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C 문서 6-1 - 역대 WCC 봉사신학 문서 모음

메시지
(Message)

삶과 일 세계 기독교 대회(Universal Christian Conference on Life and Work),
스톡홀름, 1925

현대 에큐메니칼운동의 근간이 되는 사건중의 하나는, 스톡홀름 대회에서 분명하게 나타난 바대로, 최소한 부분적이라도 세계 제1차 대전이 직면한 교회의 분열과 무력함에 대해 응답하는 것이다. 스톡홀름 대회는 죄더블롬 감독 (Bishop Söderblom)의 노력과 비전이 없이는 불가능한 사건이다 (1장을 보라) 스톡홀름 대회 1925: 공식보고서 G.K.A. Bell (), London, Oxford UP, 1926, 710-16.
I

2. …세계대전의 죄악과 슬픔, 다툼과 상실감은 그 때부터 기독교 교회에게 세상은 분열된 교회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강하다는 것을 겸허하고 부끄럽게 인식하게 했다. 우리의 목표는 이제 신앙과 직제에 대한 우리의 차이를 잠시 접어두고 그리스도인의 삶과 일에 있어서 연합된 구체적 행동을 구하는 것이다대회 그 자체는 놀라운 사건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다.
                                  
3. 우리는 하나님과 세계 앞에 교회가 그 죄책의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사랑과 동정적 이해가 부족했던 죄악과 실패를 고백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인류에게 그리스도를 너무나 부족하게 나타내 왔기 때문에 진리와 의를 충실히 추구해야 할 자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지금 이 시간 교회를 향한 부름은 회개여야 하며, 이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안에 있는 무진장한 재원에서 솟아오르는 새로운 용기를 가져야 할 점이다.

II

5. 대회는 우리의 구원의 대장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심화하고 새롭게 하였다. “나를 따라오라는 그의 부름에 응답하면서 우리는 십자가의 현장에서 그의 복음을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 산업, 사회, 정치, 국제관계의 영역 에 적용하는 긴급한 임무를 받았다.

6. 경제적 영역에서는 인간(역주, 영어에는 영혼으로 번역될 수 있는 soul이란 단어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인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함)이 가장 지고한 가치이므로 그것이 결코 재산권이나 산업구조에 종속되어서 안 된다고 선언하였고 인간의 권리가 구원의 권리 중에 첫 번째 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됨의 자유롭고 전적인 개발을 옹호한다. 우리는 복음의 이름으로 산업이 결코 개인의 재산에 대한 욕망에만 근거해서는 안되고 공동체를 봉사하기 위해 집행되어야 함을 선언하였다. 재산은 하나님에게 책임감을 가지는 청지기적 사명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갈등이 현존하는 현장에서는 자본과 노동의 협력이 이루어져서 고용주와 피고용인 모두가 산업에서 그들의 역할이 직업의 성취로 동등하게 간주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으며 그들도 우리에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해야 할 바를 할 수 있다.

7. 사회도덕의 영역에서는 과잉인구, 실업, 도덕의 이완과 그에 따른 여러 사회악, 범죄와 범법자 등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고찰했다. 우리는 이 문제들이 너무나 방대하여 결코 개인의 힘으로만은 해결할 수 없고 공동체가 공동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각각의 경우에 모두 공동선(common good)이 필요하듯이 개인의 행위 위에 사회적 통제 같은 것이 시행되어야 한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는 교육, 가정, 직업, 여성에게 영향을 주는 문제, 어린이, 노동자들과 같은 영역에서 개개인에게 관심을 높이 두어야 하는 더욱 피부에 가까운 문제들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교회는 개인의 인권과 같은 문제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권리의 고양으로 인해 모든 인간의 권리가 고양되어야 하므로 도덕적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

8. 우리는 또한 민족적 편협성(national bigotry), 혹은 공허한 세계주의(cosmopolitanism)도 모두 반대하면서 기독교적 국제주의의 표준적 지침을 설정하였다. 우리는 교회를 위한 우주적 본질과 형제적 사랑을 선포하고 실천할 의무를 재확인하였다. 우리는 개인의 양심과 국가의 관계에 대해서도 고려하였다. 우리는 인종 문제와 법과 중재, 그리고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 우리의 가슴에 깊이 다가오는 문제들 , 전쟁의 원인을 사전에 없애기 위한 평화적 방법들을 제공할 국제질서의 수립 등도 검토해 보았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전쟁의 공포와 국제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느끼는 같이 교회도 그렇게 느끼기를 바라고 평화의 왕권아래 인내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는약속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일하기를 바란다.

9. 우리는 어떤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긴밀하게 나누었던 토론에 대해 표결을 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개인이나 구룹의 견해에 대해 존중할 뿐만이 아니라 개인이나 공동체가 자선과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적용할 의무 같은 것을 개인의 양심이나 공동체에게 맡겨두면서도 아직은 교회의 선교가 국가의 원칙, 혹은 이상적 생각을 하는 것 위에 있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III.

10. 이 목표가 달성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교육이 꼭 필요하다는 점을 인지한다. 개인이 모든 면에서 기독교적 분별을 할 수 있도록 교회로부터 교육을 받아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진리를 행함에 있어 진리의 영에 의해 인도받으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역량을 높일 수 있도록 연구, 수련회, 기도 등을 통해 교육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악의 뿌리는 인간의 의지에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 하며 따라서 항상 그 섬김이 온전히 자유 하신 하나님의 지고하고 거룩한 뜻에 우리의 의지가 속해야 한다는 우리의 믿음을 거듭 확인하려 해야 한다. 심지어 만약 우리의 근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에 두는 데서 벗어나고 성도의 개인의 삶 속에 그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기독교적 아이디어나 이상마저도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

11. 이 때문에 우리는 먼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호소한다. 각 개인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 지게 하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함이 있어서 자기의 양심에 따라, 자신의 신념을 실제적 삶에 적용하면서 자신의 개인적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로 하여금 자기 교회에 전적인 충성을 하면서 이 세계 대회에서 약속과 서약을 하는 (세계)교회들과 더 넓은 교제와 협력을 추구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이 넓은 교제의 이름으로 우리의 특별한 동정의 메시지를 박해와 시험 속에 있으면서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성취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며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고난과 교제를 나누게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위로를 전한다.

