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성경: 출애급기 20:1-6

오늘은 종교개혁 477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이 날은 사실 마틴 루터가 구 동독지역인 비텐베르그(Wittenberg)성당에 95개 토론조항을 써 붙임으로서 종교개혁 논쟁에 불을 당긴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유럽에서 종교개혁운동은 몇 백년 동안 계속된 거대한 운동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지난 9월 우리 교회에 와서 한 달간 머물렀던 트로얀 교수가 자주 언급한 체코의 존 후쓰(John Huss), 그 이전에는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가 루터보다 100년 전에 이미 종교개혁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100년 후에 루터에 의해 본격적인 운동으로 발전했고, 그 다음에는 스위스에서 쯔빙글리와 칼빈에 의해 추진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종교개혁은 한 마디로 교회와 사회의 정화작업이었습니다. 무엇인가 죄로 오염된 인간의 내면에서 부터 시작해서 교회의 신앙, 교회의 구조, 사회의 구조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정신적인 차원에서 사회의 제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정화를 시도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 역사 가운데서 영혼에서부터 사회구조에까지 가장 광범위한 변화를 일으킨 그야말로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이 종교개혁이 중세와 근대를 역사에서 나누는 기점이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이처럼 광범위한 것이어서 제한된 시간에 모두를 다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에 오늘은 그 중에 하나의 문제에 촛점을 맞추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종교개혁의 주된 관심중의 하나는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True church of Christ)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은 잘못된 교회이며, 어떤 교회는 참된 교회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었던 참된 교회의 기준은 그들이 자주 인용한 교회에 대한 설명에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나도 있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둘째는 칼빈 자신이 한 말로서 “참된 교회는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올바로 집례되는 곳이다.”라는 것입니다.
 
이 두 말이 참된 교회의 기준입니다. 여기에서 첫번째 예수님의 말씀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내가 있겠다”는 말에서 참된 교회의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거기에서 중요한 것은 ‘내 이름으로’란 말입니다. 즉 교회는 그 조직의 거대함이나 직제나 규모에 관계없이 두 세 사람이 모여도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무렇게나 두 세 사람이 모이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이름으로” 즉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면 두 세 사람이 모이더라도 그리스도가 임재한 교회란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그 배경에 깔고 있느냐 하면 교회 안에 있는 인위적인 요소를 강하게 부정하는 것입니다. 교회란 인간이 자발적으로 구성하는 단체가 아니란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 즉 그리스도가 세우고 그리스도가 주인이신 곳입니다. 칼빈이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임을 강조할 때는 자연히 당시 교황이라는 인위적인 힘을 갖고 있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교황이 신적 권위를 가지는 교회조직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므로 그리스도 이외에는 교회 위에 주권을 행사할 그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원칙이 되는 중요한 기준은 바로 “참된 교회란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올바로 집례되는 곳이다”는 칼빈 자신의 말입니다. 이 말은 올바른 예배가 드려지는 교회가 참된 교회라는 것입니다. 실제 정통(Orthodox)이란 말도 올바르게(Ortho) 예배드린다(doxa)는 뜻입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대상이 무엇이며 예배드리는 자는 누구이며 예배 받을 분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배의 대상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앙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올바르게 집례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된다 하니까 정치적 설교나 사회적 설교는 하니 않고 순 복음만, 순 성경이야기만 하는 것을 순수한 선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칼빈이 염두에 두었던 순수한 말씀은 인위적 요소를 제거한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는데 설교자가 인위적 요소를 넣어서도 안되고 또 설교를 듣는 사람도 자기 마음에 드는 설교를 듣겠다 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설교자도 설교를 듣는 자도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례전이 올바로 집례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당시 성례전을 미신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마치 성례전에 참여하면 자기의 신앙이 없이도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우상에 대해 그렇게 많이 반대하고 우상배격에 가장 앞장 선 사람들인데, 그 실체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사실 당시 유럽에는 우리 아시아 처럼 다른 종교가 없었습니다. 종교라고는 기독교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무슨 우상이 있었단 말인가? 그것은 교회 안에 우상적 요소가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기독교인의 신앙 속에 우상적인 요소가 많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인위적인 의도를 가지고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비록 교회 안에 있어도 하나님께 예배해도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이라고까지 말하였습니다.
 
