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C 문서 6-2 - 봉사 - 역대 WCC 봉사신학문서 해설

KHC기획위원회+한국교회희망봉사단
WCC 봉사신학세미나
2013. 9. 2.() 동숭교회

에큐메니칼 관점에서 본 봉사 Diakonia에 관한 신학적 성찰
-      WCC가 발표해 온 봉사에 관한 역사적 문서들에 대한 해설 -

박성원 (WCC 중앙위원, 한국준비위원회 기획위원장)

이 글은 WCC가 태동기 때부터 발표해 온 봉사 diakonia에 관한 문서들을 살펴보고 성찰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다루려고 하는 역사적 문서는 다음의 다섯 문서들이다:

1.      삶과 일세계기독교대회 메시지 Message (1925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세계기독교대회에서 채택된 메시지)
2.      교회간 원조 세계대회 요약보고 Summary Report (1966년 영국, 스완위크에서 열린 교회간 원조 세계협의회에서 레슬리 쿠크가 발표한 요약보고)
3.      라나카선언 Larnaca Declaration (1986년 싸이프러스, 라나카에서 열린 WCC 세계봉사협의회에서 선포된 선언문)
4.      나눔의 가이드라인 Guidelines for Sharing, Guidelines for Sharing (1987년 스페인, 엘 에스코리알에서 열린 WCC 세계봉사협의회에서 채택된 정책문서)
5.      21세기 봉사의 신학적 근거 Theological Perspectives on Diakonia in the 21 century  (2012년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열린 WCC 정의, 봉사, 포괄적 공동체국과 선교와 전도국이 공동주최한 WCC 봉사신학협의회에서 채택된 문서)[i]


이 문서들을 살펴보는 목적은 세 가지다.

첫째는 세계교회협의회 World Council of Churches부산총회를 개최하면서 한국교회가 WCC와 에큐메니칼운동을 이념적 선입견이나 표층적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고 신학적,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함이다.

둘째는 WCC의 에큐메니칼 봉사가 어떤 지구정치적,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행해져 왔으며 이런 봉사의 경험에 따라 에큐메니칼 봉사신학 ecumenical theology of diakonia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살펴보기 위함이다.

셋째는 에큐메니칼 봉사신학을 살펴봄으로써 한국교회의 봉사가 어떤 신학적 의미를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여야 하는지 생각해 보기 위함이다.

디아코니아가 WCC창설과정에 신학적으로 자리매김한 과정
2008년에 발행된 WCC홍보자료에 보면 WCC가 지향하는 가치 혹은 비전을 일치, 증언, 봉사”, 이렇게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이 세 가치는 20세기 초 에큐메니칼운동이 태동할 때부터 WCC가 에큐메니칼 삶과 증언을 해 온 지난 65년여 동안 일관되게 지켜온 가치들이다.

그런데 일치, 증언(선교), 봉사는 각각 독립된 가치가 아니라 삼위일체처럼 서로 다른 세 개의 개념이지만 하나의 가치로 연결되어 있는 유기적 개념이다. 이것은 근대 에큐메니칼운동의 태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에큐메니칼운동의 모태로 인식되는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의 두 열쇠개념은 선교와 일치로서 일치하여 선교한다는 두 가치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이었다.

에딘버러 대회에서는 관심은 교회 내적 차원의 관심이었다. 교회 내적 차원으로 시작된 이 에큐메니칼 도전은 1914년 세계 제1차 대전이 촉발되면서 에큐메니칼운동의 박동을 역사상황 속에서 교회 내외적으로 훨씬 더 강력하게 뛰게 했다. 교회 내적으로는 교회의 일치를 그냥 협력적 차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의 교회’ One Church of Christ란 심층적 차원의 물음으로 심화하고 교회 외적으로는 복음이 구체적 역사 상황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묻는 삶과 봉사 diakonia의 과제로 확대하기 시작했다.

1910년 에딘버러 이후 두 가지 중요한 에큐메니칼 샘이 솟기 시작했다. 한 샘의 진원지는 정교회 쪽이었고 다른 한 샘은 서유럽 개신교회쪽에서였다. 1919 1월 에큐메니칼 총대주교청 Ecumenical Patriarch은 제1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서구 열강이 국제연맹 Koinonia ton Ethnon을 창설하는데 자극을 받고 교회연맹 Koinonia ton Ecclesion을 창설할 것을 제안했다. 한편 서구 개신교회에서는 스웨덴 루터교회 대주교 죄더블롬 Söderblom의 주도로 시작된 삶과 일” Life and Work의 흐름을 중심으로 한 세계교회일치 Ecumenical Council of Churches운동이 제안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두 샘이 분출한 것은 신학적 동기가 아닌 서구가 세계 제1차 대전을 경험한 역사적 삶의 충격에서였다. 정교회의 제안의 배경에는 세계 제1차 대전의 충격과 더불어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제국이 해체되면서 그 동안 억압되었던 교회의 자유가 찾아오자 교회가 하나됨으로 한 목소리를 내고 그로써 세상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분열된 상태로는 세상에 대한 영향을 제대로 끼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반면 서구 개신교회가 주도한 삶과 일운동은 기독교복음이 역사 현실속에서 구체적으로 증언되어야 한다는데서 출발했다. 세계대전으로 초토화된 유럽의 재건을 위해서는 교회가 하나되어 협력해야 하고 복음을 사회현실에 적용하는 응용신학 applied theology이 필요했다. 삶과 일을 주제로 1925년 스톡홀름에서 세계기독교대회가 열렸는데 여기에서 채택된 메시지가 바로 WCC가 발표한 봉사에 대한 첫 번째 메시지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정교회의 제안이 교회의 일치를 추구하면서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상황에 대한 응답의 차원이었고 서유럽 개신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도 복음의 사회참여만에 관심을 둔 것이 아니었다. 봉사는 결국 교회일치를 지향하는 운동이었다. , 봉사하며 일치하고 일치하여 봉사하자는 뜻이었다. 중요한 것은 일치와 선교는 신앙적 일이고 봉사는 교회의 사회적 참여가 아니라 봉사, 그 자체가 이미 신앙고백의 행위이고 복음증거의 행위이며 예배의 일환 liturgy after liturgy임을 에큐메니칼운동의 초기에 이미 인식하고 시작한 것이다. 봉사는 신앙 외적 문제가 아닌 신앙 내적 문제라는 인식이 에큐메니칼 봉사신학을 이해하는데 첫 번째 중요한 점이다.

