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네 곁에... (세월호 희생자와 연대하며)

누가복음 10:30-37

지난 주에 이어 이번 주에도 우리 목회자들은 설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꽃다운 생명들을 잃어가고 있는 지금 우리 모두는 어떻게 이 상황을 극복하고 이해해야 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딱 세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실종자를 구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생자 가족과 연대하는 일입니다. 정부의 책임하에 있으니까 정부가 책임을 지고 민이든, 관이든, 군이든 가장 전문가를 동원하고 서로 주도권 싸움하지 말고 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둘째는 진실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숨기려고 하지 말고, 덮으려고 하지 말고 진실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희생자와 희생자 가족에게 가장 큰 고통이 진실을 숨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보면 자기 잘못을 덮으려고 진실을 덮고 심지어 조작하고 통제하고 하는 행태를 많이 보는데 이것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는 것입니다. 선동도 해서 안되고 무마하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진실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셋째는 희망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심지어 절망 중에도 희망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이 이 희망을 이야기하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아니 지금은 신앙인이고 아니고 모두가 물에 들어가서 구조하는 일을 못할 바에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희망을 몸으로 이야기하는 방법이 자원 봉사이고 마음으로 하는 방법이 연대하는 방법입니다. 로마서 12:15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했습니다. 지금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일, 그 이외의 것은 해서 안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아주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은 해석할 때가 아닙니다. 여기에 가장 취약한 것이 두 구룹이 있습니다. 한 구룹은 정치권이고 다른 구룹은 종교계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세월호 침몰은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니 하는 식의 설교를 했다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지금 온 국민이 실종자들이 살아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노란색 리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일각에서는 노란색 리본이 무속에서 저승 보내는 색깔이라느니 이런 해석들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노란색 리본을 다는 국민들이 그런 마음으로 답니까? 한 명이라도 살아서 돌아오기를 마음으로 답니다. 이런 해석들을 포함해서 어떤 해석도 지금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제 집에 있는데 저의 집에 새누리당 도의원 후보가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시국이 이래서 말씀 드리기 죄송스러우나 이번 선거에 자기를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돌려 보내고 생각하기를 저런 사람이 도의원이 되면 이런 사고가 계속 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정치인들은 지금도 이 상황을 이번 선거에 어떻게 이용할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지금은 생명을 구할 때이고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아파하는 자와 함께 아파할 때이지 다른 때가 아닙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려는 말씀도 이 말씀과 관계가 있습니다. 제가 작년 3월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이런 어려움은 아니지만 약간의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 때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이런 경우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작년 3월에 국제회의 때문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 갔습니다. 거기에서 저는 평생 잊지 못한 일을 하나 당했습니다. 권총강도를 만난 것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청년 한 명을 데리고 아랍 에미레이트 비행기를 타고 출발했고 8시간 비행 끝에 중간 기착지인 두바이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에서 싱가포르에서 온 외국인 두 사람과 함께 합류해 요하네스버그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또 다시 8시간 비행 끝에 아침 7시경에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했습니다.

아침인데도 입국 심사장이 붐벼서 약 1시간 만에 나와서 짐을 찾고 우리를 데리러 온 운전기사를 찾았습니다. 운전기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공항 밖으로 빠져 나와 뻐스를 타고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호텔은 공항에서 멀지 않는 리조트 호텔로서 한적한 곳에 있었습니다. 뻐스가 호텔 입구에 도착하고 일행 3명이 먼저 들어가고 저는 맨 나중에 짐을 끌고 호텔 로비로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웬걸, 호텔 로비에 들어서니까 흑인 한 사람이 권총을 제게 겨누면서 땅에 엎드리라고 했습니다. 제가 생전 처음 당하니까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하고 있으니까 권총으로 제 머리에 갖다 대고 엎드리라고 소리쳤습니다. 일단 엎드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엎드려 있었습니다.

저는 평소에 요하네스버그 치안이 상당히 문제가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마치 한국의 민방위 훈련처럼 호텔에서 혹시 이런 일을 당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훈련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엎드리고 보니 이건 실제상황이었습니다. 강도는 두 사람이었고 한 강도가 총을 겨누고 다른 강도는 순식간에 지갑, 핸드폰, 컴퓨터를 포함한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갔습니다. 큰 짐, 기내용 가방, 컴퓨터 가방 등 모조리 다 털렸습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을 강탈한 무장강도는 짐을 차에 싣고 총을 위로 겨누며 공포를 쏠 듯이 하면서 떠나버렸습니다. 따라가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른 아침에 호텔로비에서 무장강도를 만날 수 있는지 의아해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직원중의 한 명이 공항에서 환전할 때 호텔주소를 써넣은 것이 화근이었던 모양입니다. 후에 호텔사장이 공항내부의 환전소와 강도들의 연계가 흔히 있다고 귀띰해 주었습니다. 경찰이 출동하고 조사를 했으나 혼신을 다해 하는 것 같지는 않고 그냥 건성으로 하는 것 같았습니다. 대충 대충 때우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한국대사관에 찾아가 영사를 만났는데 그 영사가, “교수님, 다친 데 없고 죽지 않은 것만 해도 큰 다행입니다.” 했습니다. 남아공에서는 권총을 위협이 아니고 바로 쏘는 것이랍니다. 심지어 강도를 하고 나서도 도망가면서 못 따라 오도록 다리 같은데 총으로 쏘고 간답니다. 남아공에서는 100불만 주면 청부살인도 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니까 정말 아찔했습니다.