12. 그러나 이 호소를 기독교교회에만 국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감사하게도 우리는 이제 이 거룩한 일을 위해 많은 뜻을 함께 나눌 동반자들이 우리 곁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국의 청년들에게 호소한다. 우리는 여러 나라에서 진행되는 청년운동에서 나타난 대로 그들이 더 나은 사회질서를 위해 일하려는 열망과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들었다. 우리는 청년들의 열의와 그 능력들, 그들의 삶의 신선함과 성숙함들을 하나님의 나라와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일에 투신하기를 간절히 열망한다.
우리는 또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따르는 그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도움을 요청한다. 그리스도께서 진리이시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도 인간 안에 존재하는 이성과 양심을 진보시키는 것을 진심으로 환영해야 한다. 특별히 우리는 여러 특별 영역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지식을 가지고 있는 교사들과 학자들의 협력을 요청한다. 왜냐하면 이런 지식이 없이는 우리를 압박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의 해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메시지를 나사렛의 목수, 사람의 아들의 이름으로 전 세계의 노동자에게 보낸다. 우리는 감사하게도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현재,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 원칙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 안에 오해와 이상한 생각이 존재하고 있음을 개탄하여 이것들을 없애는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모든 인간의 온전한 인간됨을 계발할 기회가 보장되는 정의롭고 우호적인 사회질서를 추구하는 열망에 공감한다

14. 우리는 내면적으로 먼저 하나가 될 때만이 비로소 마음과 정신의 진정한 일치를 얻을 수 있다. 이 세상의 다양한 색깔이 우리의 신앙에 반영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에게 더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서로 더 가까워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우리는 서로 손을 내 밀어 잡아야 한다. 선한 목자는 하나님께서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함께 모을 수 있게 하시기 위해 죽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만이 세상의 희망이 있다.
이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 능력에 따라 우리가 생각하거나 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하실 수 있는 그 분, 그 분에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 안에서 세세 무궁토록 영광이 있을지어다. 아멘.


                                                                                             <박성원 번역>



스완위크 대회 요약보고
(Summary Report of Swanwick Consultation)

WCC 교회간 원조 협의회(WCC Consultation on Inter-Church Aid), Swanwick, 1966


레슬리 쿠크(Leslie Cooke) 1955년부터 1967년까지 WCC의 교회간 원조, 난민, 세계봉사국 국장으로 봉사한 널리 존경을 받는 분이다. 이 분야의 중요지침이 되는 스완위크(Swanwick)협의회가 바로 제1장 서론에 언급되고 있다. 다이제스트: 1966년 스완위크에서 열린 “교회간 원조 세계대회 요약보고” (Leslie Cooke, Summary Report, World Consultation on Inter-Church Aid, Swanwick, 1966)

             우리가 우리의 생각 속에서 찾아낼 수도 있을 것 같은 첫 번째 강조점은 우리는 단순히 원조를 조직하고, 주고, 받고 하는 것에서 넘어가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게 하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 이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가 서로 동의한다고 생각되는데 – 결코 우리가 원조를 조직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세계의 필요는 아주 분명히 우리 앞에 놓여있고 이 세상의 교회의 필요가 정점에 달할 정도로 절실함이 표현되고 있는 마당에 원조가 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욱 필요한 터이다…

             그 점을 분명히 말해 두면서, 우리는 또한 이것으로는 결코 충분치 않다는 점도 말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일을 하는데 있어서, 혹은 그 일을 함으로 나타나는 효과는 사실 교회와 사회의 구조에 대해 도전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여기에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된 점들 가운데 두 번째 문제가 되는 부분은 향후 십 년 동안 협력을 넘어서 공동체로 가야 한다는 점에 강조를 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전체로서의 공동체로서 세계교회협의회 앞에 놓인 주요 이슈라는 의미가 있다. 우리는 흔히 에큐메니칼 밀월은 끝났다고 말한다. (이 모임에서) 일어난 일은 바로 우리가 모이고 있는 이 자리에서도 여러 가지 경우를 통해 우정과 관계가 형성되고 있지만 - (에큐메니칼)운동이 상당 부분 교회의 우정과 개인적인 관계에서 연유되는데 이것은 사실 이제 교회 안에서 공정하고 투명성 있게 일어나야 한다고 깨달은 일이다. 하나의 큰 문제는 세계교회협의회가 여러 가지 영역에서 효과적인 협력의 도구가 됨을 발견하면서 동시에 세계교회협의회가 교회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일치를 나타내는 도구가 되도록 세계교회협의회를 만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교회간의 원조의 일을 함에 있어서 이것은 이론상의 문제가 아니고 실존적 문제이다. 이 일에서 우리는 아주 상당한 협력의 경지에 도달했다. 전략에 있어서도 상당한 정도의 합의에 도달했고; 교회와 국가간 원조에 대한 협력도 상당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중앙집중적 조직과 연합된 행동도 상당한 정도로 실현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여기에서 우리는 이 부름이 계속 되어야 한다는 것을 계속 듣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여기에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된 세 번째 점은 향후 십 년 안에는 우리가 세계를 위해 봉사한다는 개념의 차원을 넘어서 우리의 봉사가 세상과 더불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여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내 말은 내가 생각하기엔 우리 모두는 온 세계 교회가 아직도 교회의 사역이 세상을 상대로 향해야 한다는 중세적인 사고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우리는 아직도 가난한 자와 병자들이 원조를 받기 위해 수도원문으로 와야 한다는 옛 그림에서 별로 다르지 않다. 내가 알기로는 교회는 항상 세상과 맞서 있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르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제안하기는 우리는 결코 “세상적이어서 안된다”는데 강조를 둔 나머지 교회가 세상 안에 존재한다는 이 진리를 좀 덜 강조해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그 곳으로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신 곳은 바로 세상이란 점 다시 강조하고 싶다.


                                                                                             <박성원 번역>




라나카 선언
(Larnaca Declaration)
                                            
WCC 디아코니아협의회(WCC Consultation on Diakonia)
라나카(Larnaca), 1986

1986년 사이프러스 라나카(Larnaca)에서 열린 협의회는 교회간 원조에 대한 이해에 한 전환점이 되었다. 1966년 스완위크(Swanwick) 대회 때의 개발의 가능성에 대한 낙관론에서 이제 정의를 위한 투쟁에 있어서의 연대를 긴급하게 요청하는 쪽으로 그 중심축이 옮겨졌다. 이웃이 되라는 부름 (Called to be Neighbours) 공식보고서: Larnaca Consultation 1986. 클라우스 포저(Klaus Poser) , 제네바: WCC. 1987. 122-125.

전 세계 모든 대륙에서 온 남, , 그리고 청년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봉사를 통한 정의와 평화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천명하려고 여기 라나카에 함께 모였다. 생명과 죽음 사이의 선택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명백하다. 그리스도 자신이 말씀하셨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0.10). 그래서 우리는 생명을 택하고 세상 모두를 위해 행해져야 할 기독교봉사를 통해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헌신한다. 우리는 한 사람과 모두를 위해 이웃이 되도록 부름 받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그에게 충성하기를 다시 맹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외에) 어떤 다른 주되심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삼위일체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만이 모든 물질과 힘에 궁극적 소유권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영적 물질적 자원은 모든 사람에게 속해 있고 그것을 사용하는데 모두가 참견할 권리를 가진다.