이후 봉사는 일치, 선교, 기독교교육과 더불어 에큐메니칼운동의 4대 지류중의 하나로 WCC안에 자리잡게 되었다. 1938년에 창설할 목표였으나 제2차 대전 발발로 연기되어 1948년에 창설되었으나 공식 창립 전까지인 1939년부터 1948년까지 제네바에서는 교회간협력국 Interchurch Aid, 난민봉사국 Service to Refugees, 국제국 International Affairs, 에큐메니칼 대출기금 Ecumenical Church Loan Fund, 에큐메니칼 연구소 Ecumenical Institute, 청년국 Youth Department등의 부서들이 활동을 시작했다. 대부분은 봉사와 관계된 부서였던 데서 보듯이 초기 WCC가 하는 일의 대부분이 봉사와 관련된 일이었다.

WCC의 봉사활동은 WCC 역사속에서 조직과 프로그램 차원에서 시대적 과제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사무국에 자리하게 된다:

-       난민과 교회간 원조부 Department of Refugee and Inter-Church Aid (1945),
-       교회간 원조, 난민, 세계봉사 분과 Division of Inter-Church Aid, Refugee and World Service (DICARWS, 1960),
-       교회간 원조, 난민, 세계봉사 위원회 Commission on Inter-Church Aid, Refugee and World Service (CICARWS, 1971)
-       4; 나눔과 봉사 Unit IV; Sharing and Service (1992)
-       프로그램 4. 정의, 봉사, 창조의 책임 P4. Justice, Diakonia and Responsibility for Creation / 프로그램 3국 공공증언: 권력을 도전하고 평화를 천명하기 P3. Public Witness: Addressing Power, Affirming Peace (2007)

그리고 봉사문제를 다루기 위한 기구도 국제위원회 Commission of the Churches on International Affairs, 교회개발위원회 Commission on the Churches’ Participation in Development, 함께 하는 교회행동 Action by Churches Together (ACT International), 그리고 현재는 함께 하는 교회행동 연맹 ACT Alliance등 여러 개로 구성되었다.

난민, 긴급구호, 인권, 원주민, 장애우 등 여러 이슈에 대한 개별적 봉사과제 이외에도 WCC가 종합적 차원의 접근을 해 온 대표적 프로그램은 1970-80년대의 인종차별철폐운동 Programme to Combat Racism, 1990년대의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 Justice, Peace and Integrity of Creation, 2000년대의 인간과 지구를 생각하는 대안지구화 Alternative Globalization Addressing People and the Earth들이다.

역사적 문서에 나타난 봉사에 대한 에큐메니칼 관점의 변천

WCC는 역사적 도전에 따라 에큐메니칼 증언을 해 오면서 봉사에 대한 어떠한 신학적 사고의 변화를 일으켜 왔는가?

1.      삶과 일세계기독교대회 메시지 Message from Universal Christian Conference on Life and Work, 1925 스웨덴, 스톡홀름

1925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세계기독교대회에서 채택된 이 메시지는 WCC가 창설되는 과정에서 나온 문서이지만 근대 에큐메니칼운동이 봉사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천명한 첫 번째 문서이다. 이 문서는 당시의 심각한 세계역사적 현실을 배경으로 작성되었다.

유럽과 유럽교회는 인류역사 초유의 세계대전을 일으킨 당사자로서 두 가지 당혹감에 사로잡혔다. 한 가지는 소위 과거의 기독교권이라는 유럽전체가 전대미문의 전쟁에 휘말리면서 역사현실속에서 교회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었고 또 한 가지는 분열된 교회로서는 세상에 대응할 수 없다는 자괴감이었다. 이 역사적 현실이 메시지 서두에 그대로 나타난다. “세상은 분열된 교회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강하다.” 이 역사적 현실의 도전은 교회의 디아코니아가 어려운 사람을 소박하게 도와주는 소프트 디아코니아가 아니라 역사현실 그 자체에 대응하는 하드 디아코니아의 성격을 지녀야 한다는 에큐메니칼 디아코니아 관점을 초기부터 설정하기 시작했다.

