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

로마서 13:8-10

오늘로 어느듯 한 해를 마감하는 주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한 해를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듯 일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이 주간에 세모를 맞이함으로써 우리는 또 한 해를 역사의 장으로 접어두고 새로운 해를 맞게 됩니다.

해를 넘길 때마다 나이를 하나 더 먹는다는 착잡한 심정이 한 해를 접어 넘기기 전에 우리앞을 가로 막습니다. 늘 원대한 꿈을 가지고 새로운 한 해를 벽두에 시작하지만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오면 결산해야 할 것들이 손아귀에 한 줌도 안되게 남습니다.

우리가 한 해를 넘기고 또 한 해를 맞는다는 예상을 하고 있으니까 사실 그렇게 초조하지는 않겠지만 나중에 우리가 인생을 다 살고 결산해야 할 때는 그야말로 후회도 많고 아쉬움도 많고 인생을 새로 시작한다면 이렇게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꿈을 꾸게도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한 해를 마감하며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결산의 원칙 한 가지를 같이 묵상하고저 합니다.

이 오늘의 묵상은 먼 훗날 우리가 인생전체를 마감해야 할 시간에는 더욱 더 중요하게 해야 할 한 가지 일이며 한 사람이 어디에 살다가 그 곳을 떠날 때에도 이루어야 할 결산의 원칙이 바로 이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결산의 원칙은 다름 아닌 바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공동번역에는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 하십시요.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읍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라고 번역했는데 개역성경에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했읍니다.

이 두 가지 번역이 다 의미가 깊은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여기에서 두 가지 사실이 두드러집니다. 한 가지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의 빚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한 해를 결산하는데 무엇을 결산할 것인가?

첫째는 빚진 것을 갚는 것이 한 해를 결산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연말이 되면 수 없는 고지서가 날아오고 해가 가기 전에 갚으라는 독촉을 많이 받게 됩니다.

남에게 빚진 것을 당연히 갚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빚을 갚는다는 것은 남을 위해서 갚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 빚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모두가 이 빚은 단순한 빚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를 메는 사슬이기 때문에 갚아야 한다는 의미가 있읍니다.

유명한 주기도문에 이런 대목이 있읍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말에는 이렇게 죄라고 번역이 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빚이란 말로 되어 있읍니다.
“우리에게 빚 진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빚을 사하여 주옵시고...”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우리에게 빚 진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 빚도 사하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탕감이나 갚음이 없고서는 없어지지 않은 부담이요 짐입니다.

열왕기하 4장에 보면 신학교에서 엘리사란 선생님 밑에서 신학수업을 받고 있는 신학생이 신학공부를 하다가 부인과 두 아들을 놓아둔 체 세상을 떠나자 이 부인이 선생님인 엘리사에게 가서 이런 하소연을 합니다. 자기 남편이 생전에 형편이 어려워서 빚을 얻어서 공부를 했는데 남편이 죽자 그 빚쟁이가 빚을 갚지 못하면 두 아들을 종으로 삼겠다는 기막힌 사연이었읍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기름이 흘러도 흘러도 넘치는 기적을 베풀어 그 과부를 도와주면서 이 기름을 팔아서 그 빚을 갚고 그 두 아들을 종으로 끌려가지 않게 하라고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옛날에는 빚을 갚지 못하면 종이 되었읍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보속의 의미가 있다고 하는데 그 의미는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죄의 값으로 죽음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 절박한 상황을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죽음의 빚을 갚아 주셨다 하여 보속의 의미가 있다고 했읍니다.

빚이란 것은 자유의 속박이며 자기 자신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메임입니다. 이것은 빚을 갚음으로써 자유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는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아야 합니다. 남이 자기에게 무엇을 해 준 은덕을 입게 되면 언제는 그 은덕이 자기에게 부담으로 와 있읍니다. “나는 자기가 어려울 때 이렇게 저렇게 해 주었는데도 자기는 나를 이렇게 대하더라. 나는 이런 일들을 해 주었는데도 은혜도 모르더라.” 하며 비난합니다.

사람이란 것이 남에게 은혜를 베풀기는 하지만 그 은혜를 베푸는데 있어서 항상 부담이란 꼬리를 붙여서 은혜를 베푸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빚을 진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대단히 자신이 부자유스러워 지게 하는 멍에입니다. 남에게 빚을 졌다면 그 빚은 할 수만 있으면 갚아야 합니다. 경제적인 빚이든, 신세를 진 빚이든, 어떤 형태의 빚을 졌든 갚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빚지고 살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가만히 보면 빚은 습성인 경우도 많습니다. 빚을 얻지 않고도 홀로 잘 해 나갈 수 있는데도 어떤 사람을 보면 걸핏하면 빚을 얻어서 해결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읍니다.

저는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이에 대한 훈련을 단단히 받은 바가 있습니다. 후일 너는 목사를 할터인데 목사는 가난할 것이므로 교인들의 도움을 쉽게 받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일이 없도록 너는 늘 자립하는 훈련을 해라고 아버지께서 혹독하게 훈련시켰습니다. 그래서 저는 길을 가다가도 다른 사람에게 쉽게 묻지 않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내 힘으로 길을 찾아볼 요랑으로...

