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C 문서 6 - 봉사 - 21세기의 디아코니아에 관한 신학적 전망들

 21세기의 디아코니아에 관한 신학적인 전망들

- 스리랑카의 콜롬보에서 열렸던 WCC의 “정의와 디아코니아, 정의와 총괄 공동체, 그리고 선교와 복음 전도 프로그램”과 함께 열렸던 회의에서 -
 
<번역: 강성열, 호남신학대학교>
 
이 신학적인 묵상 자료는 구체적 상황과 경험에 기초한 귀납법적인 추론을 의도하고 있다. 25여 개국에서 다양한 디아코니아 사업들에 열중하고 있는 50명의 참여자들은 변두리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는 중에 생겨난 새로운 가능성들에 관한 통찰들을 제공해주었지만, 몇몇 난처한 질문들을 던지기도 했다. 그들은 21세기의 디아코니아에 관하여 공부하려면 바로 이어서 언급할 몇 가지 도전적인 과제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특히 신자유주의 경제 세계화라는 오늘날의 지배 체제에서 비롯되는 불의의 제도화, 기후 변화의 현실과 그 영향력; 온갖 전쟁과 갈등 및 이로부터 비롯되는 파괴와 정신적 외상, 그리고 깨뜨려진 관계들; 여러 종교들과 민족들의 공격적인 주장에 기인한 공동체 붕괴; 취약 계층을 향한 탈취 행위와 추방; 사회의 여러 구성원들, 특히 여성과 아이들 및 장애인들과 노년층을 향한 폭력; 영양 부족과 질병 및 면역 결핍 바이러스와 후천성 면역 결핍증(Aids); 인종적/종교적 소수자들과 토착민들, 아프리카 출신 공동체들, 남아시아의 천민들, 다양한 이유들로 차별을 겪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소외당하는 현실.
 

오랜 전쟁과 갈등으로 폐허가 된 스리랑카는 치유와 희망의 가능성을 찾으려고 애쓰는 나라로서, 이번 회의의 중요한 배경을 제공하고 있다. 이번 회의는 교회들의 증거를 대표하고 있는 스리랑카 교회협의회가 주도하는 것이다. 그곳의 교회들은 제한된 공간으로 인하여 공적인 참여를 충분히 감당할 수 없는 변두리 소규모 집단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제각기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치유와 화해를 향한 증거에 있어서 하나 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 회의는 디아코니아를 아래에 상술하는 세 가지의 구체적인 장점들을 통해서 바라보고자 하였다.
 
첫째로, 이 회의는 디아코니아를 계속적인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교회들의 첫째가는 과제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교회들이 배타적이거나 내향적인 신앙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되며, 도리어 세상에 참여해야 하는 소명을 가지고 있음을 주장하기 위하여 선택된 것이었다. 이 회의는 또한 디아코니아를 제도적인 형식들 안에서 바라보고 추구하려는 일반적인 경향에 응답함과 아울러, 그러한 형식들이 허용하는 도전들에만 응답하려는 것이기도 했다.
 