메시지는 뒤이어 신앙과 직제의 차이를 잠시 접어두고 현실적인 삶에 먼저 연합된 모습으로 나서야 한다는 점을 재촉한다. 다시 말하면 선 일치 후 봉사가 아니라 선 봉사 후 일치를 도모하자는 것이다. 에딘버러 선교대회의 모토가 일치하여 선교하자는 것이었다면 스톡홀름 삶과 일 대회의 모토는 봉사하면서 일치하자는 셈이었다. 1910년 에딘버러 대회이후 미국 감리교의 브란트 Charles Brent감독의 주도로 교회일치에 있어 선교나 봉사만 다룰 것이 아니라 실제 교회분열의 원인인 교리나 직제 문제도 다루어 보자며 신앙과 직제운동을 제창했다. 그러나 교리에 대한 논쟁은 끝이 없었다. 이 에큐메니칼 피곤 때문에 나온 유명한 말이 교리는 분열하고 봉사는 연합시킨다 doctrine divides, service unites”란 말이다. 그래서 메시지는 우리의 목표는 이제 신앙과 직제에 대한 우리의 차이를 잠시 접어두고 그리스도인의 삶과 일에 있어서 연합된 구체적 행동을 구하는 것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점은 교회의 봉사참여의 폭이다. 메시지는 산업, 사회, 정치, 국제관계 등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을 디아코니아의 영역으로 보자는 것이다. 경제와 관련하여 인권이 재산권보다 우선하며 산업의 목적은 개인의 재산불리기가 아니라 공동체를 봉사하기 위함이라고 경제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분명히 밝혔다. 심지어 인간의 권리가 구원의 권리 중에 첫 번째 권리”(6)라고 선언한 데서 당시 기독교가 인권을 구원의 관계를 이미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에 사회문제에 관한 신학적 관점을 정리하는데 사회문제는 결코 개인의 힘으로만 해결할 수 없고 공동체가 공동책임으로 받아들여야”(7) 한다고 규정함으로서 사회문제의 공동책임성을 분명히 했다. 더 나아가서 개인의 인권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인권이 존중될 수 있는 사회전체의 도덕성, 오늘의 언어로 말하면 사회정의가 이룩되는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며 사회정의세우기가 교회디아코니아의 중요한 도전임을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 동시에 여성, 노동자, 어린이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민감성도 이미 가지고 있었다(7).

메시지는 한 지역사회에서 국제관계로 넘어가 민족적 편협성공허한 세계주의를 모두 거부하고 기독교적 국제주의의 표준적 지침을 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8). 이 부분은 오늘의 지정학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다소 기독교 배타적 시각이 있으나 기독교는 국제평화와 정의의 영역도 기독교증언에 포함된다는 인식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에 구체적 행동을 논의했는데 첫 번째 중요한 것으로 인식한 것이 교육이었다(10). 수련회, 연구, 기도 등에서 디아코니아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며 이 교육은 디아코니아의 기술적인 부분 보다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영적 준비라든지 인간의 의지를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종속시켜야 한다든지 하는 디아코니아의 신학적이고 영적인 차원의 교육이 먼저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메시지는 아주 단언적인 결론을 내린다. 신앙인이 하나님에게 삶의 뿌리를 하나님에게 두고 그 삶을 개개인이 실천하지 않으면 결국 기독교의 이상으로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은 요원하다고 밝히고 있다(11).

그리고 이 봉사의 길을 교회 혼자만 가려 하지 말고 청년운동, 노동자운동 등 시민운동과 함께 가야 하고 봉사의 길에 영향력을 높이려면 교사와 학자들의 전문적 도움이 필요함을 역설했다(12.

메시지는 교회의 사명이 세상의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에 있다고 하면서도 그 뿌리를 신앙에 깊이 두고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특히 세상적 배경은 서로 달라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라는 공통뿌리를 함께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내면적 일치가 되고 이를 통해 진정한 일치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2.      교회간 원조 세계대회 요약보고 Summary Report (레슬리 쿠크), World Consultation on Inter-Church Aid, 1966, 영국, 스완위크

1960년대는 세계상황이 세계 대전 이후 급격한 변화하는 사회재편시기였다. 세계남반구는 1950년대와 60년대를 거치면서 탈식민지화와 독립운동을 거치게 되고 1960년대는 독립 이후의 사회개발이 주요 관심사인 시대였다. 서구에서는 학생혁명 등 사회변혁적 혁명의 기운이 솟아오를 때였다.

이 시기에 디아코니아와 관련하여 세 가지 중요한 에큐메니칼 모임과 프로그램이 있었다. 첫 번째는 1966년 스완위크에서 열렸던 교회간 원조에 대한 세계대회였고 둘째는 같은 해 제네바에서 열렸던 세계 교회와 사회 대회였다. 세 번째는 WCC안에 교회개발참여위원회 Commission on the Churches’ Participation in Development를 설치하게 된 일이다.