             스완위크(Swanwick)에서 교회간 원조에 대한 협의회가 개최된 지 이십 년이 지났지만 세계의 고통은 더욱 증가했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고백하고 인간을 억압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야기시켜온 교회와 사회의 구조와 체제를 암묵적으로 은연중에 지탱해 온 공범자로서의 잘못을 고백한다. 우리는 봉사(diakonia)가 – 진정한 형식으로라면 –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리고– 점점 테러와 폭력이 증가하는 시점에 - 각 대륙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과 정의, 평화를 위해 지금 투쟁하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해에서는 그들의 존재 자체를 질식시키는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조직에 대항해 싸우고 있고 사람들은 외채의 목 조르기와 땅 분배의 불평등을 끊어내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수출주도 경제의 현상을 포함하여 부당한 경제구조가 인간의 삶을 황폐화시키는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소수민족과 사회적으로 소외된 민중들이 수세기 동안 계속되어온 차별과 억압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 남아프리카와 나미비아에서는 사람들이 국경과 이웃 나라들, 심지어 전 아프리카 대륙과 세계까지 계속해서 불안하게 하는 인종분리(Apartheid)정권의 비인도적 멍에아래에서 투쟁하며 죽어가고 있다. 우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정권에 대한 경제제제의 시행을 적극 지지한다. 우리는 연대가 없이는 그 민중의 투쟁이 더욱 어렵고 심지어 민중이 지금 죽어가고 있는 나라들의 경제를 지원하고 강화하는데 지원해 줄 것을 모든 선한 뜻을 가진 사람들에게 요청한다. 북미와 유럽, 호주에서는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이 훨씬 더 지능적인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통제에 맞서 정의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알바니아에서는 기독교인, 무슬림을 막론하고 모든 신앙인들이 신앙공동체, 예배공동체로 존재할 권리를 거부당하고 있는데 대해 우리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천명한다. 태평양에서는 사람들이 자치권과 자신들의 삶과 문화 그리고 그들의 자연환경을 핵무기와 핵 폐기물의 독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투쟁한다.

             중동에서는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이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레바논에서는 그 나라를 교란하고 불안정하게 하려는 지역 및 국제세력들간의 갈등 때문에 나라의 고통이 발생하고 있다. 죽음과 거주지와 거주지역으로부터 거듭 반복되는 소개가 결국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고 국가 주권과 일치를 회복할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을 점점 상실하게 만든다. 자치와 주권국가권리를 위한 팔레스틴의 투쟁은 세계의 지원을 더욱 필요로 하며 지역의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와 정의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세계교회의 더욱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우리와 모든 희생자들간의 새로운 형태의 연대를 개발하도록 부르고 있으며 무기판매를 통해 이 지역의 전쟁에 더욱 기름을 끼얹고 그래서 폭력에 대한 해결책 모색을 지연시키는 나라들에게 도전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또한 평화를 위한 일을 시작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 세기에 최초로 일어난 아르메니아 인종청소(genocide)는 세계공동체에게 결코 잊혀져서 안되고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사건이다. 사이프러스에서는 난민들과 실종자들을 돌보는 일을 포함하여 분단된 공동체간의 일치에 대한 간절한 소원이 후원을 받을 필요가 있다.

             각 대륙에서 모든 사회적, 정치적, 이념적 악의 세력이 표출되고 있다. 점점 가중되고 있는 군사화는 가난한 사람들을 점점 더 가난하게 만들고 이미 우주까지 미치고 있는 핵무기경쟁이 우리 지구를 완전 파괴로 몰고 갈 수 있을 정도로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계속되는 기근의 천형이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만든다. 점점 증가하는 난민과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은 세계상황을 인간생명과 존엄의 보호가 위태로운 세계로 만들고 있다. 점점 증가하는 이민은 많은 사람들의 권리를 극심한 착취에 방치되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모두의 삶이 존엄성을 가진 품위 있는 삶의 누림을 보장하기 위해 행동해야 하며, 지금 행동해야 한다. 불평등과 가난을 계속 지속시키는 경제적 사회적 구조는 그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의사결정에 모든 민중들의 전적 참여가 보장되는 새로운 국제 경제질서와 정치적 구조로 바뀌어져야 한다. 세계의 경제구조로 지탱되는 억압적 정권의 존재는 모든 대륙에 우리가 아주 죄악적이라고 딱지를 붙일 수 밖에 없는 인권침해로 이어진다. 모든 형태의 폭력, 특히 국가 폭력은 반드시 저지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존엄성을 가지고 살아야 하며 자신의 미래를 자기 자신이 스스로 결정지어야 한다는 우리의 근본적인 신념을 재천명한다. 우리가 모든 대륙에서 보는 여러 형태의 양극화와 사회적 분열은 우리 모두의 생존을 위협한다. 전 세계에 고통과 고뇌, 투쟁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억압과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희망과 믿음과 기쁨이 나타나고 있음도 본다. 젊은이들이 투쟁의 전면에 나서고 있고 그들의 도전과 해방적 봉사로 교회에 도전하고 있다. 항상 교회의 봉사 사역의 대부분을 실행해 온 여성들은 봉사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를 민중중심으로 심화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 우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믿음 때문에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음을 인식한다. 교회 스스로가 기독교봉사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여성과 청년들이 충분히 참여하게 할 수 없게 해 온 부당한 구조에 대해 훨씬 더 적극적으로 도전해야 한다. 청년들과 여성들은 연대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하는 조력자 내지는 중재자가 되어야 한다.

             어디에서든지 민중들은 예언적 봉사(prophetic diakonia)를 교회가 미래를 형성해 가는데 해야 할 역할에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는 이런 저런 방법으로 기독교 봉사의 힘을 변화시키는 경험을 모두 해 오고 있다. 우리는 봉사를 통해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고 우리의 봉사는 진리를 향한 우리의 영적 탐구로 더 풍요해 짐을 경험해 왔다. 진리가 우리를 모든 형태의 죄악에서 자유케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 자신을 드리게 하는 것을 우리는 안다( 8:32을 보라.)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통해 나타나시고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을 선포하면서 우리를 회개와 순종, 그리고 사랑으로 부르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 11:12을 보라). 정의는 힘없는 자들이 함께 분기할 때까지는 권력자들이 결코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은 정의와 평화를 위해 투쟁하는 자와 같이 계심을 알며 우리는 우리의 자리는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함을 - 아직 우리의 행동에까지는 아니더라도 - 우리 마음으로는 안다.

             3의 천 년이 다가 오는 이 즈음, 우리는 이 날 이후로 봉사를 통해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할 것을 다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의에 기초한 평화를 위해 지금 투쟁 중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동일화하고 연대할 비전을 실천할 것을 서약한다. 이제와 미래의 우리의 봉사는 반드시 상호 신뢰와 진정한 나눔에 근거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모든 대륙의 사람들과 교회들이 궁핍 속에 있으며 우리의 봉사의 손길은 고통 받는 사람에게 미쳐야 함을 인식한다. 우리는 우리를 대적하는 세력들이 아주 많으며 우리 앞에 놓인 길은 길고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점도 잘 안다. 우리는 최소한 십자가를 지고 고난 받는 종, 우리의 주님 되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음을 안다. 죽음을 이기신 그의 승리가 우리에게 생명이 되고 희망이 된다.