둘째로, 이 회의는 디아코니아를 (많은 경우들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교회의 디아코니아 수혜자들이나 대상들-취약한 변두리 공동체들-로 간주되던 자들의 시점에서 새롭게 생각해보려고 시도하였다. 이러한 선택은 신학적인 이유들에서뿐만 아니라, 자원에 초점을 맞춘 디아코니아의 형식들보다는 사람들에 기초한 디아코니아의 형식들-그들의 열망에서 비롯된-을 더 찾아내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디아코니아를 오늘의 세계에서 재규정할 때 그들의 참여를 확보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번 회의는 또한 생색내는 간섭으로부터 촉매적인 동반으로의 가능한 변화를 암시하려는 목표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셋째로, 현재의 많은 디아코니아 모델들이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북반구에 자리한 교회들의 견해와 선호도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번 회의는 삶의 양식이 현저하게 다른 지구촌 남반구의 시각에서 볼 때 디아코니아가 어떠한 모습일지를 탐구하고 싶어 했다. 첨언하자면, 북반구보다는 남반구에 더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이 소수 공동체들로 나누어져 있으며, 종종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변두리 속해 있는 사람들로서, 심각한 생존경쟁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 이러한 남반구 선호 경향은 지구촌 북반구가 이와 동일한 도전들이나 가능성들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것은 디아코니아와 그것의 반향에 있어서 북반구 교회들이 공헌한 바를 무시하고자 하려는 것도 아니다. 남반구 교회들을 향한 이러한 선택은 심사숙고 끝에 내려진 것이다. 남반구 교회들이 제공하는 다양한 삶의 표현들과 기독교적인 표현들을 염두에 두고서 말이다. 그리고 곤경에 처한 인간과 지구의 운명, 그리고 지구의 미래 등과 관련하여 그곳에서 생겨나는 복잡한 질문들 중의 일부에 답하려는 노력에서 말이다.
 
아래의 내용들은 위에서 언급한 시각에서 살펴본 주제에 관한 생각들을 요약한 것이다.
 
 
I. 교회와 선교, 그리고 디아코니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1. 하나님의 선교는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성취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 세계에서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더 이상 우는 소리나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요, 사람들이 젊어서 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살 것이요, 수고의 열매를 즐길 것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재난으로 죽지 않을 것이요, 모든 이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맹수들이 변할 것이다”(사 65:17-25). “새 하늘과 새 땅”(계 21:1)을 향한 이러한 종말론적인 희망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끊임없이 현재의 삶으로 뚫고 들어오며, 지금 모든 곳에서 그러한 희망을 성취함으로써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도록 사람들을 초청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교는 역동적인 것이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거룩함과 순전함을 지탱하는 사람들과 힘들을 포괄하는 것이기도 하다.
 
2. 세례를 통하여 부름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공동체인 교회는 자신의 존재 자체와 선포와 봉사를 통하여 이러한 선교에 참여한다. 일반적으로 봉사로 이해되는 디아코니아는 공동체로서의 신앙과 희망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식에 해당한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에 대해서 증거하면서 말이다.
 
3. 자신의 디아코니아를 통하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서 증거한다. 자신의 디아코니아 안에서 교회는 자신이 섬기려고 왔지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셨던 주님-스스로 종이 되어 오신-의 길(막 10:45)을 따른다.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지배 권력에 맞서 봉사의 힘을 드러내는 일에 부름 받은 존재이다. 그럼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충만한 생명이 가능해지도록 말이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다가올 통치의 한 표지로 자신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러한 통치에로 이끄는 길, 곧 그리스도의 길의 한 표지로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4. 교회는 디아코니아 공동체로서 자신이 속한 지역과 그보다 더 넓은 지역 모두를 포괄하는,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과 공동체적인 차원 모두를 포함하는 기독교적인 증거를 실천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이다. 이 점은 교회의 본질에 관한 다양한 모든 표현들에 잘 반영되어 있다: 예배와 선포, 환대와 고난의 실천(히 13:1-3), 공적인 증거와 주장. “예전 후의 예전”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믿음이 경축하는 것에 의하여 힘을 얻게 되는 디아코니아는 보살핌과 구제와 봉사 등을 포함하지만, 더 나아가서 압제적인 체제들과 구조들에 담겨 있는 불의의 근원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까지 한다. 생명의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충성심이야말로 정의를 위한 지속적인 행동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죽음을 초래하는 제국의 권력에 맞서서 말이다.
 
5. 온갖 지정학적이고 사회경제적인 상황 속에 있는 모든 기독교 공동체는 디아코니아 공동체가 되도록 부름 받은 존재로서, 변화를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증거하되 하나님 통치의 약속을 드러내는 봉사의 실천을 통하여 그렇게 하는 존재이다. 그것은 모든 관계들을 치유하며,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위한 동역자 의식을 고양시켜준다. 삶과 정의와 평화 등의 온갖 쟁점들을 중심으로 하여 사람들과 공동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디아코니아는 일치의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하며, 그 자체로서 일치를 위한 도구로 이해될 필요도 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행동을 가리키는 한 가지 표현으로서의 디아코니아는 온갖 지엽적인 관심사들과 종교적인 증식의 차원을 넘어선다.
 