제네바 교회와 사회 대회는 참석자 420명중 대다수가 평신도였던 대회로서 교회는 정치, 경제, 문화, 과학, 기술 등 사회전반의 문제에 대한 주도적이고 책임적인 참여를 해야 한다는 에큐메니칼 설정을 한 대회였다. 이 후 세계교회 안에는 사회부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교회개발참여위원회 CCPD의 설치는 신생독립국이 개발시대로 돌입하면서 개발대상화 되어가는 상황에서 신생국이나 가난한 자나 억압받는 자가 개발에 주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이를 추진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스완위크 교회간 원조대회는 이런 맥락에서 열린 것으로 디아코니아가 단순히 구호차원에서 사회진보차원으로 진일보해야 한다는 에큐메니칼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진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나타난 사고의 전환을 1955년부터 1967년까지 WCC 교회간 원조, 난민, 세계봉사국 국장이었던 레슬리 쿠크가 세 가지 중요점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 번째 중요한 것은 디아코니아는 단순히 원조를 조직하고, 주고 받고 하는 차원에서 넘어가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디아코니아의 궁극적 목표점은 교회와 사회의 구조변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중요한 점은 공동체성과 투명성, 객관성을 담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기의 원조는 주로 친분관계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것은 또 다른 소외와 계급화를 낳을 수 있고 봉사에 부패가 생겨날 수 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교회의 디아코니아가 공공성과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고 교회간의 일치도 진정성을 띨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파악한 중요점은 당시 교회의 원조가 세상을 대상으로 보고 접근했는데 앞으로는 세계를 위해 봉사한다는 개념의 차원을 넘어서세상과 더불어,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참여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중대한 신학적 전환이었는데 이원론에 근거하여 세상을 속된 것으로 대상화하던 신학에서 세상은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낸 곳임을 인식하고 세상이 바로 교회의 자리 locus임을 인식하는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3.      라나카선언 Larnaca Declaration - 세계봉사협의회 WCC Consultation on Diakonia에서 선포된 선언문, 1986, 싸이프러스, 라나카

1970-80년대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적 하이라이트를 장식한 시기였다. 1968년 웁살라에서 개최된 WCC 총회 중 가장 진보적인 총회였던 제4차 총회가 정의를 에큐메니칼 증언의 열쇠개념으로 등장시켰고, 1975년 나이로비에서 열렸던 제5차 총회는 아프리카교회의 의존성을 극복하기 위해 소위 선교모라토리움을 선언하는 등 자유혹은 자주를 에큐메니칼 열쇠언어로 등장시켰다. 1983년 뱅쿠버에서 열렸던 제6차 총회는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을 이 시대의 가장 급박한 교회증언의 과제로 설정한 총회였다.

뿐만 아니라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에큐메니칼 헌신을 구체화하기 위해 WCC역사상 가장 논쟁적이었던 인종차별철폐프로그램 Programme to Combat Racism도 이 때 시작했고 1961년 뉴델리 총회부터 불거져 나온 종교간의 대화도 이 시대에 부각된 에큐메니칼 이슈이다. 또한 점점 가속화하는 과학기술의 발달에 직면한 세계교회는 제5차 총회 이후 정의롭고, 참여적이고, 지속가능한 사회” Just, Participatory, and Sustainable Society”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1979년에는 미국 M.I.T.에서 과학과 신앙 세계대회를 열고 과학과 신앙은 어떻게 만나냐 하는지를 논의한 것도 이 시대였다.

1986년 사이프러스 라나카에서 열린 세계디아코니아대회는 70-80년대 산업화, 도시화, 근대화로 강도 높게 드라이브를 건 인류문명의 진보과정에서 파생되고 있던 여러 가지 우려할 문제들에 대한 에큐메니칼 응답의 차원에서 개최되었다.

라나카 선언으로 명명된 협의회 최종 메시지는 내용에 있어서는 그리 많은 정보를 함유하고 있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관점에 있어서는 상당한 변혁적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서두에 모두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러 오셨다’(10:10)는 예수의 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따라 기독교봉사는 생명봉사임을 밝히고 시작한 선언서는 세 가지 중요한 변혁적 관점을 표명하고 있다.

첫 번째로 세상의 자원에 대한 소유권이 어디에 있는지 신학적으로 분명히 밝혔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다라고 시작한 선언서는 하나님의 영적 물질적 자원은 모든 사람에게 속해 있고 그것을 사용함에 있어 모두에게 참견할 권리가 있다.”고 함으로써 자원은 어느 개인이나 어떤 국가, 어떤 특정한 계급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두에게 주신 것이므로 모든 사람들이 그 소유권에 대한 결정권과 사용권이 있다는 것이다. 이 시각은 디아코니아에 있어서 전통적 구조인 시혜자-수혜자의 구조를 넘어서자는 것이다.

둘째로 나타낸 변혁적 관점은 부당한 구조와 체제를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범자에 해당한다는 인식이다. 라나카협의회는 1966년 스완위크 협의회 이후 이십 년이 지났지만 오히려 세계의 고통이 증가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이런 상황을 변화시키지 않고 계속 고통을 야기시키게 한다면 이는 교회와 사회의 구조와 체제를 암묵적으로 은연중에 지탱해 온 공범자이라고 인식한 것은 아주 과감한 인식의 변화이다. 이런 인식을 서구교회는 아주 주저한다.[ii]

라나카 선언서가 표현한 세번째 선언한 중요한 개념은 예언적 봉사 prophetic diakonia란 표현이다. 선언서는 카리브해 Carribean에서 아르메니아 Armenia에 이르기까지 당시 전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정치적 억압, 경제불의, 사회적 소외, 문화적 압살 등 모든 종류의 이슈들을 열거하며 세계 민중들이 골리앗과 같은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조직에 맞서 싸우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그 투쟁의 전면에 낮선 청년들과 여성들의 투쟁을 크게 치하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민중들의 투쟁을 예언적 봉사라 규정하고 이들과 함께 해야 함을 역설했다. 디아코니아에서 일반적으로 수혜자로 인식되고 있는 이들의 투쟁을 예언적 봉사라고 규정한 것은 놀라운 사고의 전환이다. 이 인식은 정의는 힘없는 자들이 함께 분기할 때까지는 권력자들이 결코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는 표현에 그대로 나타난다.

