면 제일 처음 나타내는 반응이 기쁨입니다.기분좋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타나는 현상이 감사입니다. 상 받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가 수상자로 지명되면 기쁨의 눈물을 먼저 흘리고 그 다음에는 오늘 이 순간이 있게 해 주신 주위의 여러분에 대한 감사의 말을 합니다.

     그리고는 찬양의 환희가 따릅니다. 여기에서 정리를 일단 해 보면 기독교 덕목가운데 최고의 덕목이 뭐냐 하면 찬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칼빈은 인간의 주된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 영광을 돌리는 것이 곧 찬양의 행위입니다. 찬양은 아직도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성가대가 찬양할 때 마음속에 근심을 가지고 있으면 음악을 하는 것이지 찬양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의 심판과 절망과 고통의 근심이 완전히 물러가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내 마음에 근심의 찌꺼기도 없을 때 그 때 비로소 찬양이 됩니다.

     그런데 이 찬양이 어디에서 솟아나오느냐 하면 감사에서 솟아 나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면 찬양이 나오지 않습니다. 찬양은 기쁨과 감사의 결과입니다. 감사는 찬양의 발로입니다. 우리 인간이 기쁨과 감사와 찬양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여기에는 더 이상 근심도 염려도 환란도 고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죄악이 극복되고 모든 근심이 정복된 그 이후에 비로소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이런 감사가 우리에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을 읽었습니다만 여러분 시편을 어떻게 보십니까? 시편에서 가장 인상깊고 강렬하게 닥아오는 두 개념이 있는데 하나는 여호와의 은혜에 감사하라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것입니다. 시편을 읽어보면 수많은 인간의 고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질병, 인간의 배신, 억울함, 치명적 질병, 죽음, 억압, 비난, 실패,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고통과 환란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환란과 고통을 넘어서서 최후의 승리의 노래는 감사와 찬양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계산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만큼 내게 수확의 은혜를 주셨으니 내가 이만큼 추수감사헌금을 한다는 그런 산술적인 덕목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생의 고뇌와 고통과 환란과 심판과 죄악을 이긴 후의 승리의 노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스위스의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기독교의 윤리는 감은(感恩) 의 윤리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기억하십시다! 우리의 최종적인 덕목은 기쁨과 감사와 찬양입니다. 이 기쁨의 생활, 감사의 생활, 찬양의 생활이 우리의 삶을 가장 윤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감사가 생활에 주는 지혜에 얽힌 이야기를 한토막 하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미국의 거부중의 한 사람이었던 랭크라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이 분이 사업에 큰 어려움을 맞게 되었습니다. 자나깨나 걱정이 앞서고 그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걱정과 근심을 없애는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매일같이 걱정을 하면서 피를 말리기 보다는 일주일에 하루만 걱정하고 나머지 날은 편안히 지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걱정상자(Worry Box)라는 것을 하나 만들어서 매일 매일 걱정거리를 적고 그 상자에 던져두었다가 수요일 하루를 택해서 몽땅 한꺼번에 걱정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주일을 걱정꺼리 쪽지만 써넣고 전혀 걱정을 하지 않다가 수요일날 몽땅 꺼내 보면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걱정꺼리를 쓰던 월요일에는 굉장히 고민스러운 걱정이었는데 수요일에 쪽지를 읽어보니 별것 아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어제의 걱정이 오늘은 문제가 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속담에 세월이 약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해결이 안되고 적극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잠시 잊을 뿐 걱정꺼리는 여전히 거기에 있습니다.

          정말 걱정을 없애는 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감사하는 길입니다. 감사하게 되면 걱정도 불평도 부족도 미움도 다 사라집니다. 저는 요즈음 우리가 건강하게 살고 평화롭게 살려면 감사의 순간을 늘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점점 절실하게 느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런 영적인 바탕으로 이번 추수감사절을 정말 의미깊게 보내십시다. 이런 감사를 드렸을 때 우리의 삶이 정말 기쁨과 축제의 삶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추수감사절은 인생의 모든 고뇌를 이기고 승리하는 감사절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박성원 목사, 부산진교회, 1994. 9. 11. 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