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의 성서적 근거

창세기 1:26-27

오늘은 인권주일입니다. 이것은 세계 제2차 대전을 경험한 세계가 이 지구상에서 다시는 그런 참혹한 인권유린이 재발되지 않게 하기위해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인간의 권리를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천명하기 위해 1948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을 선포한지 46년째되는 날이 어제였는데, 한국기독교는 이를 전후해서 인권주일을 지킵니다.

우리는 먼저 각 나라마다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각도에서 인권을 이해하고 있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히틀러나 무쏘리니 같이 제2차 대전의 과정에서 나타난 파쇼국가체제에서 야기된 비극적인 인권유린을 경험한 유럽같은 경우에는 국가의 횡포로부터 개인의 인권을 지키는 것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자본주의와 계급투쟁을 했던 사회주의 국가들은 사회적 인권을 더 중요시 여겼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과거 군사통치 아래에서 개인의 인권이 많이 유린되었던 남한은 유럽과 비슷한 경우일 것이고, 북한은 사회적 인권을 확보하기 위한 경우일 것입니다. 식민지시대를 경험한 제3세계 국가들은 대체로 자기 나라의 운명을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자주성(Self-Determination)을 확보하는 개념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우리나라가 독립투쟁을 한 것은 국가의 자주적 인권을 찾기 위한 투쟁이었을 것입니다. 어쨌건, 인권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개인이나 사회나, 민족이나 국가가 현재 자기의 권리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확보해야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구체적인 권리, 실존적인 권리를 통칭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는 개인의 인권에서부터 민족의 권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권을 지켜주기 위해 세계인권선언을 하고 46년간을 투쟁했지만, 아직도 세계의 모든 민족과 개인은 그들의 인간의 권리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 끝날까지 인간의 권리가 완전히 지켜지고 존중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의 권리나 민족의 권리가 자동적으로 확보된 적은 한번도 없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개인이든 민족이든 그들의 권리는 처절한 투쟁에 의해서만 획득되어 진 것입니다. 미국의 흑인 민권투쟁이 그렇고, 얼마전 350년 만에 흑인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남아프리카의 인권투쟁이 그렇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보장한 것을 세상이 다 지켜 준다면 절대로 투쟁할 필요가 없으나, 불행하게도 이 세상은 천부의 권리, 하나님이 부여하신 권리마저도 인간이 빼앗기 때문에 그 천부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교회는 투쟁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교회가 인권을 지키기 위해 봉사해야 하느냐? 한 마디로 기독교는 인간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이 땅 위에 나타난 종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그러므로 “인권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근거”를 밝히는데 촛점을 둘 것입니다. 왜 기독교는 인간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이 땅 위에 존재하는가? 기독교의 인권투쟁은 정치적인데서부터 영적인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져 있습니다.
 
먼저 구약성경에서 볼 것 같으면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출애굽사건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권리를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억울하게 종살이하는 히브리 노예들의 신음의 합창을 들으시고 하감하셔서 그들을 자유의 몸으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앞에서 언급한 여러가지 인권의 차원, 즉 개인의 차원에서부터 이스라엘 민족적 인권의 차원까지를 다 포함합니다. 개인이 종살이에서 해방되고 민족이 자주민족으로 독립하게 된 것입니다. 애굽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다시 하나님의 계약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 계약에서 “너희는 애굽에서 종살이 했던 사실을 거울삼아 절대로 남을 종살이시키지 말고 너희도 결코 종살이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 인권도 다시 빼앗기지 말고 남의 인권도 유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에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계약의 핵심입니다.
 