그리고 선언서는 정의와 평화가 가장 중요한 봉사의 과제임을 상기하고 예언적 봉사 속에 투쟁하는 민중들과 동일화하고 연대할 비전을 제시했다.

4.      나눔의 가이드라인 Guidelines for Sharing, Guidelines for Sharing - WCC 세계봉사협의회 WCC Consultation on Koinonia에서 채택된 정책문서, 1987, 스페인, 엘 에스코리알

라나카 선언서가 발표된 이듬해인 1987년에 모인 엘 에스코리알 협의회는 지금까지 WCC가 발표해 온 디아코니아에 관한 입장 중에 가장 진보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엘 에스코리알 지침의 핵심은 열 세가지 항목의 다짐으로 열거되었는데 이것은 종합하면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앞으로 디아코니아는 세계에 근본적으로 새로운 가치 체계 세우기로 나아가야 한다(다짐 1). 이것은 구체적으로 모든 차원에서 제3세계 민중과 부의 착취로 연결되는, 그로 인해 가난과 생태파괴가 양산되는 불의의 구조와 그 원인을 규명하고, 폭로하고, 맞섬으로써” “새로운 경제, 정치 질서를 위해 일할 것을 의미한다(다짐 4). 이것은 불의의 원천인 뿌리는 건드리지 않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현상에 대한 응답만으로서의 디아코니아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디아코니아이므로 에큐메니칼 나눔의 행동은 이 차원을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남반구 민중들에게 외채를 갚기 위한 원조를 제공하고 원금보다 훨씬 더 많은 자원을 빼앗아가는 등 구조적 착취를 하는 IMF와 같은 국제기구에 저항하고 하나님의 정의에 기반한 새로운 국제기구의 출현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다짐 10). 이 도전은 오늘에도 이어져서 세계개혁교회연맹이 제안하고 WCC와 루터교세계연맹 등이 함께 참여하는 새로운 국제금융기구의 출범을 촉구하는 에큐메니칼 도전이 지금 전개되고 있다.

둘째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은 수혜자, 시혜자의 부당한 구분을 완전히 끊는 것이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시혜자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수혜자는 항상 받는 입장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모든 자가 다 서로 주고, 서로 받을 것이 있다는 것이다(다짐 8). 사실 남반구 교회는 물질적 부족은 있으나 영성과 문화는 더욱 풍부할 수 있고 북반구의 물질적 여유를 가진 사람들은 오히려 영적 궁핍에 빠져 있을 수도 있는 셈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절대적 기부자도, 어떤 절대적 수요자도 없는, 모두가 충족되어야 할 존재”(다짐 7)임을 인식하고 우리가 가진 것의 나눔에 있어서 모든 것을 놓고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의사결정에 모두가 참여하는 동반자적 구조로 가야 한다(다짐 2)는 것이다. 사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준”(2:45) 초대신앙공동체에는 이 보다 훨씬 더 진보적인 실천을 이미 한 바 있으나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이런 사고의 전환은 상당히 진보적인 것이었다.

셋째로 부각된 것은 연대이다.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 그리고 교회와 사회에서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그들의 조직과 연대하여 투쟁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심지어 다른 신앙과 이념을 가진 단체와도 연대할 것을 다짐했다(다짐 9이 투쟁을 훼손하면 주는 자로서이건, 받는 자로서이건나눔의 참여를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다짐 3). 그리고 각국, 지역, 국제 등 모든 차원에서 에큐메니칼 나눔을 촉진하고 강화해 나가기를 다짐했다(다짐 10).

5.      21세기 봉사의 신학적 근거 Theological Perspectives on Diakonia in the 21 century – WCC Justice, Diakonia, Just and Inclusive Communities 국과 Mission and Evangelism국이 공동 주최한 WCC 봉사신학협의회, 2012, 스리랑카, 콜롬보.

엘 에스코리알 나눔의 지침이 나온 지 25년만인 2012년 새로운 디아코니아 문서가 나왔다. 2012 6월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열린 이 디아코니아대회의 특징은 WCC의 또 하나의 지류인 선교와 전도위원회와 함께 했다는 점이다. WCC안에는 일치, 선교, 증언봉사, 교육, 이렇게 네 지류가 있다. 이 네 지류는 신학적 입장에 있어서 늘 약간씩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진보성 순으로 말하면 증언봉사-교육-선교-일치 순이다. 일치와 증언봉사는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교회가 우선이냐 사회가 우선이냐 하는 논쟁만큼 신학적 관점에 있어서 늘 약간의 갈등을 가지고 있다. 선교와 증언봉사도 정도는 약간 덜 하지만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번에 두 흐름이 서로 대화를 통해 조율을 했다.

세계는 20세기를 접고 21세기에 진입하면서 인류가 감당할 수 없는 격변을 겪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로 세계의 경제가 구조적으로 1:99의 경제적 계급주의로 왜곡재편되고 서구가 주도해온 산업화-근대화-도시화의 개발문명은 통제할 수 없는 생태파괴와 기후변화를 야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는 완전히 자본에 굴복하여 퇴행하고 있고 정치공동체뿐만 아니라 경제공동체, 사회공동체, 문화공동체가 연이어 븡괴되며 지구사회는 자본이 이끄는 단일문화권으로 재편되고 있다. 사고체계도 모던사고-포스트 모던 사고로 이어지면서 공동의 가치관이 붕괴되고 영성의 진공화 spiritual vacuum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콜롬보에서 발표된 “21세기의 디아코니아에 관한 신학적 관점은 바로 이런 시대적 상황속에서 개최되었다. 문서는 21세기 디아코니아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바로 21세기에 인류와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이런 도전적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며 21세기 디아코니아 신학의 성찰을 시작하고 있다.

