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 2-4: 창 2:4-7 사람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창세기 2:4-7
 
        창세기 서두는 세계가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하는 근원에 대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다는 것을 창세기 강해 서두에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제가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창세기의 창조기사는 창조가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기록이 아니고 이 세계의 창조, 조금 더 철학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 실존과 하나님의 관계를 신앙적으로 고백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에는 하나님과 관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저 하늘에 달이 떠 있는데 그 달이 어떻게 하나님의 창조작업 가운데 과학적으로 떠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저 달이 존재하는 그 이면에도 하나님의 뜻이 스며들어 있고, 풀 한 포기, 흐르는 냇물줄기 속에서도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시편 19편을 읽어보면 이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온 세계의 존재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는 말은 하늘과 궁창 모두의 배후에는 근원에는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이 그 사물을 존재하게 하신 권위, 그 헤아릴 수 없는 깊은 뜻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는 1장과 2장에 이 창조기록이 두 가지가 나옵니다. 1장에 나오는 것은 이미 말씀드린대로 바벨론 포로시기에 바벨론 제국주의가 마치 바벨론 왕이 모든 만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주무르는 것에 대해서 만물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함부로 이 세계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안식일을 중심으로 한 예배의 시각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장에 들어오면 다시 창조이야기가 조금 형식을 달리하여 반복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을 창조하신 이야기가 1:26에 나오는데 2:7에 다시 나옵니다. 1장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창조하시는 것으로 나오고, 2장에서는 6절에 일반적인 사람창조의 이야기를 일단 하고 난 뒤에 18절이하에서 남자와 여자를 따로 창조하는 이야기와 그 남자와 여자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상세히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학자들은 1장의 창조문서는 제사장들이 포괄적으로 정리해서 기록한 것이라고 보고, 2장의 이야기는 한 테마를 중심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조금 이해하기 쉽게 1장은 세계와 하나님의 전반적인 관계를 설명하는 창조이야기이고, 2장은 인간에게 촛점을 맞추어서 구체적으로 설명한 창조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이해에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1장의 창조이야기나 2장의 창조이야기나 그것이 세계와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는데는 맥을 같이 하지만, 2장에서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실존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중심이 되는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더 자세하게 구체적으로 밝히면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도 보게 하는 풀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피조물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 즉 이 창조이야기를 생각하고 고백하는 주체인 우리 자신과 하나님의 구체적인 관계는 과연 무엇입니까? 본문 5절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는 아직 땅에 비도 내리지 않았고 풀 한 포기도 없었다는 이야기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자연스럽게 이해 될 것이므로 먼저 7절의 인간 이야기를 하고 난 뒤에 덧붙여 생각하도록 하십시다. 7절에 보면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사람을 하나님이 흙으로 이겨서 만드셨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신비를 해석하려는 시도가 참으로 많이 있었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읍니다만 과학자들 중에는 사람의 원소와 흙의 원소의 기호가 같다, 신기하게도 사람과 흙은 그 본질이 같다, 그러므로 이 기록은 기가 막히게 맞는다란 이야기를 합니다. 또 사람이 흙에서 지어졌으니 흙으로 돌아간다고 했는데 실제로 시체를 땅에 묻으면 다 흙으로 돌아가니 역시 이 기사는 문자그대로 옳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들이 옳은지 그른지는 신학자인 저로써는 규명을 못하겠고 과학자들의 연구에 맡겨두기로 하십시다. 저는 신학자이므로 이 기록에 대한 신학적, 신앙적 의미를 규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인간이 만들어진 재료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인간이 무엇으로 만들어 졌든지간에 그것은 만드시는 분의 솜씨에 달려 있는 일이고 재주에 달린 일입니다. 얼마전에 들어보니 자동차를 만드는데 우리 통상적인 개념으로는 쇠붙이로 만드는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그런데 이제는 쇠붙이가 아닌 프라스틱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플라스틱은 불에 닿으면 녹아버리고 강철보다 훨씬 약하다고 하는데 이것에 열을 가해서 내구성의 강도를 높이면 강철보다 훨씬 더 강한 플라스틱으로 변하고, 심지어 엄청난 열을 가하는 엔진까지도 플라스틱으로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이 화학에서 탐구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어떤 물건을 만드는데 생각지도 못한 전혀 다른 재료로 같은 물건을 만들어 낸다면, 하나님께서는 공기로도 사람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흙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아무도 규명하지 못하고 아마도 이 글을 쓸 고대 당시에는 어떤 것을 만들 때 흙을 구워서 여러가지 형상이나 기구들을 만들었고 그것이 당시의 가장 어필하는 현상이었으므로 토기장이가 흙을 구워서 신상도 말들고 인간상도 만들고 그릇도 만드는 것을 보면서 이를 인간창조에도 적용하여 묘사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들어 진 재료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고 이 이야기의 핵심적인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이야기의 촛점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에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어놓고는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는 부분입니다. 생기를 불어넣으니 비로소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촛점이 되는 부분, 신학적이고 신앙고백적인 부분은 바로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이 부분입니다. 무엇으로 만들었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도 있다고 고백한다면 만든 재료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하나님의 창조의 핵심은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셨고 생기를 불어넣으셨을 때 비로소 생령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최근에 나오는 영화, 예를 들어 Terminator 같은 영화를 보면 금속으로 사람을 만들고 그 안에 컴퓨터를 장착하여 완전히 사람같이 움직이게 하는 영화가 많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컴퓨터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시니 그 흙으로 빚어놓은 그것이 생령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촛점은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생기, 그것이 중요하고 그것을 하나님이 불어넣으셨다는 사실 자체가 이 이야기 속에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하는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자기 육체, 자기 정신, 자기 지식, 자기의 현재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마치 전기 플러그를 빼버리면 아무리 비싼 기계도 쓸모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리듯이 하나님이 생기를 그 몸에서 인간에게서 빼어버리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것을 알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유교에서는 인간존재에 대해 아주 성서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유교에서는 인간은 氣로 인해서 생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기, 양기, 음기, 끈기, 패기, 살기, 인간의 움직임, 마음가짐, 신체상태 전체가 다 기로 구성되어 있고 이 기에 의해서 인간이 움직여 진다는 것입니다. 얘가 왜 기가 다 빠졌냐? 왜 기가 죽었냐? 아이구 기가 너무 살아서 겁난다, 이런 표현들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인간이 테어날 때 기가 들어오는 것이 곧 태어나는 것이고 기가 빠져나가는 것이 곧 죽는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제사를 지낼 때는 이 기를 다시 불러오는 것입니다. 귀신도 무서운 귀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기가 돌아오는 것과 돌아가는 것의 신적 존재를 표시한다고 합니다. 요즈음 한국에서 보면 이것에 착안해서 소위 기철학(氣哲學)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아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氣라고 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생기란 뜻과 같은 말입니다.
 