사실 출애굽 사건과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계약에서 나타난 인권존중의 원칙은 후일 어떠한 국가나 사회가 선언한 인권선언보다 근본적이고 포괄적입니다. 구약성서는 인간의 권리를 지켜가되 특별히 소외받는 계층인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와 가난한 자에 대한 세심한 인권보장책이 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도피성이라는 것이 구약에 있는데 이것은 살인을 범한 자라도 범죄자로 확정되기 전까지는, 혹은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일단 도피시켜주는 장치입니다. 이것을 보면 심지어 범죄한 사람의 인권까지도 일단 존중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이 지구상의 모든 국가나 사회가 따라야 할 커다란 인권의 예를 남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신약성경에 오면 인간의 정치적 권리나 사회적 권리를 지켜주는 차원에서 한층더 발전하여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영성까지도 지켜져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예수는 세리나 죄인, 병자와 간음한 여인의 죄를 추궁하고 추방시키려는 바리새인 편에 서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아픔을 읽고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인권선교를 했습니다.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질병으로부터 인간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주님은 노력하셨습니다.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소외로부터 인간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심지어 종교적으로 죄인되게 낙인찍는 것으로부터도 인간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신약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권운동은 영적인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신약성서는 인간의 고통스런 운명을 죄의 노예가 된 상태로 규정하고 그 죄악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구원시키는 일을 그리스도께서 하러 오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주고 부활하게 하심으로 죽음의 운명속에 갇힌 인간의 운명을 거기에서 해방시키는 인간의 최후의 권리를 지켜주는 일로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이 모든 성서의 주제는 결국 인간이 내적으로 외적으로 그 존엄성을 빼앗기고 종살이하는 상태에서 그들을 자유와 존엄의 삶으로 인도하는 이야기이므로 인권이야기중의 인권이야기입니다.
 
그럼 과연 하나님이 무엇때문에 이처럼 인간의 권리를 지키려고 노력하셨겠는가? 또는 그 인간의 권리를 지키는 성서적 근거나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인권을 위한 첫번째 성서적 근거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 Imago Dei)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27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형상이란 흔히 하는 외국말로는 이미지(Image)란 말인데 또 다른 한자로는 인상(印象)이란 말로도 표현할 수 있겠고 우리말로 옮긴다면 “모습”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상을 갖고 있다, 혹은 하나님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혹은 하나님의 모습을 갖고 있다, 했을 때 이것은 외형적인 닮은 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굳이 외형적인 모습이 없으실 것이고 또 이 지구상에 인종도 피부 빛깔만 해도 여러종류의 인간이 있는데 어떤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인지 규정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내면적인 모습을 가리킬 것입니다.
 
아주 경건한 신자들은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인간도 영적인 동물이다, 즉 종교적 동물이란 말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또는 인간은 하나님을 반영하는 거울이란 말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권적 차원에서 볼 때 이 말은 “인간의 존엄성”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에 인간에게 하나님이 누리는 존엄성과 같은 그런 존엄성을 부여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동학사상의 중심사상이 인내천(人乃天)사상입니다. 이 말은 인간은 곧 하늘이란 말인데 인간이 하늘일 수야 없겠지만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그만큼 지고하고 존엄한 가치가 부여되어 있다는 말이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한 사람의 목숨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는데, 그 말은 인간의 값어치란 온 세상을 주고도 바꿀 수 없도록 값지다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존엄성을 가진 인간을 구박하고 박해하고 고문하고 괴롭히는 일은 곧 하나님을 구박하고 박해하고 고문하고 괴롭히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에게 존엄성이 주어졌다는 사실에 성경이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 같은 소외된 자의 존엄성과 삶의 권리에 대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거듭되는 강조가 이런 사람들의 권리를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법적으로 모두 보장하도록 독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오면 이 모든 인간의 권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갈라디아3:28) 이 말을 오늘의 사회적 인권개념으로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는 인종의 차별도, 신분의 차별도, 교육의 차별도, 성의 차별도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우리 사회는 신약성경의 인권수준을 여전히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도 구 유고땅에는 인종청소란 이름으로 엄청난 인권침해가 이루어지고 있고, 르완다 같은 아프리카는 하나님의 형상들이 굶어죽어가고 있고 물도 마시지 못해 죽어가고 있는 현실은 세계가 함께 아파해야 할 인권문제들입니다.
 