                                                                                             <박성원 번역>




나눔의 지침
(Guidelines for Sharing)

WCC 코이노니아 세계협의회(WCC Consultation on Koinonia)
엘 에스코리알(El Escorial), 1987

WCC 프로그램, 자원의 에큐메니칼 나눔(Ecumenical Sharing of Resources)은 교회가 전통적인 의존과 온정주의(paternalism)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새로운 관계를 위한 개념적 틀거리”(H. van Beek)를 제공하려고 시도해 왔다. 이 지침은 이 프로그램의 세계대회에서 채택되고 많은 교회들이 승인한 것이다. 생명의 나눔(Sharing Life) 공식 보고서, WCC 코이노니아 협의회: 세계공동체의 생명 나눔 (WCC Consultation on Koinonia: Sharing Life in a World Community) El Escorial 1987. Ed. Hubert van Beek, Geneva. WCC, 1989, 27-30.

I

하나님은 풍성하고 베푸시는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것을 모든 인간이 성실히 사용하고 나누도록 주셨다. 하나님의 생명의 선물을 받은 자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랑과 나눔과 올바른 사용을 통해 이 축복을 나누면서 세상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 보도록 부름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죄와 이기심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을 잘 못 사용해 왔다우리는 이익만을 추구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다수의 사람들의 삶을 빈궁하게 만드는 것을 용인해왔다. 그로 인해 세계 민중 다수가 영속적으로 의존하고 가난하게 한 불의한 구조가 형성되게 되었다. 이것은 명백히 하나님의 목적에 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세상의 생명을 위해 하나님 자신을 주신 것은 바로 이런 죄적인 현실의 현장이다. 십자가 위에 나타난 예수의 자기 비움의 사랑은 우리를 참회하게 한다. 우리를 나누게 하는 능력이며 한 모범이 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성령의 능력 안에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은 우리에게 벽을 허물게 하고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나라의 도래를 위해 준비하도록 우리의 체제를 새롭게 하신다.

             그리스도안에 성령을 통해 주어진 새 생명은 우리를 한 몸의 지체로서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고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생명의 선물을 함께 나누는 - 새 사람으로 창조한다.

             성례전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깨어진 온 창조세계에 드리고, 그 후 새로워진 만물을 다시 받는다. 성례전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위해 떼어지고 나누어지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도록 다시 세상으로 우리를 돌려보낸다.

             교회는 새 사람의 첫 열매로서 모든 사람들, 특히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들과 연대하고 이 세계의 가치 체계에 도전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모여서 자원의 나눔에 대한 세계협의회에 함께 한 우리 모든 참가자들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 수 있게 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 협의회를 가지면서 우리의 나눔을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행해 나가기로 우리 자신은 다짐한다.

II

이 모든 나눔에 있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다짐한다.

1.      정의와 평화 그리고 창조의 보전에 근거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가치 체계 만들기. 그것은 인간공동체와 그들의 문화와 자연이 가진 부의 풍부한 자원을 인식하는 체계이다. 그것은 현재의 경제, 정치 질서가 바로 그 위에 세워져 있으며 핵 위협이나 산업공해와 같은 현재의 위기 바로 그 배후에 있는 가치 체계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될 것이다.

2.      , 나이, 정치 경제적 조건, 종족적 배경, 장애인 등의 이유로 소외되어 온 사람들과 노숙자, 난민, 망명지원자, 이주노동자와 같은 사람들이 모든 의사결정과정의 중심에 자리하며 동등한 동반자로서 행동할 수 있는 나눔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이해를 구축하기.
이것은 예를 들면:
-       교회나 협의회나 네트워크들이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단위나 세계단위의 에큐메니칼 기구를 설치하며,
-       의사결정 구조에서 여성과 청년에게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대표성을 부여하는 것 등이다.

3.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 그리고 교회와 사회에서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투쟁하기 위해 그들이 조직한 운동과 연대하기.
이것은 곧 주는 자로서이건, 받는 자로서이건 이 투쟁을 훼손시키는 식의 나눔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4.      모든 차원에서 제3세계 민중과 부의 착취로 연결되는, 그로 인해 가난과 생태파괴가 양산되는 불의의 구조와 그 원인을 규명하고, 폭로하고, 맞섬으로써 하나님의 선교를 증언하기. 이것은 곧 새로운 경제, 정치 질서를 위해 일하는 것을 수반한다.
이것은 예를 들면 북반구와 남반구의 교회가 다양한 반핵운동을 함께 강화하고 참여하며 그들의 정부들이 핵실험이나 핵폐기물 투매를 중지하도록 압력을 가한다. 이것은 또한 다국적 기업과 군사주의, 외세개입과 점령 등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투쟁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5.      민중들이 개인이나 공동체로서 조직하고 그들의 잠재력이나 능력을 실현하여 독립에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자립과 자결과 같은 것을 향해 일할 수 있게 하기.

6.      공동의 헌신, 상호신뢰, 고백과 용서에 근거한 친구로서 서로 서로를 열며 모든 계획과 프로그램의 형성과정을 서로 서로에게 알려주고 상호 책무와 상호 교정을 위해 우리 자신을 열기.
이것은 예를 들면 남반구와 북반구 사이에 의사결정을 함에 있어서 상호 책무성과 참여를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7.      이 부름이 부르는 북반구와 남반구의 기관들 사이에 어떤 절대적인 기부자도, 어떤 절대적인 수요자도 없는 모두가 충족되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모두가 나눌 은사를 가지고 있는 관계를 형성하고 필요와 문제들을 함께 나누기.

8.      하나님의 자유케 하시는 뜻에 순종하는 교회의 통전적 선교를 말과 행동으로 촉진하기. 우리는 선교의 한 부분에만 응답하면 전체로서의 선교를 왜곡하고 훼손한다고 확신한다.

9.      정의를 위한 민중의 투쟁에 참여하여 오늘 인류 가족을 가르는 서로 다른 신앙과 이념 사이의 모든 장벽을 극복하기.
이것은 예를 들면 동서의 교회가 모든 기회를 활용해 화해(détente)의 과정을 강화시키고 이 과정에서 가용하게 된 자원을 에큐메니칼 나눔을 위해 함께 통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10.   남반구 민중들의 자원을 빼앗는 예를 들면 그들이 외채를 갚기 위해 지금까지 받은 원조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갚게 하고, 그들이 힘들여 번 자원을 빼앗아가서 결국은 그들을 영속적인 의존의 상태로 만들어가는 – (국제통화기금과 같은) 국제 기구에 저항하고 오히려 교회의 자원을 포함하여 국가의 모든 부와 자원을 정당하게 재분배하는 더욱 근본적인 장치를 만드는데 기여하기.

11.   권리의 소재를 이동시켜 사회정의를 위한 운동과 같은 자원과 힘 모두 부당하게 거부당해 온 사람들에게 자원이 사용될 수 있도록 우선순위의 재정립 및 자원사용원칙 등을 세워나가기.
이것은 예를 들면 의사결정과정에서 남반구의 참여가 현재 실행되고 있는 것 같이 단순히 협의의 차원에서만이 아니어야 함을 의미한다.