콜롬보 문서는 21세기 디아코니아 대한 신학적 성찰을 세 가지 관점에서 한다고 전제하고 있다.

첫째로 디아코니아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일환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 시각은 변방공동체의 입장에서 보자는 관점과 더불어 선교와 전도의 입장을 많이 반영한 것 같다. “하나님의 선교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성취하는 것”(I-1)이며 공동체인 교회는 교회의 존재 자체, 선교, 봉사를 통해” (I-2) 그 하나님의 비전에 참여한다. 교회의 디아코니아는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왔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디아코니아의 원형으로 삼아야 하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가 성취하려는 그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구조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I-3).

교회의 디아코니아의 범위 spectrum는 광범위해야 한다. 디아코니아의 영역은 자기가 처한 지역에서부터 세계적 차원, 개인에서부터 공동체적 차원, 보살핌과 구제에서부터 체제와 구조적 변화까지를 모두 망라해야 하며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기 위해 죽음을 초래하는 제국에 맞서는”(I-4) 예언적 봉사까지를 포함해야 한다. 디아코니아는 삶과 정의와 평화 등의 온갖 쟁점들을 중심으로 하며 사람들과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일치의 중요한 명분”(I-5)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이 관점은 일치에 접근하는 독특한 디아코니아의 방식으로 주목할 바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의 생명, 정의, 평화가 이룩되도록 봉사하는 것이 일치의 구체적 표현이 아닌가?

문서는 디아코니아를 너무 전문영역에만 맡기고 교회는 디아코니아의 후원자로 남아서는 안된다고 하고 디아코니아를 교회공동체의 우선순위로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디아코니아는 지역에서부터 지구공동체 전체에서 상황적이며, 다양하고 역동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둘째로 강조되는 점은 디아코니아를 통상 수혜자로 여기던 변방공동체 the marginalized시각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도 선교와 전도의 관점이 많이 반영된 흔적이다. 이 개념은 콜롬보회의 3개월전 마닐라에서 열렸던 선교와 전도회의에서 논의된 선교와 전도에 관한 새 에큐메니칼 확언에 핵심적으로 등장한 새로운 선교관점이다.

디아코니아는 전통적으로 궁핍과 위기상황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의 일환”(II-8)으로 자원, 구조, 능력면에서 힘있는 자들이 박애주의와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실행되어 왔다. 심지어 약한 자들과 취약민을 섬기려고 시작한디아코니아가 사회의 특권층과 부유층에게 봉사의 도구가 되고 있다(II-9). 이런 현상들은 요즈음 한국에서 봉사가 기업, 연예인들에 의해 유행처럼 되어 가는 모습에서 나타난다. 기업의 윤리성 각인이나 스타들의 이미지 형성에 이용되는 것 같고 이들을 홍보대사로 임명하는 NGO들의 봉사전략과 이들의 이해가 서로 맞아떨어지고 있다. 여기에서 수혜자는 디아코니아의 레미제라블이 되고 있다.

콜롬보문서는 심지어 교회가 디아코니아를 개종의 수단으로 삼고 있음도 비판하고 있다. 디아코니아가 선교의 수단으로 활용되어 온 것은 오래된 일이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봉사는 사랑의 봉사이어야지 선교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가졌다. 이를 위해 집사직 deacon을 세웠다. 칼빈이 생각한 집사직은 교회안의 봉사자가 아니라 교회를 대표한 사회속의 봉사직이었다.

콜롬보 시각은 엘 에스코리알 봉사관점에서 이미 강조된 것처럼 변방인, 변방공동체는 디아코니아의 수혜자가 아니라 그들이 오히려 봉사의 주체임을 강조하고 있다. 변방인들과 변방공동체는 저항운동을 통해 디아코니아를 그들의 차원에서 더 처절하게 실천하고 있는 주체이다. 콜롬보는 이들의 이런 봉사야 말로 하나님의 디아코니아 Diakonia of God이며 정의와 평화를 보증하는 해방의 디아코니아 Diakonia of Liberation이다”(II-11)라고 천명함으로써 디아코니아에 대한 시각을 완전히 예언적이고 해방적이고 통전적으로 넓혔다.

변방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특별 공간(II-12)이며 변방인과 변방공동체의 투쟁이 곧 희망의 징표라는 것이다. 그들은 늘 궁핍과 절망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평화를 위해 최전선에서 투쟁하며, 그들이 오히려 불의한 세계구조를 변혁시키는 주체이며 이런 변혁의 희망의 징표이라는 점(II-13)을 분명히 하고 있다. 대안의 완성은 몰라도 최소한 대안의 촉발은 항상 변방인, 변방공동체에서 발현된 것이 역사적 경험이다.