6. 디아코니아의 보다 확대된 제도적인 표현들 중의 일부는 위기 상황들에서 인간의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자원 개발을 가능케 하는 역할을 위하여, 그리고 취약민들의 정의와 경제 발전의 명분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확증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디아코니아의 형식들이나 다른 전통적인 형식들 중의 일부가 하부 구조와 제도들, 전문 기술, 자원 등에 의존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에, 많은 기독교 공동체들은 자신을 디아코니아의 후원자나 수익자로, 그리고 드물게는 디아코니아에 참여하는 자들로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이처럼 전문화된 사역들이 모든 기독교 공동체의 과제를 디아코니아적인 것으로 대체해주는 것은 아니다.
 
7. 하나님의 다가올 통치의 희망에 대한 믿음의 응답으로서 디아코니아는 역동적이고 상황적이며 다원적인 것이다. 그것의 표지들은 혼란 중에 겪는 모든 희망의 경험들에서, 사람들과 관계들을 치유하고 고양시켜주는 행동들에서, 그리고 정의를 추구하고 진리를 확증하고자 하는 노력들에서 발견된다. 디아코니아는 지구적인 차원에서 또는 보다 큰 교회 구조들의 차원에서, 그리고 회중들과 특별한 사역들 및 지방과 지역과 국가의 차원에서 정의와 평화와 인간 존엄성 등의 가치들에 헌신하는 사람들의 그물망 속에서 동역자 의식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
 
 
II. 변두리 사람들을 위한 디아코니아
 
“건축자가 버린 돌이....”(시 118:22; 행 4:11)
 
8.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디아코니아는 궁핍과 위기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기독교적 응답으로 이해되며, 자원들과 하부 구조를 가진 힘과 특권의 자리를 떠나 그들에게 이르는 행동들로 규정된다. 이러한 이해는 종종 궁핍에 처한 사람들을 디아코니아의 대상이나 수령인으로 간주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많은 박애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솔선 행동들의 길잡이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해는 변두리 사람들의 디아코니아를 인식하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단순히 디아코니아의 대상이나 수령인으로만 취급하였다. 디아코니아의 일부 형식들은 존중히 여기는 태도나 잠재력에 대한 인식 또는 지역 공동체들과의 협력 의식 등이 없이 추구되기도 하였다.
 
9. 약한 자들과 취약민들을 섬기려는 의도로 시작된 일부 디아코니아 사업들은 수년 동안 사회의 특권층과 부유층에게 봉사의 도구들로 여겨졌다. 불행하게도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일은 오늘날 세계의 많은 부분들에서 일부 기독교 교육 시설들과 보건 시설들의 활동 목표가 된 적이 거의 없다. 뿐만 아니라 이윤 추구와 소비주의에 초점을 맞춘 거대한 세계화의 물결 역시 전통적인 섬김의 구조들이 경제적인 활동과 이익의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함으로써, 섬김에 대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사회 경제적인 구조들에 의하여 무기력하게 된 자들에게 나아가는 일은 일부 교회들에게 더 이상 우선적인 과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일부 다른 디아코니아 사역들은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디아코니아는 우리와 같은 기독교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디아코니아 사역들을 잘못 사용해서도 안 된다. 교회들이 그 동안 이런저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선교의 길로부터 이탈한 것에 대하여 회개하는 일은 교회의 신뢰성 회복과 순전함 회복을 위해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절박한 것이다.
 
