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태복음 9:14-17

다사다난했던 1994년을 보내고 새해 1995년을 맞이한 우리 모든 부산진교회 교우 여러분들의 가정과 개인 그리고 하시는 사업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지난 한 해는 청심환을 먹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냥 지날 수 없었던 충격적인 한 해였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이런 평가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솔직한 평가라고 생각됩니다.


역사적 경험에 있어서 결코 과거를 쉽게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내일을 충실하게 설계하기 위한 가장 좋은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항상 과거에 족쇠가 묶여 살 수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교훈으로 삼아 내일을 향한 전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해를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받은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고 새로운 각오로 또 한 단계 역사의 계단을 더 오르려는 전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새해를 여는 첫 주일에 우리가 명상할 하나님의 말씀은 유명한 예수님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으란 말씀입니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시간을 보는 눈에는 여러가지 시각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돌고 돈다는 윤회설이 있는가 하면 시간은 나선형으로 돌면서 그러나 앞으로 전진하는 그런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시간의 흐름을 “일직선”으로 봅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그리스도가 “알파”와 “오메가”, 즉 처음과 나중이라 하였는데 이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말이며 시간은 시작에서 출발하여 끝을 향해서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과격한 시간개념입니다. 우리는 흘러간 시간에 다시 돌아올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한번 지나간 역사의 자취는 지울 수도 없고 고칠 수도 없이 영원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은 이런 결과을 남긴다는 것을 알고 겸허하고 조심스럽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직선적 시간개념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시간에 대해 책임의식을 강하게 안겨주는 개념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간은 돌고 도는 것이기 때문에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한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고 또 새로 받은 시간은 자기의 책임하에 창조적으로 써야 한다는 그 의식 때문에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시간은 항상 소중한 것이고 책임적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기독교는 이처럼 시간을 일직선상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외에 또 하나 독특한 개념으로 시간의 흐름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시간개념은 미래지향적이라는 사실입니다. 항상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가 특징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성서를 읽어 보면 전체적으로 과거에 대한 회상보다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강하고 낡은 전통에 대한 집착보다는 항상 새로운 것을 향한 진보의 의식이 강하게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말씀들을 들 수 있습니다.
 