12.   공동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남반구의 교회들과 민중들 사이에 예를 들면 인적 자원의 나눔과 같은 것을 통해 상호 참여를 촉진하고 독려하기.

13.   각국, 지역, 국제, 모든 차원에서의 에큐메니칼 나눔을 촉진하고 강화해 나가기.

                                                                                             <박성원 번역>









21세기의 디아코니아에 관한 신학적인 전망들
(Theological Perspectives on Diakonia in the Twenty-First Century)
콜롬비아, 2012

이 문서는 2012년 스리랑카의 콜롬보에서 열렸던 WCC의 “정의와 디아코니아, 정의와 포괄적공동체 프로그램과, 그리고 선교와 전도 프로그램”과 공동 개최했던 협의회에서 논의되고 2012 WCC 중앙위원회에 보고된 보고서이다.

이 신학적인 묵상 자료는 구체적 상황과 경험에 기초한 귀납법적인 추론을 의도하고 있다. 25여 개국에서 다양한 디아코니아 사업들에 열중하고 있는 50명의 참여자들은 변두리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는 중에 생겨난 새로운 가능성들에 관한 통찰들을 제공해주었지만, 몇몇 난처한 질문들을 던지기도 했다. 그들은 21세기의 디아코니아에 관하여 공부하려면 바로 이어서 언급할 몇 가지 도전적인 과제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특히 신자유주의 경제 세계화라는 오늘날의 지배 체제에서 비롯되는 불의의 제도화, 기후 변화의 현실과 그 영향력; 온갖 전쟁과 갈등 및 이로부터 비롯되는 파괴와 정신적 외상, 그리고 깨뜨려진 관계들; 여러 종교들과 민족들의 공격적인 주장에 기인한 공동체 붕괴; 취약 계층을 향한 탈취 행위와 추방; 사회의 여러 구성원들, 특히 여성과 아이들 및 장애인들과 노년층을 향한 폭력; 영양 부족과 질병 및 면역 결핍 바이러스와 후천성 면역 결핍증(Aids); 인종적/종교적 소수자들과 토착민들, 아프리카 출신 공동체들, 남아시아의 천민들, 다양한 이유들로 차별을 겪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소외당하는 현실.

오랜 전쟁과 갈등으로 폐허가 된 스리랑카는 치유와 희망의 가능성을 찾으려고 애쓰는 나라로서, 이번 회의의 중요한 배경을 제공하고 있다. 이번 회의는 교회들의 증거를 대표하고 있는 스리랑카 교회협의회가 주도하는 것이다. 그곳의 교회들은 제한된 공간으로 인하여 공적인 참여를 충분히 감당할 수 없는 변두리 소규모 집단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제각기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치유와 화해를 향한 증거에 있어서 하나 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 회의는 디아코니아를 아래에 상술하는 세 가지의 구체적인 장점들을 통해서 바라보고자 하였다.

첫째로, 이 회의는 디아코니아를 계속적인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교회들의 첫째가는 과제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교회들이 배타적이거나 내향적인 신앙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되며, 도리어 세상에 참여해야 하는 소명을 가지고 있음을 주장하기 위하여 선택된 것이었다. 이 회의는 또한 디아코니아를 제도적인 형식들 안에서 바라보고 추구하려는 일반적인 경향에 응답함과 아울러, 그러한 형식들이 허용하는 도전들에만 응답하려는 것이기도 했다.

둘째로, 이 회의는 디아코니아를 (많은 경우들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교회의 디아코니아 수혜자들이나 대상들-취약한 변두리 공동체들-로 간주되던 자들의 시점에서 새롭게 생각해보려고 시도하였다. 이러한 선택은 신학적인 이유들에서뿐만 아니라, 자원에 초점을 맞춘 디아코니아의 형식들보다는 사람들에 기초한 디아코니아의 형식들-그들의 열망에서 비롯된-을 더 찾아내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디아코니아를 오늘의 세계에서 재규정할 때 그들의 참여를 확보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번 회의는 또한 생색내는 간섭으로부터 촉매적인 동반으로의 가능한 변화를 암시하려는 목표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셋째로, 현재의 많은 디아코니아 모델들이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북반구에 자리한 교회들의 견해와 선호도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번 회의는 삶의 양식이 현저하게 다른 지구촌 남반구의 시각에서 볼 때 디아코니아가 어떠한 모습일지를 탐구하고 싶어 했다. 첨언하자면, 북반구보다는 남반구에 더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이 소수 공동체들로 나누어져 있으며, 종종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변두리 속해 있는 사람들로서, 심각한 생존경쟁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 이러한 남반구 선호 경향은 지구촌 북반구가 이와 동일한 도전들이나 가능성들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것은 디아코니아와 그것의 반향에 있어서 북반구 교회들이 공헌한 바를 무시하고자 하려는 것도 아니다. 남반구 교회들을 향한 이러한 선택은 심사숙고 끝에 내려진 것이다. 남반구 교회들이 제공하는 다양한 삶의 표현들과 기독교적인 표현들을 염두에 두고서 말이다. 그리고 곤경에 처한 인간과 지구의 운명, 그리고 지구의 미래 등과 관련하여 그곳에서 생겨나는 복잡한 질문들 중의 일부에 답하려는 노력에서 말이다.

아래의 내용들은 위에서 언급한 시각에서 살펴본 주제에 관한 생각들을 요약한 것이다.

I. 교회와 선교, 그리고 디아코니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0:21)

1. 하나님의 선교는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성취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 세계에서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더 이상 우는 소리나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요, 사람들이 젊어서 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살 것이요, 수고의 열매를 즐길 것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재난으로 죽지 않을 것이요, 모든 이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맹수들이 변할 것이다”( 65:17-25). “새 하늘과 새 땅”( 21:1)을 향한 이러한 종말론적인 희망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끊임없이 현재의 삶으로 뚫고 들어오며, 지금 모든 곳에서 그러한 희망을 성취함으로써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도록 사람들을 초청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교는 역동적인 것이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거룩함과 순전함을 지탱하는 사람들과 힘들을 포괄하는 것이기도 하다.

2. 세례를 통하여 부름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공동체인 교회는 자신의 존재 자체와 선포와 봉사를 통하여 이러한 선교에 참여한다. 일반적으로 봉사로 이해되는 디아코니아는 공동체로서의 신앙과 희망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식에 해당한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에 대해서 증거하면서 말이다.