10. 변두리 사람들은 비록 많은 교회들이 늘 해오던 익숙한 방식으로 디아코니아를 실천할 수 있는 물질적이고 재정적인 자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할지라도, 그들 자신의 삶과 일상적인 저항 운동을 통하여 디아코니아를 실천하고 있다. 그들은 세상의 죄악성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으며, 세상이 자신의 죄악 연루 상황과 침묵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본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변두리 사람들을 선호하시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원해서 약해졌기 때문이 아니요, 온정주의적인 자비심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삶이 사회 변화의 급박한 필요성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11. 세계는 변두리를 불명예와 무기력함의 자리로 보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성서의 증언은 불의하게 사회의 변두리로 내몰리는 자들의 투쟁에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압제와 그로 인한 상실의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보살피는 사랑의 이야기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압제당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해방을 향한 그들의 여정을 지켜주시고 그들과 동행하심으로써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신다(출 3:7-8). 바로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디아코니아이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정의와 평화를 보증하기도 하는 해방의 디아코니아이다.
 
12.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 이 비판적인 질문은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이러한 선교를 위하여 마련하신 중요한 출발 지점을 암시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디아코니아가 압제 당하는 자들을 자유롭게 하고 눈 먼 자들의 눈을 열어주며 아픈 자들을 고쳐주는 디아코니아라고 선포하신다(눅 4:16f.). 예수께서는 자신이 잃은 자들과 작은 자들을 찾으러 왔음을 계속 강조하심으로써, 끊임없이 그 시대의 변두리 사람들 사이에 머물러 계셨다. 그의 디아코니아는 권력 남용을 거부하며(눅 4:1-12), 지배적인 힘의 논리에 휘둘리는 것을 거부하시며(막 10:45), 압제적인 종교 전통들에 맞서신다(눅 11:37-54). 도리어 그의 디아코니아는 자기 삶을 인정받지 못하는 자들을 회복시키는 일을 선택한다. 마침내는 그의 이러한 행동들이 그를 십자가로 이끌기는 했지만 말이다(이를테면 한쪽 손 마른 사람, 막 3:1-6). 이러한 선택을 통하여 그는 사람들을 변두리로 몰아내는 세력을 폭로하며 그 세력에 맞서신다. 이 점에 있어서 변두리 지역은 하나님의 긍휼과 정의를 위한, 그리고 약함과 저항의 자리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특별한 공간이다. 바로 그곳에서 아픈 자들이 치유되었고, 악한 영들의 통치가 분쇄되었으며, 변두리 사람들의 존엄성이 보호받았고, 제자들은 삶을 긍정하는 목회적 가치들로 무장할 수 있었다.
 