셋째는 전통적으로 북반구의 관점에서 형성되어 온 디아코니아의 모델들을 남반구의 관점에서 구성해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에큐메니칼 디아코니아 성찰에서 늘 제기되어 온 필요를 다시 천명하는 셈이다. “디아코니아는 희생자들의 상처를 싸매주거나 긍휼의 행동을 취하는 것으로 한정해서는 안된다 (III-18). “사람들과 체제들과 문화들을 변화시키는 것”(II-17)이 디아코니아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변화를 위한 활동이 없다면 디아코니아는 단순한 봉사의 표현에 지나지 않으며 압제와 착취를 행하는 세력들의 이익에 교묘히 이용당하는 셈이 되고 말 것”(III-18)이다.

전통적으로 희생자였고 변방이었던 남반구에서 바라보는 디아코니아는 훨씬 더 근원적이어야 하며 심층적이어야 한다. 남반구시각에서 보는 디아코니아는 피상적인 평화와 친절을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III-19) 불의한 세력들에게 진리를 말하는 행동(III-19)이어야 하며 불의한 군사력과 경제력에 맞서는 정치적 행동”(III-20)을 뜻하고, 압제적인 문화들을 해체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사회적 행동(III-21)을 의미하며, 구조악에 저항할 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III-22) 남반구의 유기적, 통전적 관계로 재정립하는 관점이다. 결국 남반구에서 보는 디아코니아는 궁핍에 처한 자들을 지원하고 돕는 행동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안 세계를 이루려는”(III-22) 창조적 행동이다.

콜롬보 문서는 도전과 기회들이라는 마지막 부분에서 지역차원, 약간 넓은 차원, 그리고 WCC와 에큐메니칼 공동체가 실행해야 할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제안을 망라하고 있다.

WCC 디아코니아 신학의 에큐메니칼 의미와 과제

WCC디아코니아 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복음의 에큐메니칼 신학을 그대로 담지 하고 있다. 그리고 에큐메니칼 증언의 신학적 독특성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이 에큐메니칼 디아코니아 신학이 이끌어온 복음이해의 발전은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로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외적 활동이나 사회프로그램이 아니고 교회의 본질이며 신앙고백 그 자체이며 복음의 살아나감, 그 자체 living out the Gospel이다. 예배, 봉사 모두 “Service” 란 영어로 표기되는 데서 보는 대로 디아코니아 그 자체가 예배이다. 소위 예배 후의 예배 Liturgy after liturgy인 셈이다.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일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피조물이 삶을 살아가는 삶의 전 영역이 디아코니아의 영역이다. 영적 영역, 신앙적 영역, 세상적 영역, 세속의 영역이 따로 없다. 디아코니아는 세상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세상과 함께 하나님의 증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이 함께 살아가는 살림살이 life of oikos가 디아코니아이다. 따라서 디아코니아의 목표는 모두가 참여하여 오늘의 반생명적이고 불의하고 반평화적인 이 세계의 구조와 체제를 변혁하여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눈물이 없고 더 이상 사망과 곡하는 것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어가는 만들어 가는 교회의 통전적 선교의 일이다.

셋째로 따라서 디아코니아에서 시혜자-수혜자의 구조는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거시적 관점에서 물질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 모두에게 공동으로 주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맡기신 것이지 우리의 소유가 아니다. 모두가 공동의 소유자이며 공동의 나눔의 주체이다. 따라서 디아코니아는 줌-받음의 관계가 아니라 함께 사용하며 함께 살아감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불평등한 세상의 균형을 잡으려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모두 사용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변방의 시각에 좀 더 무게를 두어야 한다. 이것이 소위 하나님의 가난한 자를 향한 편향적 선택 God’s preferential option of the poor이란 개념으로 정리된 유명한 에큐메니칼 디아코니아 신조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에큐메니칼 디아코니아는 기후변화로 하나님의 창조세계 자체가 파괴되어 가는 총체적 위기의 시대에 죽음과 파멸로 치닫고 있는 인류의 문명을 생명문명 life-giving civilization으로 전환하는 거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 여기에서 향후 에큐메니칼 디아코니아는 이제 인간중심의 디아코니아에서 만물중심의 디아코니아로 전환되어야 한다. 인간의 삶을 하나님의 생명, 정의,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변화시키는 일을 계속 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온 피조물이 하나님이 부여하신 생명을 풍성히 누리고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속에서 살 수 있도록 변화시켜 나가는 창조세계중심의 디아코니아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세계인 온 우주의 생명이 하나가 되는 우주적 일치 Cosmic Unity가 이루어지는 광역적 일치의 에큐메니즘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를 행함에 중요한 방법론이 변화가 필요하다. 과거에는 세계가 결정하면 지역이 따라가는 형식의 에큐메니칼 운동이었지만 이제는 지역이 선도하고 세계가 응답하는 Local initiative, Global response 새로운 에큐메니칼 협력의 틀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변방이 주도하고 세계가 함께 걷는 21세기형 에큐메니칼 디아코니아가 아닐까?

닫는 이야기 그리고

오이코트리 운동 지구회의 Oikotree Global Forum을 위해 2013 3 2일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 갔다. 일행 세 명과 함께 아침 7시에 공항에 도착해서 호텔이 제공해 주는 셔틀버스를 타고 호텔에 도착했다. 로비에 들어서자 권총을 든 무장강도들이 호텔 직원을 포함하여 도착하는 우리에게 바닥에 엎드리라고 위협하고 입은 옷만을 제외하고 가방, 컴퓨터, 지갑, 핸드폰 등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갔다. 후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남아공에서 총은 위협이 아니라 바로 쏘는 의미라고 했다.