무장강도를 만난 다음 후 저는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제가 정상적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고 전혀 딴 사람처럼 행동하더라고 했습니다. 강도를 당한 후 트라우마가 들어서 처음에는 그냥 멍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그 트라우마가 점차 짙어지고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안절부절하며 정신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습니다. 잠을 자면 좀 나아질까 해서 칫솔 등 일용품을 마련해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권총을 들고 문에 들어설 것 같고 자꾸 권총을 댄 머리가 선듯했습니다.

불안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그때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가 떠 올랐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보여지는 것이었습니다. 통상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착한 사마리아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해 보려고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느냐고 질문을 냈고 예수님은 그 율법교사에게 율법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율법교사이니만큼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가르침이라고… 예수님이 “네 말이 맞다.”고 하시면서 그대로 실천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율법교사가 빈정대는 투로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는 네 생각에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대답을 듣고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분명히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제 강도를 당하고 나니까 주인공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첫 번째 주인공은 강도 만난 당사자입니다. 희생자가 초점입니다. 그 다음 주인공은 강도였습니다. 강도 당한 사람에게 당장 해결되어야 할 것은 강도를 다시 잡아 빼앗긴 물건을 도로 찾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자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그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강도 만나고 나니까 누가 옆에 와서 요하네스버그는 치안이 안 좋으니까 평소에 조심을 해야 한다느니, 공항에서 돈을 바꾸지 않았어야 했다느니, 이런 치안이 안 좋은 곳에 여행을 할 때는 귀중품을 많이 가지고 오지 않아야 한다느니 온갖 충고를 하는데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경찰에 어떻게 진술해야 하며 보험사에게 어떤 요구를 해야 하는지 여러 가지 대응책을 가르쳐 주는데 그런 것은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강도를 잡아 물건을 다시 찾아주는 것이 지금의 유일한 과제였습니다.

지금 세월호 희생자와 희생자 가족에게는 실종된 사람을 구조해 내는 것, 그것 외에는 다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구조하느니, 어떻게 구조하느니, 누가 주도권을 잡느니,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느니, 원인이 무엇이니 밝히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강도 만나서 안절부절하고 있는데 가장 힘든 것이 뭐냐 하면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와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대답을 했는데 하고 나니까 또 다른 사람이 찾아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또 다시 이야기를 합니다. 몇 번 하고 나니까 누가 와서 묻는 것 자체도 아주 귀찮고 미웠습니다.

혼자 있는 것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누가 자꾸 와서 지금 강도를 잡는 본질이 아닌 상황설명을 자꾸 요구하는 것은 정말 귀찮았습니다.

저는 침대에 누워서 강도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남아공 사회에는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는 아파르타이트 정책으로 흑인들에게는 폭력과 분노와 복수심이 일상화되었을 것이고 수백년 백인들에게 수탈당한 흑인들은 지금도 살아갈 방도가 여의치 않으므로 쉽게 강도가 될 수 밖에 없는 남아공의 상황을 생각하자 강도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은 강도가 될 수 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빼앗긴 것은 강도 당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라도 나누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생각이 이런 방향으로 전개되자 정신이 안정되기 시작했고 어느새 잠이 든 것 같습니다.

이것은 누가 옆에서 해석해 준 것이 아니고 희생자인 제가 한 것입니다. 이번처럼 큰 위기를 만났을 때 희생자 자신이 스스로 해석하는 것 이외에 옆에서 다른 사람들이 이렇쿵 저렇쿵 하고 해석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제가 강도를 만나 보니까 강도 만난 그 상황에서 당장 필요한 것은 누군가 옆에 지켜있으면서 강도 만난 당사자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를 확인해 주고 그것을 해 주는 사람이 제일 좋았습니다. 그리고 저를 위로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강도를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서 실행하는 사람들이 제일 도움이 되었습니다. 위로 하고 도와주려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강도 만난 자가 필요한 것을 바로 제공해 주어야지 이렇게 저렇게 충고하는 것은 결코 좋은 도움이 아니었습니다.