13. 뿐만 아니라 변두리 사람들은 항상 궁핍과 절망에 빠져 있는 자들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그리고 생명과 정의와 존엄성 및 자기 자신과 모든 사람들의 권리 등을 위한 투쟁을 통하여 불의와 압제에 저항하며,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자신의 삶 속에서 드러낸다. 예로써 장애를 가진 자들은 공감과 협력의 가치들을 증진시킨다. 아프리카 후손 공동체들과 인도의 불가촉천민, 그리고 차별 당하는 다른 공동체들은 교회들과 공동체들에게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차별하고 비인간화하는 문화들과 관행들에 맞서서 그것들을 극복할 것을 요청한다. 토착민들은 그들의 삶과 땅이 위협당할 때조차도 모든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가치를 옹호한다. 불행한 처지에 놓인 젊은이들은 교육과 고용의 기회를 빼앗는 정책들에 맞선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인 이주 노동자들은 인권과 존엄성과 정의를 위한 투쟁을 통하여 국익(國益)이라는 명분으로 기본적인 인권을 부정하는 정치 체제들에 도전한다. 이러한 모습들은 세계 구석구석에서 두루두루 발견된다. 지구촌 남반구에서도, 지구촌 북반구에서도 똑같이 발견되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들은 이러한 모습들에서, 그리고 해방과 변화를 향한 행동들과 연대들 속에서 디아코니아의 새로운 가능성들과 새로운 교회적 자기 발견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기에 변두리 사람들의 디아코니아는 하나님의 세계 통치, 곧 세계를 위한 대안적인 비전의 성취에 참여해야 하는 교회의 역할에 대하여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4.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경우, 변두리 사람들의 언어는 사람들을 체제들과 구조들의 희생물로 규정하거나 그러한 희생물로 격하시키는 방식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디아코니아는 그러한 구조들의 파괴적이고 비인간화시키는 힘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이 처한 현실의 비극적인 효과들을 지적할 뿐만 아니라, 세계의 변화를 위한 변두리 사람들의 요구와 합법적인 권리와 힘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사람들이 물건들과 소모품으로 취급되고 성과 인종과 피부색과 계급과 나이와 장애와 성적인 지향성과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위치 등과 같은 정체성 때문에 차별당하는 세계에서, 디아코니아는 사람들과 공동체들을 세우고 모든 사람들의 존엄성을 확인시켜주며 특정한 사람들을 차별하고 학대하는 문화들과 관행들을 고쳐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15. 변두리 사람들은 존엄성과 정의에 기초한 삶을 향한 열망을 통하여, 그리고 그런 일을 이루기 위한 행동들에 참여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정의와 존엄성과 생명을 부정하는 세력들로부터 자유로운 세계를 목표로 하는 대안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많은 교회들에게 대하여 하나의 강한 도전이 되지만, 디아코니아의 실천과 신학적인 반성에 관한 전통적인 모델들을 새로운 포괄주의와 공유 및 변혁 행동 등의 양식들로 갱신할 수 있도록 돕는 약속의 의미를 훨씬 더 강하게 가지고 있다. 예수께서도 다가올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는 사역을 시작하면서 자신이 그 시대의 변두리 사람들 중에 속해 있음을 발견하셨다. 세계 전역에 있는 대다수의 기독교 회중은 몇 가지 요인들 때문에 대부분 가난하거나 변두리에 처한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현실은 더욱 확실한 초교파적 참여를 위한 기회와 수단으로 여겨질 필요가 있다. 변두리 사람들과의 상호 협력과 연대는 교회들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고 있다는 주장의 신뢰성을 보증해줄 것이다.
 
III. 변화를 위한 디아코니아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미 6:8)
 
16. 그러기에 디아코니아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삶을 경축하게 만드는 봉사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여기에서 지금 항상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 실재하는 것이 되도록 사람들과 상황들의 변화를 유도하고 또 실제로 변화를 가능케 하는 믿음이다.
 
17. 성서의 하나님은 삶의 구체적인 상황들 속에서 변화를 추구하시며 이끄신다. 특히 그들 자신의 삶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가 그렇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행동으로서의 디아코니아는 사람들과 체제들과 문화들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권력을 남용하고 가난한 자들의 정의를 무시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선고하신다. 예수께서도 불의한 체제들과 관행들에 도전하셨으며, 그러한 것들로부터 이득을 얻는 강자들과 특권층에게 회개하고서 사랑과 나눔과 신실함과 겸손 등의 가치들로 변화될 것을 촉구하셨다.
 
18. 디아코니아는 희생자들의 상처를 싸매주거나 긍휼의 행동을 취하는 것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러한 사랑과 보살핌의 표현들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러한 표현들은 고통과 상실을 초래하는 세력들과 요인들에 맞서서 그것들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배제하지 않는다. 디아코니아 사역은 이렇듯이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엡 6:12)에 맞서는 행동 모두를 포함한다. 그것은 희생시키는 자뿐만 아니라 희생자까지도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급진적인 투쟁의 영성을 의미하며, 죄악스런 사회 구조들의 변화를 위한 헌신을 뜻함과 아울러, 그러한 구조들에 의하여 희생된 자들의 해방을 위한 헌신을 뜻하기도 한다. 변화를 위한 활동이 없다면 디아코니아는 단순한 봉사의 표현에 지나지 않을 것이요, 압제와 착취를 행하는 세력들의 이익에 교묘하게 이바지할 것이다. 그들의 상호 협력관계를 덮어버림으로써 말이다. 만일에 디아코니아가 불의와 권력 남용에 맞서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을 만한 디아코니아가 되기를 중단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19. 디아코니아는 또한 피상적인 평화와 친절의 표현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디아코니아는,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라는 말에 표현되어 있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분노에 공감함으로써, 종종 불의하고 압제적인 현실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강한 자들과 특권층의 그러한 시도들을 폭로한다. 예언적인 행동을 뜻하기도 하는 디아코니아는 그러한 세력들에게 진리를 말하는 행동을 포함하기도 한다.
 
