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2-1 : 창조는 하나님의 창조원리


창세기 2:1-3

                지난 시간에 우리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가 단순히 창조의 과학적 증거를 넘어서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선언하는 고백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태초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의 모든 삶도 하나님의 창조와 그의 섭리와 연결되어 있고, 하나님은 지금도 그 창조를 우리의 현실 속에서 계속하고 계신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이 하나님의 창조의 의미를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문제를 풀려고 하면 우리는 창세기가 쓰여진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난번 강해에서 창세기는 예수님이 오시기 550여 년 전쯤에 기록되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창세기가 쓰여진 배경을 잘 알기 위해서는 창세기가 쓰여진 시기, 즉 예수님 오시기 550년 전쯤의 시대상을 아는 것이 중요한데 그 때의 상황은 유대민족이 바벨론에 정복을 당해서 바벨론포로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출애굽을 하여 가난안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민족은 주전 1000년경에 사울왕을 태조로하여 왕국을 형성하였습니다. 다윗-솔로몬으로 이어지는 동안 정치,경제,외교,문화 모든 면에서 안정되었으나 솔로몬이 죽은 이후 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됩니다. 분단된 나라는 방향을 잡지 못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이방신을 섬기며 방황하다가 북 이스라엘이 망하고 주전 6세기에는 남쪽 유다마저 바벨론에 의해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 자체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수도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지식인과 정치인, 제사장등 종교지도자들은 모조리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는 동안 이방나라에서 말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합니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부녀자들은 바벨론군인에 의해 겁탈당하고 바벨론 군대의 횡포에 무참하게 시달렸습니다. 이것은 무질서 그대로였습니다. 이 비관적인 삶이 잘 나타난 곳이 시편 137편입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여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참을 수 없이 슬펐던 사실은 그들이 사랑했던 하나님의 이름이 치욕을 당하는 수모였습니다. 자신들이야 자기네 잘못으로 고생하지만 자기네 잘못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수모를 당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마치 나는 수모를 당하더라도 내 부모를 누가 욕하면 참을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하고 탄식했드랬습니다. 이 같은 바벨론 포로생활 속에서 이 창세기의 “천지는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엄청난 선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해 보도록 합시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는 동안 그들은 철저한 회개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편안할 때는 하나님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지만 못 나을 질병에 걸렸다거나 사업이 망한다거나 하는 위기를 당하면 회개를 하듯이 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했던 회개운동은 눈물만 흘리고 가슴만 친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했던 회개운동은 세 가지 차원에서 전개되었습니다.

                첫째 그들은 그들의 역사를 새로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축복하신다고 하셨던 이 나라가 완전히 이방인에 의해서 망하고 보니 뭔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한 직후부터 나라가 망할 때까지의 500년 역사를 다시 세밀히 살펴보면서 그 역사가 하나님 보시기에 옳았는가 하는 시각에서 새로 정리했습니다. 이렇게 새로 쓴 역사가 바로 구약성경에 실린 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상하, 열왕기상입니다. 인간이 평가하는 역사가 아닌 하나님이 보시는 역사에 관한 평가였습니다.

                두번째 했던 회개작업은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하나님에게 충실하기 위한 예배개혁이었습니다. 예배개혁은 3가지 차원에서 전개되었습니다.

                1. 유대민족은 예루살렘 성전 외에는 제사를 드릴 수 없기 때문에 바벨론에서는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사는 드릴 수 없으나 유대인들이 사는 곳마다 회당을 세우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예배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회당예배가 바로 오늘 기독교의 예배 모델이 된 것입니다.

                2. 둘째 할례제도를 강화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분명히 의식하기 위해 육체적으로 그것을 표시함으로 자의식을 분명히 가지도록 하였습니다.

                3. 셋째는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계속 인간적인 일에만 몰두하면 하나님을 잊고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안식일에는 전혀 인간적인 일은 하지 않고 하나님에게만 생각을 집중시켜서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장치했습니다.

                바로 이 안식일의 강화가 창세기 1장의 배경이 됩니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시면서 창세기를 다시 한 번 잘 보시면 창세기 1장의 창조이야기가 그저 우연히 6일 동안 창조되고 제 7일에 쉰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구조 속에서 구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의 기원, 만들어진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섭리구조속에 있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선언하게 된 정치사회적인 배경입니다. 아까 잠깐 언급을 하였습니다만 이 창세기의 기사는 바벨론의 횡포에 시달리던 포로시절에 쓰여졌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바벨론 왕이 인간을 함부로 다루고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창조질서까지, 하나님까지도 조롱하는 것을 보고는 이 세상은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 선언합니다. 인간의 무질서를 보면서 하나님의 질서를 선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두에 두고 창세기 1장 서두를 다시 한 번 보십시다. 창세기 1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 다음에 말하기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 하고 나옵니다. 땅이 혼돈하다는 이 말은  WhTo, to'-hoo} : 토후, Chaos(카오스)란 말인데 혼돈, 황폐화, 무질서함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해 우주란 말인 코스모스(cosmos)는 ‘토후’란 말의 반대인 질서란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세상을 완전히 뒤죽박죽만드는 혼돈의 상황에 대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심으로 질서가 부여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주는 하나님의 손에 있으며 시작도 즉 알파도, 끝도 즉 오메가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인간이 함부로 무질서하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무질서에 대한 하나님의 질서의 선언입니다.

                오늘도 인간의 생명이 짓밟히고 인권이 유린되는 것을 하나님이 보시면서 “이 인간은 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한 것인데...” 하는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과거 물고문을 하여 사람을 죽임으로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일이 있었고, 아직도 잡히지 않고 있는 이근안이라는 고문기술자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고문하여 죽였으니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 그 질서를 무질서화한 셈입니다.

                창조신앙은 이처럼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이 하는 모든 횡포에 대해 인간을 꾸짖고 하나님에게로 그 근원을 다시 물어보게 하는 근원적인 도전입니다. 창조신앙을 똑바로 가지면 인간이 인간을 억압할 수 없고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환경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져 가고 교회도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간은 세상을 개발한다는 미명아래 자연을 마음대로 유린해 왔는데 그 유린의 대가를 인간이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다. 집집마다 생수를 가져다 먹어야 하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고, 밝은 햇빛을 볼 수 없도록 공해를 만들어 낸 것은 인간입니다. 다시 말하면 공해는 하나님이 질서 있게 만들어 놓으신 것을 인간이 무질서하게 만드는 혼돈의 작업이요, 창조신앙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운동은 단순히 자연보호운동이 아니라 이 창세기에 입각해 보면 창조신앙운동입니다. 우리가 이 창조신앙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이 창세기의 하나님의 창조 원칙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창조신앙은 태고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여러분의 안방, 부엌에서 당장 부딪치는 신앙문제이고 공장에서 부딪치는 신앙문제입니다. 인권유린, 생명의 파괴,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시작하여 환경파괴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파괴하는데까지 연결되는 신앙의 문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 창조신앙의 폭을 넓혀서 우리 온 삶의 영역에 이 신앙의 실천이 반영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인간과 모든 피조물을 이롭게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박성원 목사, 1993. 6.14 부산진교회 수요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