3. 자신의 디아코니아를 통하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서 증거한다. 자신의 디아코니아 안에서 교회는 자신이 섬기려고 왔지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셨던 주님-스스로 종이 되어 오신-의 길( 10:45)을 따른다.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지배 권력에 맞서 봉사의 힘을 드러내는 일에 부름 받은 존재이다. 그럼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충만한 생명이 가능해지도록 말이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다가올 통치의 한 표지로 자신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러한 통치에로 이끄는 길, 곧 그리스도의 길의 한 표지로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4. 교회는 디아코니아 공동체로서 자신이 속한 지역과 그보다 더 넓은 지역 모두를 포괄하는,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과 공동체적인 차원 모두를 포함하는 기독교적인 증거를 실천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이다. 이 점은 교회의 본질에 관한 다양한 모든 표현들에 잘 반영되어 있다: 예배와 선포, 환대와 고난의 실천( 13:1-3), 공적인 증거와 주장. “예전 후의 예전”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믿음이 경축하는 것에 의하여 힘을 얻게 되는 디아코니아는 보살핌과 구제와 봉사 등을 포함하지만, 더 나아가서 압제적인 체제들과 구조들에 담겨 있는 불의의 근원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까지 한다. 생명의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충성심이야말로 정의를 위한 지속적인 행동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죽음을 초래하는 제국의 권력에 맞서서 말이다.

5. 온갖 지정학적이고 사회경제적인 상황 속에 있는 모든 기독교 공동체는 디아코니아 공동체가 되도록 부름 받은 존재로서, 변화를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증거하되 하나님 통치의 약속을 드러내는 봉사의 실천을 통하여 그렇게 하는 존재이다. 그것은 모든 관계들을 치유하며,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위한 동역자 의식을 고양시켜준다. 삶과 정의와 평화 등의 온갖 쟁점들을 중심으로 하여 사람들과 공동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디아코니아는 일치의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하며, 그 자체로서 일치를 위한 도구로 이해될 필요도 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행동을 가리키는 한 가지 표현으로서의 디아코니아는 온갖 지엽적인 관심사들과 종교적인 증식의 차원을 넘어선다.

6. 디아코니아의 보다 확대된 제도적인 표현들 중의 일부는 위기 상황들에서 인간의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자원 개발을 가능케 하는 역할을 위하여, 그리고 취약민들의 정의와 경제 발전의 명분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확증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디아코니아의 형식들이나 다른 전통적인 형식들 중의 일부가 하부 구조와 제도들, 전문 기술, 자원 등에 의존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에, 많은 기독교 공동체들은 자신을 디아코니아의 후원자나 수익자로, 그리고 드물게는 디아코니아에 참여하는 자들로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이처럼 전문화된 사역들이 모든 기독교 공동체의 과제를 디아코니아적인 것으로 대체해주는 것은 아니다.

7. 하나님의 다가올 통치의 희망에 대한 믿음의 응답으로서 디아코니아는 역동적이고 상황적이며 다원적인 것이다. 그것의 표지들은 혼란 중에 겪는 모든 희망의 경험들에서, 사람들과 관계들을 치유하고 고양시켜주는 행동들에서, 그리고 정의를 추구하고 진리를 확증하고자 하는 노력들에서 발견된다. 디아코니아는 지구적인 차원에서 또는 보다 큰 교회 구조들의 차원에서, 그리고 회중들과 특별한 사역들 및 지방과 지역과 국가의 차원에서 정의와 평화와 인간 존엄성 등의 가치들에 헌신하는 사람들의 그물망 속에서 동역자 의식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

II. 변두리 사람들을 위한 디아코니아

“건축자가 버린 돌이....( 118:22; 4:11)

8.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디아코니아는 궁핍과 위기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기독교적 응답으로 이해되며, 자원들과 하부 구조를 가진 힘과 특권의 자리를 떠나 그들에게 이르는 행동들로 규정된다. 이러한 이해는 종종 궁핍에 처한 사람들을 디아코니아의 대상이나 수령인으로 간주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많은 박애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솔선 행동들의 길잡이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해는 변두리 사람들의 디아코니아를 인식하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단순히 디아코니아의 대상이나 수령인으로만 취급하였다. 디아코니아의 일부 형식들은 존중히 여기는 태도나 잠재력에 대한 인식 또는 지역 공동체들과의 협력 의식 등이 없이 추구되기도 하였다.

9. 약한 자들과 취약민들을 섬기려는 의도로 시작된 일부 디아코니아 사업들은 수년 동안 사회의 특권층과 부유층에게 봉사의 도구들로 여겨졌다. 불행하게도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일은 오늘날 세계의 많은 부분들에서 일부 기독교 교육 시설들과 보건 시설들의 활동 목표가 된 적이 거의 없다. 뿐만 아니라 이윤 추구와 소비주의에 초점을 맞춘 거대한 세계화의 물결 역시 전통적인 섬김의 구조들이 경제적인 활동과 이익의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함으로써, 섬김에 대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사회 경제적인 구조들에 의하여 무기력하게 된 자들에게 나아가는 일은 일부 교회들에게 더 이상 우선적인 과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일부 다른 디아코니아 사역들은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디아코니아는 우리와 같은 기독교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디아코니아 사역들을 잘못 사용해서도 안 된다. 교회들이 그 동안 이런저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선교의 길로부터 이탈한 것에 대하여 회개하는 일은 교회의 신뢰성 회복과 순전함 회복을 위해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절박한 것이다.

10. 변두리 사람들은 비록 많은 교회들이 늘 해오던 익숙한 방식으로 디아코니아를 실천할 수 있는 물질적이고 재정적인 자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할지라도, 그들 자신의 삶과 일상적인 저항 운동을 통하여 디아코니아를 실천하고 있다. 그들은 세상의 죄악성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으며, 세상이 자신의 죄악 연루 상황과 침묵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본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변두리 사람들을 선호하시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원해서 약해졌기 때문이 아니요, 온정주의적인 자비심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삶이 사회 변화의 급박한 필요성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11. 세계는 변두리를 불명예와 무기력함의 자리로 보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성서의 증언은 불의하게 사회의 변두리로 내몰리는 자들의 투쟁에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압제와 그로 인한 상실의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보살피는 사랑의 이야기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압제당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해방을 향한 그들의 여정을 지켜주시고 그들과 동행하심으로써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신다( 3:7-8). 바로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디아코니아이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정의와 평화를 보증하기도 하는 해방의 디아코니아이다.

12.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1:46) 이 비판적인 질문은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이러한 선교를 위하여 마련하신 중요한 출발 지점을 암시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디아코니아가 압제 당하는 자들을 자유롭게 하고 눈 먼 자들의 눈을 열어주며 아픈 자들을 고쳐주는 디아코니아라고 선포하신다( 4:16f.). 예수께서는 자신이 잃은 자들과 작은 자들을 찾으러 왔음을 계속 강조하심으로써, 끊임없이 그 시대의 변두리 사람들 사이에 머물러 계셨다. 그의 디아코니아는 권력 남용을 거부하며( 4:1-12), 지배적인 힘의 논리에 휘둘리는 것을 거부하시며( 10:45), 압제적인 종교 전통들에 맞서신다( 11:37-54). 도리어 그의 디아코니아는 자기 삶을 인정받지 못하는 자들을 회복시키는 일을 선택한다. 마침내는 그의 이러한 행동들이 그를 십자가로 이끌기는 했지만 말이다(이를테면 한쪽 손 마른 사람, 3:1-6). 이러한 선택을 통하여 그는 사람들을 변두리로 몰아내는 세력을 폭로하며 그 세력에 맞서신다. 이 점에 있어서 변두리 지역은 하나님의 긍휼과 정의를 위한, 그리고 약함과 저항의 자리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특별한 공간이다. 바로 그곳에서 아픈 자들이 치유되었고, 악한 영들의 통치가 분쇄되었으며, 변두리 사람들의 존엄성이 보호받았고, 제자들은 삶을 긍정하는 목회적 가치들로 무장할 수 있었다.