하루 종일 경찰진술을 포함한 권총강도사건을 수습하고 밤에 호텔방에 들어갔으나 분노와 당혹감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 성경의 강도 만난 사람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그 동안 신학자로서 목사로서 신학과 설교, 성경공부의 주제로서 이 이야기를 수도 없이 음미하고 해설하곤 했는데 그 날은 강도 만난 자가 되어 생각해 본 것이다.

우리가 신학, 설교, 성경공부에서 통상 이 이야기를 보는 관점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관점이었다. 부각해 온 부분은 레위인도, 제사장도 다 지나쳤지만 당시 멸시 받던 사마리아 사람이 오히려 강도 만난 자를 도왔다며 사마리아사람의 선행에 온통 초점을 맞추어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은 강도 만난 자로서 강도 당한 사람의 입장이 궁금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일차적 희생자이다. 그리고 강도 만난 사람이 당장 맞딱드려야 하는 것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라기 보다는 자기를 공격한 강도이다. 강도 만난 자에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은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라 왜 강도가 생겼으며 그 강도는 지금 내 물건을 어떻게 할까, 과연 강도 당한 물건을 도로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일차적 문제였다. 도움을 주는 사람은 그 다음의 관심이었다.

한참 생각한 뒤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남아공은 오랫동안의 식민지를 겪으며 체제와 구조적 불의와 폭력이 일상화되었고 그것이 수백 년 동안 빈곤과 억압과 폭력에 내어 몰린 남아공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의 악순환의 고리가 되었으며 거의 문화와 생활방식이 되고 말았다. 그날 우리가 만난 남아공 흑인강도는 어떤 의미에서 바로 그 불의한 세계의 희생자이다. 세계는 남아공의 아파르타이트 체제를 수백 년 외면했고 아프리카민족전선은 수많은 희생자를 양산하는 무장투쟁을 하면서 남아공의 해방을 주도했다. 그러나 오늘, 아니 앞으로도 식민잔재를 정리하고 안전한 국가로 만드는 데는 수 없는 세월이 걸릴지 모른다. 세계가 아프리카와 나누어야 할 부름을 엄청 받았는데도 세계는 애써 외면하며 지금도 신식민지 경제구조로 구조적 착취를 계속 하고 있다.

교회와 에큐메니칼 운동도 예외가 아니다. 서구교회는 WCC 창설초기 유럽의 재건을 위해 에큐메니칼 디아코니아 사역을 시작했고 냉전체제 종식 전까지 정의와 나눔의 관점에서 디아코니아의 지평을 넓혀왔다. 유럽교회들이 대거 아프리카, 아시아 등 지구남반구에 개발원조를 했다. 그러나 냉전체제가 끝난 이후에는 대부분이 철수를 했다. 지금은 과거에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관계에서 받는 자를 원조국 체제 속에 포함해 함께 결정구조에 참여하는 식으로 서구 교회의 디아코니아 구조를 에큐메니칼화했다고 하지만 현실은 남반구에서 파송된 결정권자들은 여전히 전통적 시혜자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신식민지적 구조가 작용하고 있다. WCC도 이런 흐름의 영향을 받고 있다.

역사적으로 정의와 봉사국이 WCC의 핵심부서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서구교회의 개발원조단체가 WCC의 의사결정구조에 영향을 주는 정회원이 되기를 요구했으나 부결되자 최근에 WCC를 지원하던 모든 자금을 모아 서구 원조기관 주도로 ACT Alliance라는 이름의 에큐메니칼 디아코니아 기구를 독립적으로 출범시켰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혹시 에큐메니칼 디아코니아의 헤게모니는 서구교회가 계속 잡겠다는 의도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로써 WCC의 디아코니아 사역이 엄청나게 축소될 전망이다.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무니까 강도사건은 강도와 강도 만난 사람 모두에게 불행한 방법이었지만 그렇게라도 억지 나눔을 했다고 자위하며 그 동안 남아공과 나눔의 실천을 하지 않았던 내가 부끄럽고 미안하기 시작했다. 분노와 당혹감도 잔잔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구호를 하는 선한 사마리아사람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라 강도 만난 사람, 그리고 강도 자체, 그리고 강도를 만들어내는 체제와 구조 전체를 보아야 하고 계속 강도 만난 사람을 구제하는 일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그 사회에 강도가 나오지 않도록 하는 근원적 변혁을 하는 것이 교회의 일이어야 하고 에큐메니칼 디아코니아가 되어야 한다는 성찰을 하게 되었다. 요하네스버그의 경험은 오늘의 에큐메니칼 디아코니아의 새로운 시각형성에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i] 이 문서들 중 앞의 네 문서 영문원본은 Michael Kinnamon and Brian E. Cope, The Ecumenical Movement – An Anthology of Key Texts and Voices, Geneva: WCC Publications, 1997에서 찾을 수 있다. 1: 265-267, 2: 446-447, 3:315-317, 4: 443-446. 그리고 다섯 번째 문서는 WCC부산총회 자료집에서 찾을 수 있다.

[ii] 2004년 세계개혁교회연맹 WCRC 이아크라신앙고백을 할 때도 서구교회의 이런 저항이 많이 나왔다. 그러나 2013 3 OIKOTREE Movement가 채택한 지구위기에 대한 우리의 신앙적 입장 Kairos Global Faith Stance 문서에 보면 경제불의에 대해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공범자란 입장이 다시 한번 표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