저는 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또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존엄성은 그 존엄성을 부여하신 하나님 이외에는 함부로 침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인간의 자유를 구속한다거나 어떤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한다거나 어떤 민족이 다른 민족을 식민지로 한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인권의 침해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그 누구에게도 인간에 의해 지배되는 것은 부당합니다. 우리 인간에게 주권을 행사하실 수 있는 분은 그 권리, 그 존엄성을 부여하신 하나님 이외에는 그 누구도 그 어떤 권력도 우리의 인권위에 군림할 수 없는 것입니다. 흔히 남편과 아내가 서로 상대방에게 어떤 지배권을 행사할 때가 많은데 그것은 인권의 차원에서는 온당치 못합니다. 서로 존중하고 아끼고 사랑할 권리만 있지 지배할 권리는 결코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권리이고 자격입니다.
 
둘째로 들 수 있는 인권에 대한 성서적 근거는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되 자기 아들의 목숨까지 내어줄 정도로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토록 사랑하신 자의 인권이 침해되었을 때 사랑한 자의 아픔과 분노가 얼마나 크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 말의 뜻은 그냥 마마보이처럼 사랑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마저도 인간의 권리를 존중한다는 말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릴 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하나님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주권이 없다고 했고 오직 하나님만이 주권을 가질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으면 하나님은 마구 인간에게 마음대로 횡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엄격히 말하면 토기쟁이가 토기를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듯이 하나님은 인간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자기가 지어놓았지만 일단 지어놓고는 그에게 모든 자유와 스스로의 결정권(Self-Determination)을 부여하셨습니다.하나님은 인간을 대할 때 정말 인간중심으로 대하십니다. 이를테면 안식일에 대해 강조하실 때도 안식일이 그렇게 중요하지만 사람의 중요성을 능가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
 
이 공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법과 제도도 사람을 위하여 있지 사람이 법과 제도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파괴되고 법과 제도가 유지되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제도는 파괴되어도 사람은 유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의 붕괴는 바로 사회주의 이념도 인간을 위해 있어야지 아무리 이념이 좋아도 인간이 희생되어가는데는 이념도 뒤로 물러서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람이 중요하다는 사고(思考)로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제일 가까이 느끼는 것이 교통문제입니다. 자동차는 결코 사람에게 우선할 수 없습니다.그런데 시내를 다녀보면 사람이 건널목을 건너오는데도 자동차가 마구 밀어붙힙니다. 인도는 사람의 권리가 보장된 길인데도 자동차의 횡포가 너무 심합니다. 운전을 할 때 사람을 중시하는 운전을 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뒤에 기독교인임을 표시하는 마크인 물고기 마크를 붙혔으면 새치기를 해서도 안되고 과속해서도 안되고 차선을 부당하게 바꿔서도 안되고 모든 면에서 조심해야 하고, 사람이 건너가면 하나님의 형상이 건너가는 줄로 알고 무조건 사람의 보행권부터 보장해야 합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해서 안된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일보다도 사람이 존중되는 그런 세상을 만들 때 인간의 권리는 지켜질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이란 종교적 규칙마저도 양보하면서 사람의 가치와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시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권리를 사람이 결코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중시하는 사고(思考)! 이것이 인권적 사고(思考)입니다.
 
셋째 인권의 성서적 근거는 “하나님은 죄인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누가복음 5:31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다는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러므로 죄인은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실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명부(List)를 작성해보면 정말 그렇습니다.사람들에게는 버림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가장 즐겨 만나시는 친구들이었습니다.오죽 하면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는 별명이 붙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위에 오실 때 마리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그 마리아는 예수가 잉태한 것을 알고 이렇게 노래를 했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비천한 자기를 돌아보아 주셨다고 노래하고 그녀는 이런 노래를 계속했습니다.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죄인을 더욱 사랑하셨습니다.인간을 사랑하셨기에 그는 자기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그 인간의 존엄성을 지켰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도 지켰습니다. 그런 인간의 권리는 이 땅위에서 하늘처럼 존중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 그 사람이 피부빛깔이 달라도 사회적 신분이 달라도 신체적 특징이 달라도 교육과 재산의 차이가 있어도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엄성을 가진 사람으로 존중하고 인간을 존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권면합니다. 아멘.
 
<박성원 목사, 부산진교회, 1994. 12.11 인권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