13. 뿐만 아니라 변두리 사람들은 항상 궁핍과 절망에 빠져 있는 자들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그리고 생명과 정의와 존엄성 및 자기 자신과 모든 사람들의 권리 등을 위한 투쟁을 통하여 불의와 압제에 저항하며,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자신의 삶 속에서 드러낸다. 예로써 장애를 가진 자들은 공감과 협력의 가치들을 증진시킨다. 아프리카 후손 공동체들과 인도의 불가촉천민, 그리고 차별 당하는 다른 공동체들은 교회들과 공동체들에게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차별하고 비인간화하는 문화들과 관행들에 맞서서 그것들을 극복할 것을 요청한다. 토착민들은 그들의 삶과 땅이 위협당할 때조차도 모든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가치를 옹호한다. 불행한 처지에 놓인 젊은이들은 교육과 고용의 기회를 빼앗는 정책들에 맞선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인 이주 노동자들은 인권과 존엄성과 정의를 위한 투쟁을 통하여 국익(國益)이라는 명분으로 기본적인 인권을 부정하는 정치 체제들에 도전한다. 이러한 모습들은 세계 구석구석에서 두루두루 발견된다. 지구촌 남반구에서도, 지구촌 북반구에서도 똑같이 발견되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들은 이러한 모습들에서, 그리고 해방과 변화를 향한 행동들과 연대들 속에서 디아코니아의 새로운 가능성들과 새로운 교회적 자기 발견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기에 변두리 사람들의 디아코니아는 하나님의 세계 통치, 곧 세계를 위한 대안적인 비전의 성취에 참여해야 하는 교회의 역할에 대하여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4.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경우, 변두리 사람들의 언어는 사람들을 체제들과 구조들의 희생물로 규정하거나 그러한 희생물로 격하시키는 방식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디아코니아는 그러한 구조들의 파괴적이고 비인간화시키는 힘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이 처한 현실의 비극적인 효과들을 지적할 뿐만 아니라, 세계의 변화를 위한 변두리 사람들의 요구와 합법적인 권리와 힘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사람들이 물건들과 소모품으로 취급되고 성과 인종과 피부색과 계급과 나이와 장애와 성적인 지향성과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위치 등과 같은 정체성 때문에 차별당하는 세계에서, 디아코니아는 사람들과 공동체들을 세우고 모든 사람들의 존엄성을 확인시켜주며 특정한 사람들을 차별하고 학대하는 문화들과 관행들을 고쳐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15. 변두리 사람들은 존엄성과 정의에 기초한 삶을 향한 열망을 통하여, 그리고 그런 일을 이루기 위한 행동들에 참여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정의와 존엄성과 생명을 부정하는 세력들로부터 자유로운 세계를 목표로 하는 대안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많은 교회들에게 대하여 하나의 강한 도전이 되지만, 디아코니아의 실천과 신학적인 반성에 관한 전통적인 모델들을 새로운 포괄주의와 공유 및 변혁 행동 등의 양식들로 갱신할 수 있도록 돕는 약속의 의미를 훨씬 더 강하게 가지고 있다. 예수께서도 다가올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는 사역을 시작하면서 자신이 그 시대의 변두리 사람들 중에 속해 있음을 발견하셨다. 세계 전역에 있는 대다수의 기독교 회중은 몇 가지 요인들 때문에 대부분 가난하거나 변두리에 처한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현실은 더욱 확실한 초교파적 참여를 위한 기회와 수단으로 여겨질 필요가 있다. 변두리 사람들과의 상호 협력과 연대는 교회들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고 있다는 주장의 신뢰성을 보증해줄 것이다.

III. 변화를 위한 디아코니아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6:8)

16. 그러기에 디아코니아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삶을 경축하게 만드는 봉사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여기에서 지금 항상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 실재하는 것이 되도록 사람들과 상황들의 변화를 유도하고 또 실제로 변화를 가능케 하는 믿음이다.

17. 성서의 하나님은 삶의 구체적인 상황들 속에서 변화를 추구하시며 이끄신다. 특히 그들 자신의 삶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가 그렇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행동으로서의 디아코니아는 사람들과 체제들과 문화들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권력을 남용하고 가난한 자들의 정의를 무시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선고하신다. 예수께서도 불의한 체제들과 관행들에 도전하셨으며, 그러한 것들로부터 이득을 얻는 강자들과 특권층에게 회개하고서 사랑과 나눔과 신실함과 겸손 등의 가치들로 변화될 것을 촉구하셨다.

18. 디아코니아는 희생자들의 상처를 싸매주거나 긍휼의 행동을 취하는 것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러한 사랑과 보살핌의 표현들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러한 표현들은 고통과 상실을 초래하는 세력들과 요인들에 맞서서 그것들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배제하지 않는다. 디아코니아 사역은 이렇듯이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통치자들과 권세들”( 6:12)에 맞서는 행동 모두를 포함한다. 그것은 희생시키는 자뿐만 아니라 희생자까지도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급진적인 투쟁의 영성을 의미하며, 죄악스런 사회 구조들의 변화를 위한 헌신을 뜻함과 아울러, 그러한 구조들에 의하여 희생된 자들의 해방을 위한 헌신을 뜻하기도 한다. 변화를 위한 활동이 없다면 디아코니아는 단순한 봉사의 표현에 지나지 않을 것이요, 압제와 착취를 행하는 세력들의 이익에 교묘하게 이바지할 것이다. 그들의 상호 협력관계를 덮어버림으로써 말이다. 만일에 디아코니아가 불의와 권력 남용에 맞서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을 만한 디아코니아가 되기를 중단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19. 디아코니아는 또한 피상적인 평화와 친절의 표현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디아코니아는,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6:14)라는 말에 표현되어 있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분노에 공감함으로써, 종종 불의하고 압제적인 현실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강한 자들과 특권층의 그러한 시도들을 폭로한다. 예언적인 행동을 뜻하기도 하는 디아코니아는 그러한 세력들에게 진리를 말하는 행동을 포함하기도 한다.