20. 오늘날의 세계에서 디아코니아는 불의한 군사력과 경제력에 맞서는 정치적인 행동을 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필요들과 인간 개발보다는 자기 방어에 더 많이 투자하는 것으로 보이는 국가 정치에 이의를 제기하며, 박탈당하고 내쫓긴 자들의 생존권을 부정하는 반이주법에 반대하고, 땅과 사람들을 파괴하는 개발 정책에 반대하며, 사회 경제적인 구조들에 의하여 상처 입은 자들과 함께 일하고 그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21. 디아코니아는 단순히 가부장제, 인종차별, 계급제도, 외국인 혐오증 등과 그 외의 다른 차별적이고 배타적인 관행 등의 압제적인 문화들을 해체하려는 목적을 가진 사회적인 행동을 뜻할 수도 있다. 교회들은 이러한 문화들이 자신 안에 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회개할 필요가 있다. 사회의 특정 구성원들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태도와 신학적인 작업들에 대해서도 회개할 필요가 있다.
 
22. 그러나 디아코니아는 악에 저항하거나 맞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간에 관계를 맺거나 자연과 관계를 맺는 방식들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 점에서 볼 때 디아코니아는 변혁적인 것이다(롬 12:2). 종으로 오신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누룩으로 부르셨다(마 5:13-14). 달리 말해서 변화와 변혁을 이루어야 할 자들로 부르신 것이다. 초기 교회 공동체의 디아코니아는 성령의 힘에 의지하여 대안적인 가치들과 세계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제국의 권력에 저항하였다. 따라서 디아코니아는 궁핍에 처한 자들을 지원하고 돕는 행동을 표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이 그토록 원하시는 세계를 이루려는 창조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다.
 
 
IV. 도전들과 기회들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사 43:19)
 
23. 21세기의 세계정세는 각종 도전들에 더하여 세계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정의와 존엄성과 생명 등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면서 투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여기에 오늘의 교회들이 많은 창조적인 방법들로 디아코니아를 시도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들이 놓여있다. 교회들은 그런 일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새롭게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각각의 상황에 맞는 무수한 다른 기회들과 가능성들이 존재할 수도 있다. 보다 진전된 생각과 행동을 위하여, 이번 회의 도중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 바 있는 아래의 통찰력 있는 제안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a. 지역 회중들의 디아코니아

1.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이 디아코니아 공동체들로 존재하는 곳에서 그들의 삶이 처해 있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현실을 인식하도록 하라. 기독교 교육은 사회적인 책임감을 키우는 데 목표를 두지 않으면 안 된다.

2. 예배와 선포를 통하여 디아코니아의 신학적인 중요성을 깨닫고 확증하는 일에 힘쓰라. 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 일에 창조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훈련장이 될 필요 가 있다.

3. 환경 문제와 관련하여 사람들의 수준에 맞춘 행동을 적극 시도하라.

4. 가정과 공동체와 교회 안의 여성들을 향한 학대와 폭력의 현실에 분명하게 응답하라.

5. 사람들에게 알코올 중독과 약물 남용에 맞서도록 교육함으로써, 희생자들로 하여금 그러 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게 하라.

6. 솔직하고 정의롭고 친절하고 너그러운 공동체가 되도록 하라. 교회들은 차별 없는 공간, 그리고 안전과 희망의 성소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7. 상담, 탈중독 프로그램, 교육과 취업의 기회, 성적 감수성 등의 영역에서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수용 능력을 키우도록 하라.