우선 새해를 맞이하게 되는 년초에 가장 많이 읽혀지는 말씀가운데 고린도후서 4:16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여기에서는 겉사람은 후퇴하는 존재로 되어 있고 새로워지는 속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로마서 12:2에 나온 말씀으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에서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세대를 지향하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는 유명한 에베소서 4:22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여기에서는 아주 직접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에 의해 지음을 받는 완전히 새사람이 되라는 명령입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3:12-14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이것은 마치 육상선수가 전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앞의 목표만을 주시하면서 달려나가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이번에는 아주 강력한 복음의 말씀인 고린도후서 5:17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옛 것은 지나가고 완전히 새 것으로 바뀌는 변화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21:1의 말씀은 우주전체가 종말에 새 것으로 바뀌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새로운 미래가 열려졌을 때 미래를 향해 나가야지 과거에 집착하면 안된다는 이야기는 그 유명한 롯의 아내가 소금기둥이 된 이야기에서 극적으로 나타납니다. 주의 천사는 롯의 가족에게 소돔과 고모라성이 멸망할 때 결코 거기에 미련을 두지 말고 과거에 매이지 말라고 하는 뜻으로 “돌아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롯의 아내는 그 미련때문에 뒤를 돌아다 보았고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이것은 과거에 결코 매이지 말고 미래를 향해 전진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런 성경의 말씀들을 보면 성서의 시간철학은 철저히 미래지향적이고 새로운 창조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면 기독교는 과거를 소홀히 하고 무시하는가?”란 질문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 과거에 대해 성경보다 더 귀중하게 과거를 보존하는 것도 없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의 유월절은 출애굽사건의 과거를 철저히 기억하고 담은 의식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제정하신 성만찬은 바로 예수의 과거의 사건을 보존하고 기념하는 것으로 과거를 이보다 더 생생하게 보존하는 의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서가 과거를 보존하고 지키는 모습은 독특합니다. 그것은 다른 데서는 과거를 그저 박물관에 보관하는 식으로 과거에 집착하지만 성서에서 과거는 그냥 과거로 사장시켜두는 것이 아니라 항상 오늘에 그 과거를 살리는 식이 되어 있습니다. 유월절은 과거를 기념하는 의식이지만 그것은 그 옛날의 경험을 오늘에 다시 경험케 하는 의식이므로 과거를 오늘에 재생시키는 의식입니다. 성만찬도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동시에 그 죽으심을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전하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오늘에 늘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과거를 보존하는 방식은 박제된 과거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과거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성서는 심지어 과거까지도 미래지향적으로 사용합니다. 위의 모든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성서는 분명히 미래 지향적이고 과거에 대해 집착하기 보다는 미래를 위해, 구습에 종노릇하고 매여 살기 보다는 과감히 탈피하고 새로운 지평을 향해 달음질 하는 힘이 기독교에는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개념을 예수님께서 직접하신 말씀입니다.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아주 과격한 말씀입니다. 새 베를 낡은 옷에 붙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지 말라는 것입니다. 새 베는 새 옷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질서는 과거 유대종교의 질서와는 확연히 다르므로 새로운 예수의 질서를 낡은 유대종교의 시각에서 보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얼마나 혁명적인 말씀입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면 이 새 베를 낡은 옷에 붙이고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어서 새 포도주도 못쓰고 낡은 부대도 못쓰게 되는 그런 결과를 빚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지난 1994년을 맞이한 벽두에 새로운 정부에 대해서 얼마나 열렬한 지지를 보냈으며 얼마나 희망에 찬 기대를 가졌더랬습니까? 왜 그렇게 지지를 보내고 희망을 가졌더랬습니까? 그것은 이 정부가 우리 나라를 새롭게 개혁하고 변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제창한대로 신한국이 이렇게 건설되기를 희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국민은 극도로 실망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개혁은 지속되지 않고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듯한 인상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새 베를 낡은 옷에 붙이고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으려고 하는 시도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새 포도주도 못쓰고 낡은 부대도 버리게 되는 결과를 빚게 될 것입니다. 대통령이 자주 한 말 가운데 변화하고 개혁되지 않는 국민은 망한다고 했는데 정말 변화되지 않고 개혁되지 않으면 망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제 마치 학생들이 새 학년이 되어서 새로운 교과서를 받고 새로운 공책을 받은 것 같은 그런 상황입니다.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새로운 설계를 해야 이 새로운 해가 주어진 보람과 그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새 해를 맞이하고서도 구습을 좇고 옛 것에 매이고 낡은 옷에 붙이려 하고 낡은 가죽부대에 담으려 한다면 우리의 모든 것이 같이 못쓰고 말 것입니다. 새로운 각오가 필요하고 끊임없이 개혁하고 새로워지려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도 보면 개혁하고 변화시키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보이지 않는 영역에는 옛 것이 발목을 잡고 전진하지 못하게 하는 기운들과 의식이 있습니다. 새 것을 옛 옷에 붙이게 하거나 아예 새 것을 배타하는 그런 의식도 있습니다. 이것은 옛 것에 안주하려는 무사안일한 의식입니다. 자고로 윤회적인 역사관을 가진 민족이 발전한 법이 없습니다. 항상 답습적이고 퇴행적입니다.
 
우리 민족이 구 한말에 민족의 역사가 정체되었을 때 실학파 학자들이 조상대대로 믿어오던 유교를 버리고 과감히 기독교를 수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조상 대대로 믿어오던 종교를 버린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의 전통 종교의 역사관에서는 도저히 미래를 향한 개척과 개혁과 새로워지는 발전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문명의 발전을 주도하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려고 그렇게 애를 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새로운 한해가, 365일이라는 짧으면 짧겠지만 길다면 긴 날수를 받았습니다. 이 새롭게 받은 날 수를 우리가 청심환을 먹지 않고는 지낼 수 없었던 지난 해와 같이 답습하시겠습니까? 후회스러운 과거와 같은 양식으로 이 새로운 해를 사시겠습니까? 하얀 백지와 같은 이 새로운 시간들을 어떤 색깔로 칠해 가시겠습니까? 어떤 인생의 그림을 연출하시려고 합니까?
 
저는 기대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올 한해 그려가는 그 그림들이 작가인 내 자신과 그 그림을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아름다움을 안겨주는 그런 그림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후회스런 지난 해의 우리의 그림, 정말 찢어버리고 싶은 그 그림과는 전혀 다른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누구에게나 보여주고 싶은 명작을 그리는 한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참회의 기도
하나님, 새롭게 다가오는 한 해의 첫 날에
창조주 하나님 앞에 고개 숙여 참회합니다.
앞 날의 희망을 일구기보다 옛것 속에서
안정하려는 태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진리와 생명되신 주의 복음위해 싸우기보다
세속에 타협하고 자신만을 위했습니다.
온 세상과 비할 수 없는 주님으로 만족치 않고
사라질 것들에 집착하며 지내왔습니다.
주여, 귀중하게 주어진 새 날들엔
온전히 주님만 바라보게 하여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희망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아멘.

<박성원 목사, 부산진교회, 1995. 1. 1. 신년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