20. 오늘날의 세계에서 디아코니아는 불의한 군사력과 경제력에 맞서는 정치적인 행동을 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필요들과 인간 개발보다는 자기 방어에 더 많이 투자하는 것으로 보이는 국가 정치에 이의를 제기하며, 박탈당하고 내쫓긴 자들의 생존권을 부정하는 반이주법에 반대하고, 땅과 사람들을 파괴하는 개발 정책에 반대하며, 사회 경제적인 구조들에 의하여 상처 입은 자들과 함께 일하고 그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21. 디아코니아는 단순히 가부장제, 인종차별, 계급제도, 외국인 혐오증 등과 그 외의 다른 차별적이고 배타적인 관행 등의 압제적인 문화들을 해체하려는 목적을 가진 사회적인 행동을 뜻할 수도 있다. 교회들은 이러한 문화들이 자신 안에 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회개할 필요가 있다. 사회의 특정 구성원들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태도와 신학적인 작업들에 대해서도 회개할 필요가 있다.

22. 그러나 디아코니아는 악에 저항하거나 맞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간에 관계를 맺거나 자연과 관계를 맺는 방식들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 점에서 볼 때 디아코니아는 변혁적인 것이다( 12:2). 종으로 오신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누룩으로 부르셨다( 5:13-14). 달리 말해서 변화와 변혁을 이루어야 할 자들로 부르신 것이다. 초기 교회 공동체의 디아코니아는 성령의 힘에 의지하여 대안적인 가치들과 세계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제국의 권력에 저항하였다. 따라서 디아코니아는 궁핍에 처한 자들을 지원하고 돕는 행동을 표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이 그토록 원하시는 세계를 이루려는 창조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다.

IV. 도전들과 기회들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43:19)

23. 21세기의 세계정세는 각종 도전들에 더하여 세계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정의와 존엄성과 생명 등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면서 투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여기에 오늘의 교회들이 많은 창조적인 방법들로 디아코니아를 시도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들이 놓여있다. 교회들은 그런 일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새롭게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각각의 상황에 맞는 무수한 다른 기회들과 가능성들이 존재할 수도 있다. 보다 진전된 생각과 행동을 위하여, 이번 회의 도중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 바 있는 아래의 통찰력 있는 제안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a. 지역 회중들의 디아코니아
1.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이 디아코니아 공동체들로 존재하는 곳에서 그들의 삶이 처해 있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현실을 인식하도록 하라. 기독교 교육은 사회적인 책임감을 키우는 데 목표를 두지 않으면 안 된다.
2.     예배와 선포를 통하여 디아코니아의 신학적인 중요성을 깨닫고 확증하는 일에 힘쓰라. 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 일에 창조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훈련장이 될 필요 가 있다.
3.     환경 문제와 관련하여 사람들의 수준에 맞춘 행동을 적극 시도하라.
4.     가정과 공동체와 교회 안의 여성들을 향한 학대와 폭력의 현실에 분명하게 응답하라.
5.     사람들에게 알코올 중독과 약물 남용에 맞서도록 교육함으로써, 희생자들로 하여금 그러 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게 하라.
6.     솔직하고 정의롭고 친절하고 너그러운 공동체가 되도록 하라. 교회들은 차별 없는 공간, 그리고 안전과 희망의 성소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7.     상담, 탈중독 프로그램, 교육과 취업의 기회, 성적 감수성 등의 영역에서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수용 능력을 키우도록 하라.
8.     각각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삶의 문제들에 대해서 다른 교회들, 다른 신앙 공동체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주도적인 행동과 협력관계를 유지하 도록 노력하라.

b. 보다 큰 교회 집단들의 디아코니아
1.     지역 교회들이 디아코니아 사역을 통하여 그들 자신의 문제들에 응답할 때 그들을 격려하고 후원하고 그들과 동행하도록 하라.
2.     다른 무엇보다도 특히 도시와 농촌, 부자와 빈자, 정착민과 이주민 사이를 연결함으로써 연대감과 상호 책임의 표현들을 격려하라.
3.     교회 안에 있는 차별과 배척의 문제들에 대해서 언급하되, 안팎에서 그러한 문제들을 종결 짓기 위한 운동을 시작하라.
4.     후천성 면역 결핍증, 장애, 가난, 식품 안전, 환경 청지기 등의 문제들과 관련된 정책들과 프로그램들을 개발하라.
5.     인권, 정의, 변두리 공동체들의 권리 등의 대의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예언적인 목소리들과 행동들을 인정하고 강화시켜주고 지원하도록 하라.
6.     일반 대중에 기초한 능동적 행동을 격려하기 위하여 지역 차원과 국가 차원에 속한 교회들 및 조직들과 협력관계를 세우도록 하라.
7.     신학 기관들로 하여금 필요한 모든 곳에서 디아코니아를 교육과정에 포함시키도록 격려하고, 이와 관련하여 디아코니아 실습을 위한 심화 연구를 계속 진행하도록 하라.
8.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디아코니아 관련 성서 연구 자료들을 개발하라.
9.     다른 신앙 공동체들에 속한 사람들과 함께 디아코니아 사역에 참여하라.

c. WCC 및 이와 유사한 국제기구들의 디아코니아
1.     디아코니아를 교회의 본질적인 표현으로 인식하라. 그리고 그러한 기구들의 우선적인 소명이 교회들을 위하여 일정한 디아코니아 사역을 시도하는 데 있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교회의 주도적인 노력을 수반하는 것임을 인식하라. 이것은 능력 개발, 협력관계 증진, 자원 동력화 등을 포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말이다.
2.     사람들과 공동체들 및 회중들과 함께 인종 차별과 인간 소외에 맞서 투쟁하도록 하라.
3.     정의와 존엄성과 평화 등의 대의명분을 옹호하고, 이유 없는 공격과 추방과 강탈 등에 희생된 자들을 옹호하도록 하라.
4.     변화를 위한 일반 대중의 주도적인 활동들을 지원하고 격려하도록 하라. 그러한 활동들 중의 일부는 도움을 받는 데 필요한 가시성과 하부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5.     다양한 교회 협력의 양식들을 격려하고 상호 책임성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국제적인 디아코니아 기구들과의 대화를 활성화시키도록 하라.
6.     다양한 상황에서의 창조적인 디아코니아 참여를 위한 신학적인 지원의 교회 간 교류를 가능케 하는 자원들을 준비하면서 그러한 교류과정을 활성화시키도록 하라.
7.     변화를 위한 투쟁에 있어서 상호 연대의 힘이 크다는 것을 올바로 인식하라. 그리고 모든 차원에서 그러한 상호 연대의 표현을 가능하게 하고 격려하고 육성토록 하라.

24. 지금 이 시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된 디아코니아는 때때로 현상 유지에 연연하는 세력들과의 대결을 포함할 수도 있다. 때로는 사랑과 겸손과 용기와 헌신의 태도를 필요로 하는 위험이 불가피하게 닥쳐올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직이 십자가의 그늘 아래에서 표현되기를 원하는 것임을 강조하신다( 16:24). 따라서 교회들은 섬김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려놓으신 그리스도의 길에서 봉사의 사명을 위해 함께 부름 받은 공동체들로서, 베드로전서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서 서로를 격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3-16).


<강성열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