제일 미운 사람은 옆에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 사람이 제일 미웠고 둘째로 미운 사람이 해석하고 가르치려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국상 중일 정도로 세월호 침몰로 꽃다운 어린 생명들이 당한 희생, 생떼 같은 자식을 눈앞의 물속에 가두어 놓고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부모의 온 몸이 녹아 내리는 아픔, 그 아픔을 함께 하는 온 국민들의 안타까움으로 무거운 아픔에 겨워하고 있습니다. 이 어려움 속에 초점을 맟추어야 하는 것은 희생자와 희생자 가족의 상황입니다. 희생자를 구해 내는 일, 그 일 외에 다른 것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부모가 죽은 자식을 부여잡고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게 해서 미안하다고 울부짖고 어떤 부모는 이 나라를 떠나겠다고 울분을 토하는 것을 보고 나라를 욕되게 해서 되겠느냐고 하는 둥, 이런 상황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종북세력이라는 둥, 침착하게 냉정을 찾고 균형을 잡아야 하는데 이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희생자와 희생자의 부모는 대한민국, 대한민국 정부만이 아니라 세상 자체를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울분에 차 있습니다.

배가 침몰한 이후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선장과 선원들의 행태는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고 정부의 무능이 이 정도냐 할 정도입니다. 국가행정의 최종 지시자인 대통령이 와서 모든 장비와 인력을 동원해 구조에 최선을 다 하겠다고 공언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조리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엄명을 하고 갔는데 그로부터 열흘 동안도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도 제가 지난 주에 겪은 이야기입니다. 지난 주에 학교에서 학술행사를 하는데 준비를 학생에게 지시하고 확인하면서 지시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학생에게 왜 지시한대로 하지 않았느냐고 다그치듯이 물었습니다. 학생이 당황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잘못은 내게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지시하는 사람에게는 지시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시대로 이루어지는 데까지 책임이 있는 것이라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날 그 학생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지시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으면 이행되지 않는 것을 탓하지 말고 이행되게 만드는 데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해군사관학교에 가면 이런 문구가 쓰여져 있다고 합니다. 용서하십시요. 영어로 해야 그 뜻이 분명해 지기 때문에 먼저 영어로 하고 한국말로 하겠습니다. “The best ship in times of crisis is leadership.” 위기의 상황에서 가장 좋은 배, ship은 바로 리더쉽,  leadership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강도를 만나보니까 그 상황에서 가장 제게 가장 불편했던 사람은 자기는 안 하면서 제게 이런 저런 정보를 주고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사람이 가장 불편했고 미웠습니다. 그 사람은 옆에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게 가장 편했던 사람은 옆에 오지 않고 저 먼 발치에 있으면서 내가 물이 필요할 것 같으니 물을 가만히 가져다 놓고, 의자가 필요하니 의자를 살며시 가져다 놓고, 내가 누군가를 찾고 있으니 그 사람을 불러다 주고 하면서 저 먼 발치에서 나를 지켜보며 내가 움직일 때 그 필요한 부분을 아무 말없이 채워주고 또 저 만치에 가 있는 그 친구가 가장 내게 편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도 실화입니다. 미국에 사는 어떤 한국 교수님의 딸이 한국에 와서 교통사고를 당하여 딸이 죽었습니다. 교수님이 딸을 미국으로 데려가 장례식을 마치고 망연자실해서 있는데 같은 학교에 있는 미국인 교수 한 분이 그날부터 컴퓨터를 들고 그 교수님 집에 와서 함께 있는 것입니다. 위로하거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저쪽 곁에 작은 탁자 하나 놓고 그냥 거기에서 자기 일을 하면서 곁에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친구이긴 하지만 그 사람이 옆에 와 있는 것이 싫었답니다. 그러나 점점 같이 있으니 어느 새 모르게 자기는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점이 자신을 든든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외국인 친구 교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곁에 있었습니다. 아마도 세월호의 아픔을 겪는 모든 사람들,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실종자 가족에게는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고 그들의 곁 저 만치에 그냥 함께 있어주는 것, 그것이 가장 좋은 연대고 위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안산에 있는 어떤 목사님이 지난 주에 설교하면서 이렇게 절규했다고 합니다.

“아직 살아있는 자는 꼭 살아서 돌아오라!”
“이미 죽은 자는 꼭 부활해서 돌아오라!”

그 목사님의 설교가 크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있는 사람을 살려서 돌려보내주시고 죽은 자는 부활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희생자와 희생자 가족 곁에서 늘 그들이 원하는 도움이 되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박성원 목사, 포항동해큰교회 주일예배 설교, 2014. 4. 27.>