이스라엘말로는 이 기를 루하아(Ruhaa)라고 하는데 이 말은 바람이란 뜻이고 입김이란 뜻도 됩니다. 헬라말로는 이 기를 프뉴마(Pneuma)라고 하는데 헬라철학의 개념에서는 영, 혼이란 말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기, 하나님의 영이란 말로써 바로 이 루하아, 프뉴마란 말을 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교에서 말하는 그 기와 성서에서 말하는 그 생기란 말은 같은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연결 또한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창조이야기의 과학적인 근거를 밝히는 것보다 세계가 하나님과 밀접히 관계가 되어 있다는 신앙적인 선언과 고백이 더 중요하듯이, 여기에서도 생기라는 물리적인 요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란 존재에는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신 그 배경이 있다, 즉 하나님의 결정적인 기여로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고 지내는 것이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저 길거리를 걸어다니고 있는 사람들, 오늘 열심히 공장에서 일하고, 회사에서 돈을 벌고, 강의실에서 가르치고, 출세하겠다고 배우고, 복덕방에 다니며 투기하고, 국회에서 떠들고, 탱크를 몰고 전쟁을 하고, 점포에서 물건을 팔고, 음식점에 모여서 좋은 식사를 하고, 가족들이 모여 외식을 하고, 운동을 하고,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고, 부두에서 하역을 하고, 부엌에서 퇴근하는 남편과 학교에서 돌아오는 자녀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또는 이렇게 설교를 하고, 설교를 듣고 깨닫고, 그래서 기뻐하고 용기를 얻고 하는 우리 모든 인간의 실존은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존적인 혹은 철학적인 차원에서는 인간의 존재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이런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것이 끊어지면 한갖 흙뭉치에 지나지 않는 존재이며, 하나님이 존재케 하실 때만 존재하는 그런 의존된 존재란 사실 이것을 인간이 깨닫게 될 때는 자기 삶에 대한 가치나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의 차원이 전혀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를 염두에 두고 피조물을 대하고 인간을 대하게 되면 인간의 죄악이 감소하고 자기의 삶의 가치에 대해서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까 서두에 약속드린대로 7절의 이런 배경을 가지고 그 앞절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는 땅에 아무것도 있지 않았다는 말을 새겨보면, 하나님이 존재케 하시는 은총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창세기 1:27의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이야기와 연결해서 생각하면 이제는 인간 존엄성의 차원으로 나아가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했다는 것은 닮았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는 하나님의 존엄성을 인간에게 부여했다는 말입니다. 동학사상의 중심사상이 뭐냐 하면 인내천(人乃天) 사상인데 이것은 인간은 곧 하늘이란 뜻입니다. 인간이 하늘이란 뜻은 신이란 뜻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는 그만큼 지고하고 존엄한 존재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하나님의 존엄성을 부여된 존재를 업신여기고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부여된 이 존재를 물고문하여 죽인다든지 하는 것은 죄악중에도 죄악입니다. 지금 세계교회가 인권운동에 가장 열렬하게 투신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이 존엄성을 부여하신 존재가 그 존엄성을 위협받았을 때는 인도주의적 차원이 아니라 신앙고백적 차원입니다. 하나님이 모독당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간을 볼 때는 이런 시각으로 보고 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라도 사랑하라 하신 이면에는 이런 사상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는 일은 하나님이신 자기를 대접하는 것이란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목숨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도 이런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시각을 가지고 살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는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주신 하나님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숙명적으로 지니고 사는 존재라는 것, 
둘째는 우리의 존재가치는 하나님이 당신의 존엄성을 우리에게 부여하실 만큼 고귀한 존재라는 것, 
셋째는 나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에게도 하나님은 이런 존엄성을 부여하셨다는 것, 
넷째는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대할 때는 하나님을 대하듯이 하라는 것, 이 고백을 오늘 밤에 굳게 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밧데리로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이고, 그 가장 구체적인 존재가 인간입니다.
 
<박성원 목사 1993. 4. 7. 부산진교회 수요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