빚을 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 만큼 자신의 삶에 홀로서기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독립적인 삶의 자세, 자기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게 하는 자유의 존재가 되기 위하여 빚은 지지 말아야 하고 진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한 해를 마무리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빚은 꼭 갚아야 한다는 빚진 자의 의무를 말하고 있음과, 동시에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빚을 준 자, 즉 채권자의 빚에 대한 탕감의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읍니다.

빚진 자가 빚을 갚는 것은 당연하고 일차적으로 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가 해야 할 또 하나의 한 차원 높은 의무는 빚을 탕감해 주는 너그러움을 가지란 것입니다.성경에는 사실 빚을 갚으란 이야기 보다 빚을 탕감해 주란 이야기가 더 많습니다.

앞에서 생각했던 주기도문을 다시 보면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빚진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빚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가 하나님에게 진 빚을 탕감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이 탕감을 마치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 주는 것처럼 해 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과연 우리는 우리에게 빚진 자를 그렇게 탕감해 주고 있는지 모르겠읍니다.

어떤 아프리카 신학자가 서구 크리스챤들에게 이렇게 되묻는 것을 본 일이 있는데 서양은 저개발국가들에게 엄청난 외채를 놓고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그 나라들을 향해 갚으라고 독촉을 하면서 어떻게 주기도를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자기들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에게 진 빚을 탕감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만약 이웃에게 빚을 주고 주일 아침에 신나게 독촉을 하고는 교회에 가서 이 주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서 하나님에게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것도 모순입니다.

마태복음 18: 23 에 보면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왕이 종들이 왕에게 진 빚을 정리하고자 한 종의 빚을 계산을 해 보니까 일만 달란트를 빚을 졌습니다. 왕은 그 종에게 명령을 합니다. “너 자신과 너 아내와 자식을 다 팔아서 이 돈을 갚으라.” 그러자 종이 왕에게 애걸복걸을 하면서 제발 좀 참아주십시요. 좀 더 여유를 주시면 꼭 갚겠습니다. 하도 그 종이 불쌍해서 왕이 그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10000 달란트를 탕감 받고서는 나가서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불러 놓고는 멱살을 잡고 자기에게 빌린 100 데나리온을 갚으라고 악을 썼습니다. 그 동료가 아무리 사정을 하고 꼭 갚겠노라고 해도 들어주지 않고 그 동료를 빚을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그 소문을 들은 왕이 “이 괘씸한 놈 네가 애걸하기에 내가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었지 않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네 동료에게도 자비를 베풀었어야 했지 않느냐?” 하고 호통을 치면서 옥에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늘나라는 이렇다 하고 시작하며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란 말로 끝을 맺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빚을 탕감해 주는 자비심을 가지라는 권면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앞에 그렇게 대접받기 위해서 너희도 그렇게 형제에게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레위기에는 희년이란 것이 나옵니다. 안식년을 7번 지나서 49년이 된 지 7달이 지난 대 속죄일이 되거든 큰 나팔을 불고 모든 묶인 것을 해방시키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이것이 소위 희년인데 이 희년은 모든 빚진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대 사면입니다. 빚도 탕감되며 남에게 넘어간 땅은 다시 본 주인에게로 돌아오고 땅은 한 해 동안 쉬게 되며 종은 풀려남을 받습니다. 모든 메인 것이 풀리는 것이 희년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반도도 갈라진지 50년이 되는 1995년을 희년이 되게 하자고 기독교가 선언하고 일했는데 정말 요즈음 같으면 1995년이 되면 정말 묶은 땅들이 다시 풀려 통일이 되는 복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희년도 탕감의 의미가 큰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들로 하여금 인간들의 사회제도 경제제도에도 마치 죄를 사해 주시는 것처럼 모든 빚을 탕감해 주는 이 자비를 베풀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한 해를 마감하기 전에 혹시 형제들에게 준 빚이 있습니까? 그것이 경제적인 것이거든 형편에 맞게 그 빚을 탕감해 주는 자비가 있어야 합니다. 누구에게 원한의 빚을 주고 있습니까? 누구에게 참으로 은혜의 빚을 준 일이 있습니까? 갚지 않는다고 괘씸해하기 전에 그것을 탕감해 주는 자비가 더 우선적이고 큰 것입니다. 베푼 것을 베푼 것으로 아름답게 간직하여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이 빚을 갚는 일과 또 빚을 탕감해 주는 일 이상에 있습니다. 그것은 피차 사랑의 빚은 놓기도 하고 지기도 하자는 것입니다. 빚에 있어서 한 가지 예외는 이 사랑의 빚이란 말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빚은 어쩌면 갚지 않아도 되는 것일지 모릅니다.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한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 사랑의 빚, 이것을 우리가 서로 많이 주고 많이 지더라도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눈여겨보며 기억할 것은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고 한 이 말씀은 사랑의 가치란 것이 얼마나 중요하냐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율법이 사랑으로 완성된다고 했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한 해를 마감하면서 우리 그동안 빚을 졌던 것을 깨끗이 갚도록 하십니다. 서로 찾아가서 내가 이런 빚을 졌는데 갚고 싶다고 고백하며 우리가 진 빚을 갚읍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빚진 자의 빚을 탕감해 주십시다. 어떤 마음의 빚을 내게 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찾아가서 그 손을 붙들고 그 빚을 탕감해 주는 결산이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서로에게 진 사랑의 빚은 기억하십시다. 더 많이 서로 사랑의 빚을 주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더 많이 빚을 주기 위해 새해를 노력하는 결심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박성원 목사, 제네바한인교회 송년주일 설교, 199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