8. 각각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삶의 문제들에 대해서 다른 교회들, 다른 신앙 공동체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주도적인 행동과 협력관계를 유지하 도록 노력하라.
 
b. 보다 큰 교회 집단들의 디아코니아

1. 지역 교회들이 디아코니아 사역을 통하여 그들 자신의 문제들에 응답할 때 그들을 격려하고 후원하고 그들과 동행하도록 하라.

2. 다른 무엇보다도 특히 도시와 농촌, 부자와 빈자, 정착민과 이주민 사이를 연결함으로써 연대감과 상호 책임의 표현들을 격려하라.

3. 교회 안에 있는 차별과 배척의 문제들에 대해서 언급하되, 안팎에서 그러한 문제들을 종결 짓기 위한 운동을 시작하라.

4. 후천성 면역 결핍증, 장애, 가난, 식품 안전, 환경 청지기 등의 문제들과 관련된 정책들과 프로그램들을 개발하라.

5. 인권, 정의, 변두리 공동체들의 권리 등의 대의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예언적인 목소리들과 행동들을 인정하고 강화시켜주고 지원하도록 하라.

6. 일반 대중에 기초한 능동적 행동을 격려하기 위하여 지역 차원과 국가 차원에 속한 교회들 및 조직들과 협력관계를 세우도록 하라.

7. 신학 기관들로 하여금 필요한 모든 곳에서 디아코니아를 교육과정에 포함시키도록 격려하고, 이와 관련하여 디아코니아 실습을 위한 심화 연구를 계속 진행하도록 하라.

8.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디아코니아 관련 성서 연구 자료들을 개발하라.

9. 다른 신앙 공동체들에 속한 사람들과 함께 디아코니아 사역에 참여하라.
 
c. WCC 및 이와 유사한 국제기구들의 디아코니아

1. 디아코니아를 교회의 본질적인 표현으로 인식하라. 그리고 그러한 기구들의 우선적인 소명이 교회들을 위하여 일정한 디아코니아 사역을 시도하는 데 있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교회의 주도적인 노력을 수반하는 것임을 인식하라. 이것은 능력 개발, 협력관계 증진, 자원 동력화 등을 포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말이다.

2. 사람들과 공동체들 및 회중들과 함께 인종 차별과 인간 소외에 맞서 투쟁하도록 하라.

3. 정의와 존엄성과 평화 등의 대의명분을 옹호하고, 이유 없는 공격과 추방과 강탈 등에 희생된 자들을 옹호하도록 하라.

4. 변화를 위한 일반 대중의 주도적인 활동들을 지원하고 격려하도록 하라. 그러한 활동들 중의 일부는 도움을 받는 데 필요한 가시성과 하부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5. 다양한 교회 협력의 양식들을 격려하고 상호 책임성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국제적인 디아코니아 기구들과의 대화를 활성화시키도록 하라.

6. 다양한 상황에서의 창조적인 디아코니아 참여를 위한 신학적인 지원의 교회 간 교류를 가능케 하는 자원들을 준비하면서 그러한 교류과정을 활성화시키도록 하라.

7. 변화를 위한 투쟁에 있어서 상호 연대의 힘이 크다는 것을 올바로 인식하라. 그리고 모든 차원에서 그러한 상호 연대의 표현을 가능하게 하고 격려하고 육성토록 하라.
 
24. 지금 이 시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된 디아코니아는 때때로 현상 유지에 연연하는 세력들과의 대결을 포함할 수도 있다. 때로는 사랑과 겸손과 용기와 헌신의 태도를 필요로 하는 위험이 불가피하게 닥쳐올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직이 십자가의 그늘 아래에서 표현되기를 원하는 것임을 강조하신다(마 16:24). 따라서 교회들은 섬김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려놓으신 그리스도의 길에서 봉사의 사명을 위해 함께 부름 받은 공동체들로서, 베드로전서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서 서로를 격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