자, 종교개혁의 참된 뜻은 교회와 신앙에 있어서 모든 인위적 요소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위치에 사람이 가 있는 모든 형태는 우상숭배이고 참된 교회가 아닙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중세시대에 신적인 권위를 부여받고 있다는 교황에게까지 도전하면서 이 세상에서 인간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에 대해 강력히 저항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런 경우를 많이 보아왔습니다. 독일 나치시대의 히틀러나 구 쏘련 의 스탈린은 역사 속에서 신적 권위를 주장한 독재자고 전체주의자였습니다. 그를 섬기도록 요청했습니다. 이들만이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곳곳에서 독재자들이 신의 자리에 군림했던 역사적 현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섬길 때 이런 인간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에 대해서 용납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주기철 목사나 손양원 목사 같은 분들은 순교적 각오로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생각할 때 주로 다른 종교를 섬겨서는 안된다는 식으로 이해를 많이 아는데 실은 인간을 신으로 섬겨서 안된다는 뜻이 그 속에 적지 않게 들어가 있습니다. 실상 오늘 우리는 조직사회속에서 살면서 하나님보다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더 무서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권위보다 큰 권위를 주장하는 인간적 권위가 많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대통령, 여당, 직장상사, 자기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상에 대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보다 더 큰 두려움으로 복종합니다. 과연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된 권위입니까? 그리스도냐, 대통령이냐, 대통령에게 혼이 나더라도 그리스도에 복종하려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둘째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더라도 인위적인 생각을 갖고 나오면 그것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하는 목적 이외에는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기복신앙, 병 고침 받고, 치유받고, 내가 축복받는 목적으로 예배에 나오는 것은 일차적인 동기는 될 수 있을지라도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상과 신앙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십시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렸습니다만 가령 우리 한국교회에서 많이 문제가 된 부분이 기복신앙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잘 섬기면 물질적 축복도 임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기복과 축복의 차이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기복과 축복의 차이가 뭐냐 하면 기복은 물질적인 축복을 목적으로 신앙을 가지는 것이고 축복은 신실한 신앙을 가졌을 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복에는 인위적인 목적이 들어가 있고 축복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원칙은 대단히 중요한데 예를 들면 우리가 기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파는 상품의 질이야 어떻든지 간에 돈만 벌면 된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문제입니다. 요즘 우리 한국이 중병을 앓고 있는 부분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실하게 건설하고 성실하게 일한 결과 소비자가 거기에 대한 신뢰를 얻고 그 혜택을 누리게 되었을 때는 기업도 성장하지만, 소비자도 무한한 혜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돈을 번다는 경제원칙에는 같으나 그 방향이 달라짐에 따라 이 정도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신앙에나 교회에도 인위적인 요소가 너무 많습니다. 어떤 교회는 목회자가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교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러 오는 것이 아니고 목사의 명설교, 부담없는 교회생활, 이런 것들이 출석교회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겠다는 경우가 희박합니다. 목회자나 사람을 보고 교회에 온 사람은 사람을 보고 쉽게 신앙을 버립니다. 목회자가 자기의 마음에 안든다거나 그 교회 어떤 교인이 나에게 섭섭하게 했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는 뜻은 곧 그리스도를 섬긴 결과가 아니라 사람을 의식한 결과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교회를 세우고 운영하는 일에도 너무나 인위적인 요소가 많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일단의 그룹이 갈등을 일으키게 되면 쉽사리 분리해서 다른 교회를 세웁니다. 우리 마음에 맞는 교회를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두 세사람이 모여서 시작하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걸기에는 너무나 인위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신앙을 순수하게 만드는 작업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의 유산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바로 개혁의 대상이었던 모습을 너무나 많이 띄고 있습니다. 인위적이 때가 너무 많이 묻어 있습니다. 우리 신앙과 교회의 삶에 인위적인 때를 벗겨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순수한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를 만들고 그 속에서 참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그런 교회갱신이 필요할 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20세기가 낳은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이 계명이 신학과 신앙과 교회의 좌우를 평가하는 축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신학과 우리의 교회 안에 혹시 다른 신을 섬기고 있지 않은지, 인위적인 요소를 따라 우리의 신앙이 따라다니고 있지 않는지 잘 살펴보고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여 참된 신앙, 참된 교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박성원 목사, 부산진교회 1994. 10. 30 종교개혁기념주일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